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76화 (76/121)

76화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잔뜩 흐트러지고 상기된 낯.

어째서인지 인상을 쓰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주제에, 자신을 보는 시선에 숨기지 못하는 애정까지도…….

“……소어.”

그 자리에 그가 서 있었다.

짙은 녹빛의 숲이 높게 뜬 해를 조각내는 자리.

녹지 않는 눈과 찬 공기가 유난한 고독을 그리는 한가운데에.

소어는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여위어 보였다.

덕분에 그렇잖아도 선이 날카로웠던 눈매와 얼굴형은 더욱 첨예해져 있었다.

만약 티스베가 원래의 소어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조금은 그를 무섭다고 평가했을 만큼.

어쩌면 그것은 소어가 입고 있는 흰 갑옷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렴풋이 느껴지는 피비린내 때문일지도.

사실 당연한 일이다.

티스베가 기억하는 소어의 모습은 몸에 꼭 맞는 정장이나 예복 따위를 단정하게 입은 것이었지, 형형한 낯을 한 채 큼직한 갑옷을 끼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그다지 크다고 느껴본 적 없는 소어의 체격은 티스베의 두 배를 훌쩍 웃돌 것처럼 보였다.

고작 한 달여 남짓을 보지 않았을 뿐인데.

그사이 너무 달라진 모습에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알던 소어가 맞나?’

아니, 내가 알던 소어가 과연 있기는 한가?

소어는 여태 날 속여 왔잖아.

다른 것이라고 해서 속이지 않았을 리 없다.

거짓말을 아예 하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저 모습이 진짜 소어라면.’

자신이 알던 소어는 정말, 그저 거짓일 뿐이었다는 건가?

눈앞의 사내에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진 순간.

소어가 티스베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아.”

실수했다.

그 사실마저도 소어의 얼굴을 보고 알았다.

그 성마른 얼굴에 그나마 한줌 남아 있던 빛이 순식간에 꺼지는 게 보였으므로.

낭패감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소, 소어.”

티스베가 서둘러 해명을 위해 입을 열려는 찰나.

시선을 떨어트린 소어의 턱에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뒤이어 티스베의 어깨에 무언가 둘러졌다.

조금 전까지 소어의 어깨에 있던 망토.

“싫으실 건 알지만, 춥다고 말씀하시는 게 들려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춥다고…… 내가 말했다고요?”

조금 전 춥다고 비명을 지르며 재채기를 했던 것이 티스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걸 들었어요?”

“우연히…… 들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게 아니라…….”

제 얼굴 보는 게 두려워 도망친 사람이, 제가 춥다는 말 한마디 했다고 그걸 듣고 망토를 둘러주러 온 것이 황당해서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간 건데.

어째 말이 이어질수록 추궁하는 기분이 들어, 티스베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것이 소어에게는 티스베가 자신을 꺼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싫은 것이라고.

‘빌어먹을.’

조금 전 손을 뻗었을 때.

움찔하며 물러나는 티스베를 본 순간 소어는 제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제 꿈속에서만 존재했던 악몽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기분.

다시 만난 그의 악몽은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서, 그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

발갛게 얼어붙은 뺨과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처럼 흰 피부.

두터운 털망토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꼭 귀중한 무언가를 곱게 포장해 놓은 것만 같았다.

말하자면, 제 눈앞에 떨어진 값비싼 선물인 셈이다.

단지 제가 결코 손댈 수 없는 물건이라는 점이 그를 괴롭게 할 뿐.

‘경멸당할 건 예상했지만.’

이토록 오물을 마주한 것처럼 꺼리는 것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인데도.

‘그것이 두려워 도망쳤는데.’

춥다는 말을 듣자 도저히 숲 안쪽에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기만자로 살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소어의 어금니 안쪽에 힘이 단단히 들어가며 턱 선이 도드라졌다.

그는 주먹을 한 번 꾹 쥐었다 펴며 고개를 돌렸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티스베에게 울며 용서를 구할 것 같았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여기 계속 계시면 감기에 걸리실 겁니다.”

