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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75화 (75/121)

75화

세상에 뭘 하든 일이 잘 풀리는 놈이 있다면.

뭘 하든 일이 안 풀리는 놈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게 나다.’

빌어먹을!

“추워!!”

에취! 가볍게 재채기를 한 티스베가 코끝을 거칠게 문질렀다.

칼데일에 온 지 약 한 시간 째.

그녀는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게 아니라, 온통 눈으로 뒤덮인 침엽수림에서 소어를 찾고 있었다.

약 한 시간 전.

전장에 나갔던 기사들이 돌아왔을 때.

“이, 이거 아무래도 도망친 거 같은데요? 저희가 나눈 얘기를 들으신 것 같습니다.”

“……진짜 일 더럽게 안 풀리네.”

이 기가 막히고도 환상적인 전개에 티스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조금 짜증이 났을 뿐 썩 답답한 기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단 여기에는 소어가 있으니까.’

사실 티스베는 그간 칼데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몇 번씩 느꼈었다.

제국 어디든 쏘다니는 그녀였으니 칼데일이라고 해서 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나.

-빈손으로 가면 분명 소어는 날 만나주지 않을 거야.

소어의 성격 상 티스베가 무턱대고 찾아가면 얼굴도 비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 있어서였다.

수도에서도 소어는 파혼장을 내민 이후 티스베가 찾아올 때마다 문을 걸어잠그고 집에 아무도 없는 척을 했으니까.

‘그래서 기습을 할 생각이었지.’

마침 공문이라는 아주 훌륭한 명분도 있겠다.

공문을 주러 왔다고 불쑥 찾아와서 눌러앉으면 제아무리 소어라도 도망치지 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있었다.

‘비록…… 들켜 버려서 기습은 실패했지만.’

어쨌든 이곳은 사방이 눈밭이고, 침엽수림 뿐인 곳.

밖으로 도망쳤다고 한들 갈 수 있는 곳도 없고 밖에서 오래 버틸 수도 없는 기후다.

그래서 티스베는 한숨을 내쉬곤 태연하게 말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돌아오겠죠. 어디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의 표정이 묘연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긴 남색 머리칼을 높게 묶은 한 기사였다.

“그…… 각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각하께서는 한 번 밖으로 나가시면 잘 돌아오지 않으십니다.”

“음,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각하니까.”

“최장 기록이 두 달이었던가?”

“두, 두 달이요?”

그게 가능해? 티스베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옆의 곱슬머리를 한 기사가 제 머리를 가볍게 헝클며 대답했다.

“저희는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가능하다는 걸 각하께서 보여 주셨으니 저게 되네 하는 거죠.”

“각하께서는 이 인근을 전부 속속들이 파악하고 계셔서 한 달쯤 밖에서 지내시는 건 일도 아니시랍니다. 난 잠깐만 나가도 춥던데. 각하는 정말 강철로 만들어진 것 같다니까.”

“오늘 전장을 정리하고 왔으니 못해도 보름 정도까지는 잠잠할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못 보신다 생각하시는 게 편할 거예요.”

기사들도 소어의 기행에 대해서는 공감해줄 수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태연한 테도에, 티스베의 입은 도무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보, 보름씩이나요?”

보름이나 여기에 더 있어야 한다고?

보름이 지나고도 소어가 안 오면 더 있어야 하고?

물론 잠깐 저택에 다녀오는 방법도 있겠지만, ‘잠깐’이라는 게 반나절이 훌쩍 넘게 걸리는 일이다.

수도에서 칼데일까지 왕복하기에는 마나 소모가 너무 극심하다.

‘무엇보다 소어가 그 사이에 주둔지를 다녀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자리를 뜬다는 건 소어를 만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다.

그 사실만으로도 입이 도저히 닫히지가 않는데.

대체 이 사람들은 뭐지?’

뭐길래 이렇게 추운 날씨에 사람이 밖에서 두 달씩이나 지낸대도 눈 한 번 깜짝을 안 하는 거지?

‘나였다면 걱정돼서 하루도 못 버텼을 텐데.’

기사들은 소어를 걱정하느니 차라리 제 목 안위를 더 걱정하겠다며 우스개를 하고 있었다.

소어와 줄곧 전장을 함께 헤쳐나온 이들일 테니 저런 말도 할 수 있겠지.

