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러니까…… 수도에 마물이 출현해서 기사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사면을 약속받았다는 겁니까.”
“그래요. 사실 말이 사면 약속이지, 사면이나 다름없는 얘기예요.”
두터운 모포 더미 속에, 얼굴만 빼꼼 내놓은 티스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정신 박힌 짐승이라면 절대로 밖을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칼데일의 밤.
두 사람은 사령부의 막사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티스베와 소어가 돌아온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시간을 생각하면 조금 늦은 시간대이기도 했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안 불편하니까 같이 가요.”
“신경 써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괜찮습니다. 당신께서 불편하실 테니 저는 따로 지내겠습니다.”
“내가 안 괜찮다니까!”
숲에 남겠다는 소어의 의지가 워낙 굳건한 탓에 설득하느라 애를 먹은 것이다.
무슨 고집이 그렇게 센 건지.
“소어, 당신하고 얘기하려고 왔는데 당신이 없으면 대체 무슨 소용이에요. 같이 돌아가요. 안 그러면 당장 이 눈밭에서 다섯 바퀴 구르고 확 감기 걸려 버릴 거니까.”
결국 지친 티스베가 이런 협박을 하고서야 소어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병영으로 돌아온 현재.
티스베의 설명을 들은 소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선택권이 있는 사항은 아닌 것 같군요. 어차피 총사령관으로서 칼데일에 온 것은 아니니 내일 이야기가 되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떠난다면, 살바토르로 가는 건가요?”
“예. 아시다시피 칼데일과 살바토르는 인접한 곳이니 기사를 차출하여 보내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럼 같이 가요.”
티스베가 모포 더미에서 살짝 몸을 빼며 말했다.
그녀는 칼데일에서 보낸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난 소어에 대해 생각보다 잘 몰라.’
자신이 모르는 소어의 모습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숲에서 한 차례 티격태격을 한 이후.
소어는 티스베를 아예 안아 들고 병영으로 돌아왔다.
티스베의 신발이 더 이상 젖게 둘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더 두면 동상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불편하실 것은 알지만, 제가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티스베는 그의 말마따나 신발이 젖은 상태가 맞기는 했다.
게다가 칼데일로 오는 내내 마나를 잔뜩 써 버린 탓에 더 쓸 마나가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거절하고 그냥 걷다간 소어가 또 도망칠 염려가 있기 때문에, 티스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은 편안했다.
어찌나 편안한지 깜빡 잠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마나를 너무 썼나 봐.’
마나를 많이 쓴다고 숨이 가쁠 정도는 아니지만, 대신 체력이 쑥쑥 깎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픽 쓰러져 자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티스베는 소어의 품에서 졸다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어렴풋이 잠이 깼다.
“……니까, 저분이 바로 그 약혼녀시라고?”
“나는 내가 드디어 미친 줄 알았습니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눈알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진짜.”
목소리는 총 세 개였는데, 개중에도 익숙한 게 있었다.
아마도 라스라던 그 기사의 목소리 같았다.
“난 꼼짝없이 우리 각하가 버려지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직접 오실 줄이야.”
“그동안 들려오는 얘기들이 하도 살벌했잖습니까.”
“그 뒤처리는 다 내가 했던 거 기억하냐?”
“우리가 여기서 썩는 동안 즐겁게 잘 지낸 것 같던데 뭘 그러냐.”
“게일 말이 맞습니다. 잘 즐겼잖습니까, 라스.”
두 기사의 핀잔을 받은 라스가 무언가 항변을 하려던 찰나.
“더 떠들면 세 놈 다 참형이다. 나가.”
“각하, 저도 공녀님이랑 얘기 한번 해 보고 싶은데 이따 다시 와도 됩니까?”
“아니. 티스베에게 시체를 보일 순 없으니 그만 나가라, 게일.”
한 번만 더 말하면 그대로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살벌하다 못해 송곳 같기까지 한 그 말투에 티스베는 적잖이 놀랐다.
‘소어가 저런 말투를 쓰다니.’
