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흔들리는 소어의 시선이 제 앞에 놓인 서류를 향했다.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종이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건.
“……제가 보낸 파혼장이군요.”
“맞아요. 그리고 칼릭스트의 직인이 찍히기 전까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죠.”
“저는…… 티스베가 이미 서명을 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연한 생각이었다. 소어는 이제 추방을 당한 몸이었으니까.
티스베가 굳이 더 이 약혼을 이어 나가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아마 소어는 티스베가 파혼장에 서명을 휘갈겨 내고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했어도 이해했으리라.
물론 티스베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지만.
“음, 일단 대화는 해 보고 할 생각이었죠.”
그리고 대화와 생각은 어젯밤 충분히 했다.
잠든 소어의 얼굴을 보며 티스베는 밤을 꼬박 새웠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문득 떠나기 전 알마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티스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거라. 이제는 그래도 된다.
망명이든 뭐든, 다른 사람의 눈치는 보지 말고 무엇이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했던 할아버지.
그래서 티스베는 고민 끝에 결정했다.
하고 싶은 걸 하기로.
“나랑 파혼을 하고 싶은 거죠, 소어?”
“……그렇습니다. 그리고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정식으로 황실에 중재를 요청드릴 겁니다.”
“받아 주지 않으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이건 너무 급작스럽잖아요. 나에게도 이걸 검토해 볼 만한 유예 기간이 필요해요. 한 달 정도.”
“그 한 달을, 살바토르에서 보내시겠다는 겁니까?”
“당신이 수도에 갈 이유가 없다고 했으니까요. 이 정도의 유예 요청이라면 황실에서도 내 편을 들어줄 걸요.”
소어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티스베의 요구를 가늠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한 달.’
고작 한 달만 제 욕심을 참으면 된다.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그 편이 낫지 않을까.
티스베가 원한다는데. 절대 제 마음이 흔들려서가 아니라…….
“당신도 좀 더 적응할 만한 시간이 있는 게 좋잖아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소어는 결국 유혹에 넘어갔다.
유예 기간 협상은 양쪽의 흔쾌한 동의 하에 아주 극적으로 체결되었다.
단 한 가지.
소어가 내민 조건이 하나 붙었다는 것만 빼면.
* * *
“여기가 살바토르 성입니다, 공녀님…… 아니, 테레지아 아가씨.”
“…….”
“저, 라스. 이름이 좀 헷갈리는데, 테레지아 루즈릴이 맞습니까?”
“테레지아 로즈릴이지, 밀워드.”
“각하께서 그 말을 못 들은 걸 감사히 여겨라, 너.”
“아, 그렇군요. 주의하겠습니다.”
살바토르의 세 기사가 말에서 내리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개중 가장 후미에 있는, 남색의 장발을 높게 묶은 기사의 이름은 밀워드.
그리고 선두에서 좌편을 맡고 있는, 갈색 곱슬머리의 살갑게 생긴 기사가 게일.
마지막으로 우편을 맡고 있는 것이 개중 가장 익숙한 얼굴인 라스였다.
라스 못지않게 오랜 시간 전장에서 함께 지냈다던 그들의 대화는 가족들의 대화처럼 화기애애했다.
다른 때였더라면 티스베 역시 그들의 화기애애함에 끼어 즐겁게 대화를 나누거나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가명을 쓰고 신분을 감춘 채 이들과 함께 살바토르 성에 온 것이 아니었더라면.
“테레지아 아가씨.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뇨, 괜찮아요…….”
기분이 좀 그렇다는 것만 빼면 말이죠.
게일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티스베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테레지아 로즈릴.
그것은 티스베의 사촌 동생 이름이었다.
어쩌다가 티스베가 사촌 동생 이름을 쓰게 되었느냐면, 이유는 간단했다.
소어가 요구를 받아들이며 내건 딱 하나의 조건이 바로 그것이었으므로.
“살바토르에서는 제가 파혼을 한 줄 알고 있습니다.”
“파, 파혼을 한 줄 알고 있다고요?”
“라스에게 파혼장을 작성하기 위해 살바토르의 직인을 본성에서 가져오라 했더니 그 이야기가 퍼진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파혼장을 작성한 이상은 파혼이 진행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
“아, 하긴. 살바토르에서는 당신이 나한테 언질 한마디 없이 멋대로 파혼장만 던지고 도망친 걸 몰랐겠네요.”