살바토르 공작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강인한지 가장 잘 아는 이들이 바로 저들일 테니.

아마 소어를 걱정했다가도 그의 초인간적인 신체 능력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걸.’

티스베라고 해서 소어가 강하다는 걸, 남들보다 더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소어도 사람이 아닌가.

혼자 있으면 외롭고 불의의 사고가 나면 위험에 처하기도 하는, 그냥 사람.

‘생각해 보면 소어는 늘 본인의 일에 무덤덤했던 것 같아.’

가끔 소어가 손에 붕대를 감고 나올 때가 있었다.

대련을 하다가 다쳤다면서.

-저는 금방 낫는 체질이라 괜찮습니다.

라고,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말이다.

전장에서 오래 구른 탓에 생긴 태도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소어만의 기행이었구나.’

소어를 굉장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칼데일에 오자 그녀가 모르는 소어의 면모가 툭툭 튀어나오고 있었다.

‘역시 오길 잘한 것 같아.’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대화를 나누어도 그저 겉돌 뿐이다.

이 기회에 소어를 제대로 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대화로 문제가 잘 해결된다면…….

‘……문제를, 잘 해결한다고?’

어떻게?

지금도 소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게 가능할까?

‘일단 해봐야 알겠지.’

솔직히 말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기분일 것 같아서 무작정 소어를 찾아온 거니까.

티스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나가서 소어를 찾아보겠어요.”

“예? 하지만 밖은 춥습니다! 공녀님, 그러지 마시고 제가-”

제가 찾아보겠다며 라스가 티스베를 만류하려는 찰나.

“라스, 방금 뭐라고? 공녀님?”

“……공녀님이라면 설마 그 칼릭스트는 아니겠지요.”

지도를 살피던 기사들의 이목이 라스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티스베에게도.

곱슬머리 기사가 눈을 끔뻑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 칼릭스트의 성녀가 은발에 금안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각하 정도 나이대의 젊은 여자라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우리 각하께서 좋아 죽는다는 그 약혼녀라는-”

“콜록.”

기습적으로 터져 나온 기침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기침을 한 사람을 향했다.

그러니까, 티스베를.

저도 모르게 ‘좋아 죽는다는 그 약혼녀’ 대목에서 평정심을 잃고 사레가 들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 제가 당신들 주인이 좋아 죽는다는 바로 그 약혼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냈다.

‘맙소사…….’

기사들의 눈이 갓 빚은 눈덩이처럼 휘둥그레져 있었다.

무슨 신화 속 인물이라도 만난 것처럼.

결국 티스베는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당장 물고기자리를 소환했다.

“저, 저는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뵈어요!”

[우와! 여기 완전 춥다! 추우면 날기 좋아!]

“고, 공녀님!”

라스가 황급히 티스베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것이 티스베가 마지막으로 본 막사 안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와 버렸으니 혼자 다시 돌아가기도 좀 그렇고.’

다시 생각해도 좀 부끄럽다.

‘좋아 죽는다는 그 약혼녀’라니.

어쩐지 조금 민망한 기분도 들고…….

[좋아 죽네, 좋아 죽어. 네 뒤통수 친 놈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실실 쪼개고 있어?]

……맞다.

얘가 있었지.

티스베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긴 천으로 눈을 가린 여자의 형체가 쉼 없이 잔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성좌. 개중에서도 천칭자리였다.

[어휴, 화상아. 그런 놈이 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가야지, 너한테 파혼하자고 한 놈이 뭐가 좋다고 여길 또 찾아와서 나한테 그놈을 찾아달라 말라 염병이야?]

보다시피 성격은 좀…… 그랬다.

묘하게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게 존재하지도 않는 욕쟁이 친구한테 등짝을 얻어맞는 기분이기도 하고…….

“소어랑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다니까. 몇 번을 말해?”

[대화는 지랄이 대화. 그냥 다시 보고 싶어서 찾는 거겠지. 내가 너 같은 계집애를 한둘 본 줄 알아? 어휴, 이래놓고 나중에 또 뒤통수 맞고 찔찔 짜려고. 어휴! 어휴어휴!]

“시끄럽고, 빨리 찾기나 해. 천리안으로 안 보여?”

[안 보이겠냐? 진작 찾았지.]

“뭐야? 근데 왜-”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던 찰나.

그녀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장난기 어린 천칭자리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 했다.

[직접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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