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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81화 (81/121)

81화

소어와 어떻게 되든, 그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뭐 얼마나 각별한 사이라고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어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욕망할 줄 모른다는 그가 자신에게만큼은 욕심을 숨길 수 없다고 말할 때.

자신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한 발짝도 다가오지 못하던 그 순간에.

‘……나는 소어가 모두에게 그런 줄 알았는데.’

익숙하다고 여겼던 이의 이면은 어딘지 낯설었다.

그리고 동시에 묘한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다고 여겼던 이의 미소가 온전히 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기분이란.

어쩐지 손끝이 간질거리고 발을 꼭 움츠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티스베는 그날 밤 내내 고민한 끝에 결정했다.

살바토르에 가서 흑마법사들에 대한 것도 찾아보고, 소어에 대한 마음이 뭔지도 확실히 정리하자!

하지만 그리 녹록치 않은 것이 현실인 법.

아니, 어쩌면 왠지 자신에게만 그리 녹록치 않은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계획은 첫 번째부터 아주 거하게 막혔다.

흑마법사에 대한 걸 찾아보려면 신전에 가서 정보를 모아야 했는데.

“살바토르령 신전에 날 알아보는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바로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티스베가 쾅 하고 소파의 팔걸이를 내리치자, 검은 펜던트 너머에서 숨 넘어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흘론은 정말 꺽꺽대기 직전까지 웃더니 말했다.

“푸하학, 아니, 그러게, 으학, 제가 미리 신전 좀 가라고 했잖습니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사실 지금 티스베와 신전은 사이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뭐, 그게 티스베의 잘못은 아니긴 했다.

따지고 보면 신전이 에스텔의 등장 이후 티스베를 팽한 것이 시작이었으니까.

그동안 티스베가 지독하게 욕을 먹은 것의 반절은 모두 신전 때문이었다.

티스베를 사기꾼이자 악녀로 만들면, 신전이 신탁을 잘못 해석한 것에 대한 책임은 스리슬쩍 묻히기 마련.

칼릭스트와 살바토르에서 아무리 여론을 바꾸려고 노력해도 신전이 민심을 꽉 쥐고 있으니 먹힐 길이 있나.

그때까지만 해도 신전에서는 발 빠르게 움직인 자신들을 무척 뿌듯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이 내가 성역에서 활약 좀 했다고 꽁해 가지고…….”

적어도 티스베가 성역에서의 활약으로 극적인 부활을 하기 전까지는.

심지어 성역에 티스베와 에스텔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 킬리안이라는 소식까지 쫙 퍼지면서, 신전은 그대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신탁 해석도 잘못하고, 에스텔을 고분고분한 신전의 말로 만드는 것도 실패. 게다가 킬리안의 혜안이 없었더라면 이교도들의 테러도 막지 못했을 거라는 얘기까지 돈다고? 이거 완전히 영향력을 잃었네! 하하, 고소하다.

그렇게 됐으니 신전이 살아날 방법은 한 가지.

두 성녀와 신전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다.

개중에서도 전국적인 영웅이 된 티스베와 관계를 회복하면 덩달아 신전도 그 유명세에 묻어 갈 수 있을 터.

신전은 티스베가 회복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끊임없이 사람을 보냈다.

제발 한 번만 만나자고.

-응, 안 가.

물론 티스베가 전부 거절했지만.

사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정체를 숨기고 신전을 가겠다는 발상을 할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여긴 외진 곳이니까.’

이목구비 위치만 좀 나온 영상구 따위로 알아볼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티스베가 수도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교황이 제국 전역으로 티스베의 얼굴을 아는 사제들을 파견했다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런데 진짜, 지금 교황 제정신인가? 고작 나 하나 찾겠다고 수도 인력을 전국으로 보내?!”

“아, 아가씨 그거 신성모독입니다!”

“뭐 어쩌라고? 내가 성녀인데!”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티스베가 다시금 팔걸이를 쾅 내리쳤다.

그녀가 볼 때 지금 교황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티스베의 얼굴을 아는 사제라면, 사실상 수도에 있는 모든 사제나 다름없었다.

신전 내부에서도 나름 엘리트들만 모아 놓은 집단이라는 건데.

그걸 티스베를 찾겠다고 전역으로 쫙 풀어 버린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신전에 갔으면 그대로 교황이랑 차 한잔 할뻔 했잖아!”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신전에 갈 준비를 하던 차에, 마흘론의 검은 펜던트가 급히 울려 댄 것이다.