“…….”
“보통 파혼장 작성 전에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진행되는 게 일반적이니까, 내가 당연히 파혼장을 받아들였을 거라 생각했을 테고. 그렇죠? 하하, 누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파혼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소어는 결국 그날 하루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러한 이유로 티스베가 살바토르령에 방문했다는 걸 숨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잖아도 파혼 얘기가 살바토르에 전부 퍼졌을 겁니다. 말을 번복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소어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어차피 파혼할 사이니까.’라는 말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고 해서 알아듣지 못할 티스베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얼굴만 알고 지내는 테레지아 로즈릴의 이름을 빌려 왔다.
그 유명한 성녀인 티스베와 닮은 얼굴에 대해서는 사촌이라서 그렇다는 투로 둘러대기로 했다.
어차피 대륙에 퍼진 영상구는 복제본이라 화질이 그리 좋지 못했으니까.
티스베를 직접 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를 ‘성녀와 좀 닮은 사람’ 정도로 인식할 것이다.
‘문제는 기분이 좀 묘하단 말이지.’
가명을 쓰고,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어차피 망명을 하면 가명을 쓸 생각이기도 했고.
모두가 티스베가 바랐던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묘한 이유는 뭘까.
티스베가 의문하는 사이, 성문이 열리고 사용인들이 귀환하는 이들을 맞았다.
안쪽에는 티스베 일행보다 앞서 성에 입성했던 소어가 젊은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서들 오십시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칼데일은 어째 날이 갈수록 추워지는 거 같더라고요.”
“나 닭고기 스튜 먹고 싶어, 듀이.”
“간만에 뵙습니다, 집사님. 그간 성에는 별고가 없었습니까?”
“별고가 있겠습니까, 하하. 게일 경도 라스 경도 밀워드 경도 여전하시군요.”
큰 성의 집사치고는 퍽 홍안으로 보이는 청년, 듀이가 사람 좋게 웃으며 칼데일로 떠났던 이들을 맞아 주었다.
사실 일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칼데일에는 상시 주둔하던 군사가 이미 있었고, 거기에 추방당한 소어가 합류하는 그림이었을 뿐이니까.
무엇보다 소어가 추방을 당한 거지 살바토르가 추방을 당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떠난 일행 역시 열 명 남짓으로 조촐했던 것이다.
일행들을 맞아 주던 듀이가 티스베를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제가 모르는 분이 계시는 것 같군요?”
“아, 그게-”
“테레지아 로즈릴 영애시다.”
뒤에서 상황 보고를 받던 소어가 라스의 말을 잘랐다.
그는 티스베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기계적으로 말을 읊었다.
“황실에서 공문을 전달하러 오신 분이고, 살바토르령에 볼 일이 있다고 하시어 기사 차출 건을 확인할 겸 살바토르에서 한 달 정도 지내시기로 했다. 부족함 없이 모시도록 해라.”
“아,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손님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살바토르는 처음이실 테니 제가 소개를-”
“루즈벳!”
“예, 각하!”
소어의 부름에 루즈벳이라고 불린 하녀장이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네가 손님께 살바토르를 소개시켜 드려라. 듀이, 넌 쓸데없는 짓 말고 따라와. 기사 차출 건으로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소어가 먼저 성큼성큼 층계를 오르고, 그런 소어가 익숙한 듯 듀이가 군말 없이 그를 따라갔다.
사실 다른 사람들 역시 별로 의아해 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니, 조금 놀라워하긴 했다.
“이야, 역시 그래도 손님이 계시다고 말이 퍽 다정하시네.”
“저렇게 말을 부드럽게 하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난 살면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세 기사가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는 말을 들으며, 티스베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이렇게나 소어를 몰랐나?’
티스베에게는 소어의 모든 태도가 그저 낯설기만 했다.
저토록 차가운 말투도,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태도도.
그래서 기분이 이토록 이상한 걸까?
문득 의문이 티스베의 뇌리를 콕 찔렀지만, 정확한 답은 알 수 없었다.
루즈벳이 그녀를 부른 까닭이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지내실 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
티스베는 소어가 올라간 층계 쪽을 한 번 돌아본 뒤, 루즈벳을 따라갔다.
‘뭐, 이것도 곧 적응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티스베는 머잖아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