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보름 뒤.
“기분이 이상해.”
“왜 그러세요?”
티스베의 중얼거림에, 검은 펜던트에서 마흘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또 공작님이 도망이라도 가셨습니까?”
“걔가 여기 주인인데 어디로 도망을 쳐. 안 쳤어.”
“그럼 적응이 힘드십니까?”
“아니, 여기 사람들 괜찮더라. 기사들 실력도 좋아서 간만에 나도 검 좀 잡았어.”
“예? 아니, 제가 대련하자고 할 때는 그렇게 안 해 주시더니!”
“힘 조절할 자신이 없었다니까. 여긴 다들 튼튼해서 좀 써도 안 죽더라고.”
티스베가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앉아 있던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살바토르에서 지낸 지 보름 째.
티스베는 빠르게 살바토르에서의 생활에 적응했다.
살바토르의 사람들은 춥고 험준하다고 알려진 이곳의 기후와 달리 다들 상냥한 편이었다.
‘겉으로 보자면 좀 무뚝뚝해 보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소어의 기사들과 친해진 덕분에 생활은 매일이 활기찼다.
“아가씨! 대련 한번 하시죠!”
“살바토르에 오셨다면 이 음식은 꼭 드셔 보시는 게 좋습니다. 특히 여기에 이 향신료를…….”
“으엑, 밀워드의 레시피는 믿지 마세요. 얘처럼 입맛 이상한 애를 본 적이 없다니까요.”
밀워드는 과묵하지만 예의가 바르고 친절했으며, 게일은 개중 가장 사람이 좋았다.
라스는 조금 사납고 장난기가 많긴 했지만 그래서인지 가장 쾌활하기도 했다.
세 사람은 칼데일에서부터 함께한 덕분에 이 성에서 소어를 제외하고 티스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살바토르 성으로 돌아온 날부터 나비를 쫓는 강아지처럼 티스베의 꽁무니를 쫄래쫄래 쫓아다녔다.
‘본인들은 나름대로 잘 숨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의 덩치 좋은 장정들이 모여서 몸을 구기고 있는데 티가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결국 그들의 관심을 견디다 못한 티스베가 먼저 말을 거는 것으로 그 우스운 행각은 끝이 났다.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따라다녔나 했더니.
“그, 혹시 대련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주 큰 일이라도 묻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 저것이었다.
“저도 아가씨가 담긴 영상구를 봤습니다. 무척 대단한 실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검을 맞대어 보고 싶었습니다.”
“저희가 어디 가서 신성력을 가진 사람과 맞붙어 보겠어요?”
“딱 한 번이면 됩니다. 딱 한 번! 힘 조절 안 해 주셔도 됩니다!”
그 간곡한 부탁에 티스베는 훈련장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세 사람과 같은 땅에 섰다.
[난 부탁받은 대로 하는 거예요.]
원망 말아요. 그 목소리가 세 사람의 뇌리에 새겨지듯 쑤셔 박힌 뒤.
10분이 지나자 그 훈련장에 서 있는 건 티스베 혼자뿐이 되었다.
‘이제는 더 귀찮게 안 굴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그 뒤로 세 사람은 틈만 나면 대련을 하자며 졸라 댔으니까.
그렇게 등쌀에 못 이겨 대련도 하고, 좀 티격태격도 하다 보니 어느새 친해져 있었다는 이야기.
“덕분에 심심할 틈도 없고, 음식도 입에 맞아. 밀워드가 추천해 준 건 맛이 없었지만…….”
그것만 빼면 다 괜찮았다.
살바토르에서의 생활은 아주 편안했다.
“내가 망명을 계획했을 때 바랐던 삶이 바로 이거였어.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는 삶.”
비록 형태는 많이 달라졌지만, 어떤 의미로 티스베는 원했던 목표를 손에 거머쥔 셈이다.
밖에 나가도 힐끔거리는 사람이 없다.
그녀를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도 없고, 별 목적 없이 어울릴 만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 겁니까?”
“일단 두 가지가 있어. 첫 번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안 되는 것.”
“두 번째는요?”
“소어가.”
티스베는 한 마디를 뱉어 놓고,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어가 날 차갑게 대해.”
나비 날갯짓보다도 작은 소리였다.
* * *
티스베가 살바토르령으로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소어에 대한 감정을 확인해 보기 위해.