그 덕분에 교황이 미친 짓거리를 했다는 걸 알게 된 티스베는 아주 조심스럽게, 신전의 뒷문으로 접근했다.

‘신전 구조가 어딜 가나 똑같이 생겨서 망정이지.’

신전의 뒷문은 사실 사제들만이 위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도의 신전을 어릴 때부터 제 집처럼 드나든 티스베에게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는 정보나 마찬가지.

‘이번에는 투명화도 할 수 없어서 곤란했다고.’

신전의 사제들은 전부 마나를 다룰 줄 알고, 또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일평생 마나 수련을 해 왔으니 티스베보다도 마나를 느끼는 기감이 발달했으리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괜히 성좌의 권능을 빌어 얕은 수를 썼다간 정체를 발각 당할 게 뻔했다.

그래서 티스베는 바짝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뒷문으로 향했고, 우연히 사제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너도 그 얘기 들었어? 은발에 금안을 가진 여자를 보면 무조건 데려오라고 했다는 거.”

“들었지. 그 얘기 모르는 사제가 어딨냐? 성녀 찾겠다고 교황님께서 직접 나서셨는데.”

“근데 이렇게 외진 곳에 성녀님이 오실까?”

“왜? 또 모르잖아. 여긴 성녀 약혼자가 주인인 땅인데. 한 번쯤 올 수도 있지.”

“에휴, 난 모르겠다. 일단 까라면 까야지.”

사제들은 심신 안정에 좋다고 알려져 있는 향초를 태우며 저들끼리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 수도에서 파견된 사제들이 와서 성녀 티스베가 수도를 떠났다는 소식을 전한 것부터.

은발에 금안을 가진 여자가 신전에 오면 무조건 보고하라는 것.

교황은 모든 성좌의 권능을 다루는 데 통달한 인물이라 보고가 올라가는 동시에 교황이 그 신전으로 방문할 수 있다는 것까지.

“그런데 이 근처에 사람이 있나?”

“이쪽은 사람 다니는 길목도 아니라 없을 텐데?”

“아니, 저쪽에서 뭔가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아서.”

그 말을 마지막으로 티스베는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물고기자리의 권능을 아주 약간만 끌어올려 도망친 것이다.

“그래서 걔들이 아가씨를 눈치챈 것 같습니까?”

“나야 모르지. 기감이 발달한 놈들이면 마나를 사용한 흔적을 눈치챘을 거고, 허접한 말단이면 못 챘을 거고.”

여태 잠잠한 걸 보니 아마 후자인 듯 싶기는 했다.

그 뒤로는 몸을 사리느라 신전 그림자가 지는 곳에도 가지 않았더니 그 이상은 알 길이 없었다.

티스베가 한숨을 내쉬자, 펜던트 너머에서 마흘론이 낄낄대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가씨, 꼭 신전에 가야만 하는 겁니까?”

“꼭 신전에 가야만 해. 그것도 살바토르의 신전으로. 주변의 마나를 탐지할 수 있는 장치는 신전과 세이즈만 있거든.”

물론 이것도 <괴물꽃>에서 나온 정보로 아는 거지만.

세이즈는 아예 망명하지 않는 이상 발을 들일 수도 없으니 현재로서 가능한 곳은 신전뿐이다.

“그러면 그냥 포기하고 교황과 차 한잔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별 일 아니잖아요.”

“별 일 아니긴 하지. 내가 정체를 숨겨야 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말이야…….”

그리고 바로 거기서 티스베가 줄곧 골머리를 썩는 두 번째 이유가 나온다.

“말했잖아, 마흘론. 여기 사람들은 소어가 이제 약혼자가 없는 줄 알아. 나랑 파혼한 줄 안다고. 그런데 소어가 데려온, 테레지아라고 하고 다녔던 여자가 갑자기 소어의 전 약혼녀였다는 사실을 알려지면 어떻겠어?”

“……공작님 입장이 많이 난처해지시겠군요.”

“그렇지. 그 빌어먹을 교황이 나랑 만났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쳐 줄 리도 없고.”

그러니 정체를 밝힐 수도 없고, 자연스럽게 조사는 정체되었다.

그것까지만 해도 심란한데.

티스베를 정말로 심란하게 하는 문제는 하나가 더 있었다.

“그럼 공작님께 부탁하면 안 되는 겁니까? 공작님이 아가씨 부탁을 거절할 리 없잖습니까?”

“……바로 그게 문제야.”

티스베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소어가…… 날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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