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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78화 (78/121)
  • 78화

    소어와 같은 공간 안에 단둘이 있었던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티스베가 소어의 저택에 불쑥 찾아갔던 날 역시 이와 비슷했다.

    그런데도 이토록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분명 같은 사람인데.’

    눈앞의 사내는 티스베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이 독배를 제 입에 부으려 한다면 저런 얼굴이 될까?

    “처음에는 손길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로써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에 못내 괴롭다고 말하는 사내는 고통스러워 보였고, 동시에 기꺼워 보였다.

    제 심장을 갈라 내보이는 사내의 낯은 사뭇 자학의 형태를 띠고 있기까지 했다.

    “저는 당신의 온정에 그렇게밖에는 보답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당신 곁에 있다 보면 분명 제 욕심이 당신을 침범하는 날이 올 겁니다.”

    “……소어.”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춘 사내의 낯은 티스베가 아꼈던 바로 그 모양대로 아름다웠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과 반듯한 뺨에 비스듬하게 깎인 그림자.

    고요를 울리는 나직하고 진중한 목소리까지도.

    ‘참 이상한 일이지.’

    소어의 고백을 듣는 것은 처음인데, 어쩐지 낯설지가 않으니 말이다.

    사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기도 헀다.

    소어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렇게 날 위해 주는데, 모르기 쉽지 않지.’

    그러나 티스베는 늘 그 사실을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아니, 최대한 외면하고 싶어했다.

    그건 그녀가 가진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그녀는 늘 사람과 거리를 두려 했고, 또 스스로의 망명을 염두하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괜히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무거운 감정이라면 차라리 모르고 싶기도 했다.

    티스베에게는 그런 걸 받아 줄 여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더는 피할 곳이 없다.

    소어는 티스베에게 말하고 있었다.

    “티스베. 우리는 예전과 같은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나와 가까이 지내길 원한다면, 내 감정 역시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여 티스베는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확실한 건 소어와 예전처럼 지내고 싶다는 것이다.

    어떤 대화를 나누어도 즐거웠던 그때처럼.

    티스베는 소어가 자신을 속인 것 정도는 용서할 수 있었다.

    그 진심마저 속인 게 아니라면.

    ‘하지만 내가 소어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을까?’

    소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단지 연인으로서의 감정이 아닐 뿐.

    지금 티스베에게 소어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손을 한 번 내밀기만 해도 소어는 제 목에 티스베의 손자국을 내고 싶어 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어의 마음을 이용하는 게 아닌가.

    티스베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자, 소어가 끝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너무 곤란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도 티스베의 침묵을 이 야릇한 기류가 흐르는 순간의 곤란함으로 알아들은 건지.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곳 침상에서 쉬시면 됩니다.”

    “소, 소어. 잠깐-”

    미련없이 걸음을 떼는 소어를 본 티스베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팔을 잡을 목적으로 뻗은 것이었으나, 문제는 너무 대중없이 손이 나간 탓에 그의 허리 부근을 가격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윽!”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가격했다고는 하나 가볍게 친 정도였는데, 소어가 맞은 곳 부근을 반사적으로 움켜쥔 것이다.

    “소어? 왜 그래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은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잠깐 봐요!”

    소어가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티스베는 강경했다.

    무엇보다, 소어가 티스베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손목에 힘줄이 올라올 정도로 제 복부를 붙잡고 있던 소어의 손은 티스베의 손이 닿자마자 얼음 녹듯 스르르 풀려났다.

    그리고 티스베는 소어의 배에 대강 감긴 붕대를 발견했다.

    그것도 꽤 새 것으로 보이는 붕대를.

    “……이거 언제 다친 거예요?”

    “……좀 됐습니다.”

    “소어. 나 이번에 믿던 누구한테 뒤통수를 맞고 다짐한 게 있어요. 뭐가 됐든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겠다. 말 한 마디 섞지 않겠다-”

    “오늘! 오늘 다친 겁니다.”

    “어제도 아니고 오늘이요? 그럼 아까 치료도 안 하고 도망간 거예요?”

    “그, 그게.”

    소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무엇보다 확실한 긍정이었다.

    결국 그는 눈을 굴리다 애써 변명했다.

    “……그래도 돌아와서 치료했습니다.”

    “이따위로 붕대를 감아놓은 게 치료라고요?”

    “저는 회복력이 좋습니다, 티스베. 이 정도 상처는 일주일도 다 가지 않아 아물 겁니다.”