그리고 두 번째는 살바토르령에서 조사할 것이 있었기 때문에.
모험을 떠나는 에스텔과 함께 첫 목적지로 이동을 하던 중, 에스텔은 티스베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저, 공녀님. 사실 상의 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었어요. 그동안은 너무 정신이 없어 보이셔서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는데…….”
“괜찮아요. 뭔데요?”
“제가 모험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이유 말인데요. 사실 한 가지가 더 있거든요.”
물론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이렇게 급히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에스텔은 말했다.
“공녀님과 함께 그동안 제국 곳곳을 돌아다녔잖아요. 그때마다 비슷하게 들려온 이야기가 있었어요.”
바로, 마물이 자꾸 실종된다는 것.
“사실 마물은 그리 드물지 않아요. 단지 대부분은 평소 자연의 일부에 그림자처럼 녹아 있는 것뿐이거든요. 그래서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가, 가끔 자극을 받아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눈에는 마물이 아무런 전조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거고요.”
“음, 그렇죠.”
이 정도 정보는 <괴물꽃>을 보았기에 티스베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물을 불러내서 기사를 제국 곳곳으로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녹아들어 있는 마물을 불러내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마물마다 소리에 반응하는 개체가 있고, 빛에 반응하거나 또는 후각, 통각 등에 반응하는 등 반응하는 감각이 달랐기 때문에 더욱 찾아내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 있을 때만 숨어 있을 뿐 사실 마물들끼리는 서로서로 소통을 하는데, 어느 시점부터 연락이 두절된 마물들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마물들도 녹아들어 있는 동안에는 겨울잠을 자는 상태와 비슷하기 때문에, 밖에서 일어난 일을 명확히 알 수는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한두 개체가 난동을 부리다 죽었나 했대요. 마물들은 멀리 있는 곳의 소식까지는 모르니까요.”
“그런데…… 이번 일로 오가면서 멀리 있는 곳의 소식까지도 듣게 된 거군요.”
“맞아요. 한두 군데에서만 이런 게 아니라, 곳곳에서 이런 소식이 들리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확실히 뭔가 이상하네요.”
“그렇죠. 그래서 이번에 만난 마물들 위주로 이야기를 들어 보면서 주변을 조사해 보려고요.”
아마 별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며, 에스텔은 쾌활하게 떠났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티스베는 도저히 이 상황을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괴물꽃>에서 흑마법사들이 금단의 실험을 통해 재앙급 마물을 탄생시켰을 때.
‘마물들이 곳곳에서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나왔었으니까.’
마물을 만들어 내는 실험이니 당연히 마물이 실험 재료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건 작중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이후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괴물꽃>의 진행대로라면 지금은 티스베가 죽는 시기였다.
에스텔이 모험을 떠나기에는 약간 이른 시기.
바꾸어 말하자면 에스텔이 대륙 곳곳에서 마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순간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대륙 어디든 하루 안쪽으로 갈 수 있는 티스베가 바로 여기 있으니 말이다.
‘원작과 시기는 다르지만, 이게 우연일 리 없어.’
만약 실험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면 마물들이 사라지는 것이 지금 드러나도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이걸 눈치채도 흑마법사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 조금 드러나 있다는 거지.’
고작 그 근거지가 북쪽, 그것도 살바토르령 근처에 위치해 있다는 것 정도?
그것은 재앙급 마물이 등장할 것을 알면서도 티스베가 여태 손을 쓰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세상을 구하는 건 그녀의 몫이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마흘론. 나는 이런 문제에 끼어드는 성격이 아냐.”
“그건 저도 잘 알죠.”
티스베는 그렇게까지 이타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내 능력 밖의 일에 괜히 손 뻗어 가면서까지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굳이 따지자면 나도 일 터지면 도망가고 싶은 그런 부류거든?”
그 누가 전쟁의 최전선에 서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나 개중에는 최전선에 자원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어쩌면 대단한 사명감과 투철한 의지로, 혹은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서.
“생각해 보니, 문제가 터지면 소어가 곤란하겠더라고.”
북쪽에 근거지가 있기 때문에 재앙급 마물이 등장한다면 소어부터 그 영향을 받게 될 터였다.
<괴물꽃>에서는 그마저도 소어가 죽은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크게 조명되지 않아 잊고 있었을 뿐.
“그걸 알고 났더니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안 되겠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