“소어, 잠깐만요.”

“해가 지고 나면 숲을 빠져나가기 힘듭니다. 칼데일의 해는 짧으니 지금 나가셔야 합니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향하시면 됩니다.”

“그럼 당신은요?”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가까이 있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조금 전 절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티스베.”

소어의 파란 눈동자가 티스베를 오롯이 향했다.

그 벽안에 담긴 것이 질책인지, 혹은 애원인지는 뚜렷하지 않았다.

그저 숨이 막힐 뿐.

“……미안해요.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사과를 들으려고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자신을 여태 감쪽같이 속여 온 상대가 역겨울 수 있으리라는 것 정도는.

소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그렇기 때문에 제가 거리를 좀 두려는 것뿐입니다. 그 편이 당신께도 편안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편안하지 않아요. 날 위해서 거리를 두려는 게 아니잖아요, 소어. 날 피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그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럼 내가 여길 왜 왔는데요?”

티스베의 미간이 일그러들었다.

“내가 뭐하러 이 춥고 먼 곳까지 왔는데요. 당신이랑 얘기 한 번 해 보려고 온 거란 말이에요.”

소어는 결코 모르겠지만, 티스베에게 누군가를 붙잡는다는 발상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녀는 늘 제가 잡고 있던 손을 놓는 입장이었지 떠나는 이를 붙잡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대화를 하겠다는 목적부터가 우스웠다.

대화를 한다는 건, 변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게 아닌가.

조금 전 천칭자리가 비아냥댔던 게 꼭 맞았다.

[대화는 지랄이 대화. 그냥 다시 보고 싶어서 찾는 거겠지.]

그래, 정말로 그랬다.

소어를 다시 본 순간 느껴졌다.

‘나는 그냥…….’

이 사람이 다시 보고 싶었던 거구나.

그런데 그건 나 하나만의 일이었던 걸까.

“나는, 당신이 다시 보고 싶어서…… 얘기라도 해 보려고 온 건데.”

티스베의 뺨을 타고 알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줄곧 딱딱하게 굳어 있던 소어의 얼굴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티, 티스베.”

“나한테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요? 뭐든 다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 얼마든지 기댈 수 있다고, 그랬잖아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전부 속인 거예요?”

“그, 그렇지 않습니다. 티스베.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울지 마세요.”

소어는 언제 그렇게 딱딱했냐는 듯, 예전의 그 어수룩한 청년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처음 보는 티스베의 눈물에 안절부절못하며 쩔쩔매더니, 결국 티스베의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당신이 울면 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차라리 절 때려 주세요. 죽이셔도 됩니다. 무슨 벌을 주셔도 달게 받을 테니 제발…….”

소어는 제발 자길 때리고 화를 내 달라며 애원했다.

그러나 티스베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듯 보이자, 결국 그는 눈사람을 끌어안듯 조심스럽게 티스베를 끌어안았다.

눈물이 티스베의 뺨을 더욱 얼어붙게 하고 있는 것이 보였던 까닭이었다.

‘분명 싫어하실 텐데.’

문득 걱정이 앞섰으나, 그것이 무색하게도 티스베는 소어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품을 파고들며 흐느낄 뿐.

그렇게 소어의 큰 체격이 그녀를 감싸자 티스베는 꼭 세상으로부터 감춰진 것처럼 보였다.

끌어안은 여체의 떨림이 고스란히 스며들고, 맞닿은 제 심장이 조금씩 거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고개를 젖히면 하늘을 덮을 것처럼 까마득하게 솟은 상록수들과, 그 사이로 검은 그림자를 뚝뚝 떨어트리는 하늘이 보였다.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감히 들여다볼 수 없는.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흰 땅 위에서, 소어는 우는 티스베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

조여드는 가슴과 빠르게 뛰는 심장.

발밑이 꺼질 것 같은 비참함과 다시없을 충족감까지.

모든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그를 괴롭게 했다.

다시없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