정말 처음 보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물론 돌이켜보자면 가끔 제 수하를 대하는 모습은 다정하기보다는 딱딱함에 가까운 모습이기는 했다.
‘하지만 딱히 볼 일은 없었지.’
소어는 늘 수하를 마차에서 기다리게 하고, 티스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걸 선호했으니까.
그리고 티스베가 본 소어는 누구에게나 말을 다정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다정은 아닌가?’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라고 하는 쪽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다정한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연이은 깨달음이 티스베의 머리를 거세게 치고 갔다.
‘이걸 왜 여태 몰랐던 걸까?’
상냥하다고 해서 무조건 다정한 건 아닌데.
소어는 티스베의 앞에서 언제나 상냥하게 얘기했지만, 척 보기에도 다정하게 대하는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단지 그 태도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기에 티스베는 자신이 보는 소어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만 것이다.
나한테 다정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정할 거라고.
‘물론 그 차이를 알았어도 놀랍긴 했겠지만…….’
하여 그 일을 겪은 뒤, 티스베는 생각했다.
바로 수도로 돌아가지 말고 조금 더 소어와 함께 지내 보자고.
‘이 사람들은 소어에 대해 잘 아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소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걸 알면 소어의 진심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어는 결국 나에게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지.’
그 모든 것이 진심이 아니었느냐는 말에 부정하고 용서를 구하기만 했을 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돌아갈 수도 없다.
“살바토르령을 들렀다가 수도로 가는 거죠? 어차피 행선지는 같으니까, 나랑 같이 가요. 마침 살바토르령에 볼일도 있었고.”
그러나.
“아뇨, 저는 수도로 가지 않을 겁니다.”
이어진 말에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모포고 뭐고, 냅다 집어던진 티스베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가, 가지 않는다고요? 왜요?”
“갈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선택할 여지가 없으니 지원군을 보내겠지만, 수도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무언가 반박하려던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면 소어의 말이 맞았다.
사실 살바토르는 중앙 정권에서도 벗어난 가문이니, 칼릭스트처럼 굳이 수도를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가주인 소어는 살바토르에 있는 게 당연할 텐데.
‘왜 당연히 소어가 수도로 갈 거라고 생각했을까.’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소어는…… 언제나 나를 따라왔으니까.’
제게 호의적이었고, 자신이 원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 했다.
사실 원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해 주기도 했고.
지나가는 말로 흘린 것까지도 기억해서 내미는 것이 소어였다.
그러니 무의식적으로, 제가 가자고 하면 소어가 좋다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깨달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그럼 나도 살바토르령으로 갈래요. 같이 가요.”
“아뇨, 그렇다면 제가 수도로 가겠습니다. 살바토르 성에서 머무실 때 부족함이 없도록 조치를 취할 테니 원하시는 만큼 머물다 가셔도 좋습니다.”
같이 가지는 않겠다는 마음을 숨길 생각도 없는 말이었다.
결국 티스베의 낯 위로 속이 상했다는 것이 고스란히 올라왔지만, 소어는 강경했다.
‘숲에서는 차마 밀어낼 수 없었지만.’
소어의 실체를 티스베가 알게 된 이상, 그들의 관계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상냥한 티스베는 자신을 예전처럼 대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제가 함께 있으면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 겁니다.”
“정말 곤란하지 않아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소어의 무기질적인 시선이 티스베를 향했다.
지척에서 파란 눈동자 위로 길어진 불 그림자가 일렁였다.
“티스베. 저는 본디 욕망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바라 본 경험이 없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으셨었죠. 제 욕심이 너무 커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곁에 있으면 너무 많은 것을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줄 수 없다.
감히 제가 가지기를 청할 수도 없다.
쉽게 꺼내어 볼 수조차 없이 커져 버린 습한 욕망이 제 살을, 그리고 당신의 주변을 좀먹으리라.
소어의 고해가 이어지는 동안 그들의 거리는 어느새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혀져 있었다.
그제야 티스베는 이 공간에 오직 둘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티스베, 저는 줄곧 당신을 원해 왔습니다.”
소어의 모든 말이 진심이라는 것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