    소어는 이 정도는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사실 소어에게 이 상처는 별것 아닌 상처가 맞기는 했다.

    살바토르의 혈통 덕분인지 그는 유난히 빨리 상처가 낫곤 했으니까.

    무엇보다 전장에서 지내다 보면 이 정도 상처는 예삿일인 탓에 소어는 제 몸의 상처에 관대했다.

    대충 붕대를 감아 두기만 하면 얼추 나았으니 썩 신경 쓸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예전에 그의 부하들이 종종 이렇게 대수롭지 않은 상처로 난리를 치는 경우는 있었다.

    -아니, 각하! 그 꼴을 하고 어딜 돌아다니신 겁니까!

    -약간 긁힌 거 가지고.

    -약간이요? 팔 하나가 부러졌잖습니까! 그러다 죽어요! 가서 치료받으세요!

    그러나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소 닭 보듯 하는 얼굴이 됐다.

    소어의 어마어마한 회복력을 알고 나면 ‘저 정도는 정말 긁힌 수준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탓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티스베는 소어의 말을 듣고도 표정을 펴지 못했다.

    “그래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정말 별 것 아닌 상처였다. 소어는 아프다는 생각조차 얼마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 말을 들으니 상처가 욱신거리는 까닭은 뭘까.

    “옷 벗어 봐요. 붕대 다시 매 줄게요.”

    “그, 썩 보기 좋지 못합니다. 티스베가 보실 만한 몰골이-”

    “옷 찢기 전에 빨리 벗어요.”

    “아, 네.”

    티스베의 협박에 소어가 허둥지둥 옷을 벗었다.

    그러자 얼음에 난 흠집처럼 흰 흉터가 무수한 상체가 드러났다.

    소어의 맨몸은 군살 하나 없이 잘 짜인 근육으로 빼곡이 뒤덮여 있었으나, 티스베는 그런 것 따위에 시선을 둘 겨를이 없었다.

    “……소어. 이게 다 흉터예요?”

    “여, 역시 보기가 좀 그렇지요. 다시 옷을 입겠습니다. 붕대는 괜찮, 윽!”

    찰싹.

    티스베가 맨팔을 내려치자 차진 소리와 함께 소어가 어깨를 움찔했다.

    굳이 더 말을 보태지 않아도 그것이 “괜한 소리 말고 입 닫고 있어요.”라는 뜻임을 모를 소어가 아니었다.

    그렇게 소어는 입을 닫은 채 잠자코 티스베가 제 복부에 붕대를 두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붕대를 두르는 내내 티스베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마치 제 상처를 돌보는 것처럼.

    정말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아프다고 본인이 아픈 것도 아닐 텐데.’

    천성이 상냥한 사람은 원래 그렇게 타인의 아픔에 잘 공감하게 되는 걸까?

    “내가 옆에서 지켜 줄 테니 여기서 자요. 아플 때는 옆에 사람이 있는 게 좋더라고요.”

    그 누구도 소어의 부상에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소어는 통증에도 부상에도 무딘 사람이었으니까.

    스스로조차 돌보지 않는 소어의 몸 상태를 그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어가 거절했을 것이다.

    ‘대신 아파 줄 것도 아니니 걱정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별것 아닌 손의 상처에 자신을 사흘 내리 쫄쫄 굶고 비 맞은 강아지라도 되는 것처럼 봐주다니.

    ‘내가 싫지 않으신 걸까.’

    원래 티스베가 누웠어야 할 침상에 누운 채, 소어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나친 상냥함은 독이라고.

    ‘정말로 이 마음을 놓으려 했는데.’

    자신을 저렇게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티스베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것이 너무 요원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일평생 지나치게 애정에 목말라 왔으므로.

    티스베가 건네는 이 독배를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이 상냥함이, 애정이 자신을 중독시켜 결국 티스베조차 망가지게 할 텐데도.

    ‘그러니 나는 더더욱 티스베와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티스베도 마음을 바꿨을 것이다.

    아직 얘기가 나오진 않았지만 분명 파혼장도 수리되었을 테고.

    내일 해가 밝는 대로 티스베를 돌려보내야겠다.

    ‘아마 다시 볼 일은 없겠지.’

    소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 * *

    그렇게 다음날.

    “살바토르령으로 가겠어요. 그리고, 당신도 동행해요. 난 앞으로 한 달 간 당신 옆에 있어야겠으니까.”

    소어는 어젯밤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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