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사실 티스베가 감당하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긴 했다.
이번에도 어쨌든 해결을 하긴 했으니까.
자고로 말을 안 듣는 놈은 패다 보면 말을 듣게 되는 법이지.
-고, 공녀님! 그렇게 하다 애들 죽어요!
-그래서 치료도 해주잖아요?
-그, 그렇지만…….
티스베는 물병자리를 꼭 소환 시켜놓은 상태에서 마물을 팼다.
[귀찮아, 진짜…….]
치유술의 대가인 물병자리는 투덜거리면서도 티스베가 마물을 패는 족족 곧장 치료를 했다.
덕분에 마물들은 고통만 받고 몸은 멀쩡한 기이한 현상 속에 발버둥을 쳐야 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에스텔은 혼란스러워졌다.
-이, 이거 인권 유린 아닌가요?
-인권이라뇨? 그건 사람한테나 있는 거죠. 얘네는 마물인데요.
-그, 그래도.
-억울하면 인간을 했어야지. 아니면 말이라도 잘 듣던가. 잠자코 들어가 있으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 그러다 사람도 죽이겠다?
다시 마물을 후려 패기 시작한 티스베를 보며, 에스텔은 착잡함과 혼란스러움을 함께 느꼈다.
분명 티스베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것 같은데.
결과만 놓고 보자면 뭔가 잘못된 게 없다.
마물이 좀 고통을 받을 뿐 죽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물이 더 놀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물들은 장난기가 심했고, 심지어는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도덕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분명 이대로 놔둔다면 더 놀자며 덤빌 테고.
‘그럼 사람이 죽든 마물이 죽든 했겠지.’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두들겨 패서라도 마물들이 더 날뛰지 못하게 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저게 정말 옳은 방법인가?
에스텔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지만, 이미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래, 죽는 것만 아니면 됐지.’
어쩌면 에스텔도 이미 조금은…… 티스베에게 물들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티스베는 에스텔과 함께 제국 각지로 출장을 다니며 마물들을 정리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였는데도 일주일이나 걸렸다.
‘그래서 이제야 올 수 있게 됐단 말이지.’
심지어 모든 일이 얼추 정리가 된 이후 에스텔이 돌발 선언을 한 탓에 조금 지체된 것도 있었다.
티스베는 칼데일에 다녀오겠다는 얘기를 하러 킬리안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분명 킬리안 혼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의 집무실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모험을 떠나겠다고요, 에스텔?”
“네! 그래서 지원을 요청드리러 왔어요. 저 혼자서는 조금 무리라서요.”
에스텔의 손에는 모험 계획서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간혹 오지를 탐험하는 모험가들이 황실의 소속되기를 자청하여 지원금을 받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모험가들이 발견한 유적 같은 것에는 자금을 지원해 준 황제의 이름이 붙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황실 입장에서는 모험가들이 쓸 만한 미지의 땅을 발견해 준다면 개척하여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니 충분히 할 만한 투자였다.
그런데 그건 돈 한 푼 없는 모험가들의 얘기고.
“에스텔은 성녀잖아요? 여행을 떠나고 싶은 거면 신전에서도 충분히 지원해 줄 텐데.”
“들어 보니 그걸 원하는 게 아닌 것 같더군.”
“맞아요! 전 여행이 아니라 모험을 하고 싶은 거거든요.”
미지의 땅을 탐험하고, 아무도 발 들여보지 않은 곳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게 되는 순간을 만끽하는!
“최근 공녀님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깨달았어요. 세상에는 가 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고, 사람이 모르는 곳은 더더욱 많다는 걸요! 그런 곳들을 전부 방문해 보는 게 꿈이에요.”
제게 꿈이라는 게 생길 줄 몰랐는데, 전부 티스베 덕분이라며 에스텔은 눈을 빛냈다.
“무엇보다 저는 마물들과 소통할 수 있으니까, 미지의 땅을 발견하는 데에는 더없이 안성맞춤이에요. 신성력 수련도 계속 해서 이젠 제법 괜찮은 모험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에스텔은 제발 모험 계획서를 수리해 달라며 열심히 킬리안을 설득했다.
티스베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원작은 진행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도 어쨌든 비슷한 경로를 따라가는구나.
<괴물꽃>은 여주인공 성장물이자, 모험물이었다.
에스텔은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료를 모으고 성장한다.
그 과정을 통해 에스텔은 단단해지고 성숙해지며, 결국 최후에는 대륙에 드리운 재앙의 그림자와도 맞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에스텔이 모험을 떠나겠다고 하는 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내가 시원하게 원작을 깨부숴 버렸다는 것만 빼면 말이지…….’
덕분에 에스텔은 칼릭스트에 입적이 되지도 않았고, 하나뿐이었어야 할 성녀는 둘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킬리안과 에스텔 사이에 마땅히 존재했어야 할 로맨스 기류는 보이지도 않는 상황.
이만큼이나 바뀌었으니 에스텔이 모험을 떠나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바뀌지 않는 것도 존재하는 모양이지.’
엄밀히 따지자면 발생하는 사건이 바뀐 거지 사람이 바뀐 건 아니니까.
티스베는 에스텔의 손에 들린 모험 계획서를 가져가, 킬리안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안 들어줄 이유도 없는데 고민하지 말고 수리해 줘.”
“이건 신전과 상의해 봐야 할 문제다.”
“그거야 뭐,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무슨?”
“통보.”
티스베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건국제 때 신전 놈들 입 다물게 한 거 보니까 실력이 상당한 모양이던데.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리 오래 걸리는 것도 중요한 것도 아닌데 굳이 그래야 하나?”
“에스텔이 원한다면 모험의 첫 목적지까지는 데려다주고 싶어서.”
물고기자리의 이동 기술은 어디까지나 시전자가 알고 있는 장소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그래서 마물들을 찾을 때 티스베는 인근의 도시로 이동한 뒤, 직접 비행을 하며 마물을 찾아다녔었다.
그러니 티스베가 에스텔의 모험에도 큰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기껏 떠나는 모험이니까, 배웅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친구의 꿈을 응원해 주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친구라고 말할 만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킬리안을 좀 들볶자 그는 머잖아 계획서를 수리하고 지원금을 내어 주었다.
그렇게 에스텔까지도 여행 준비를 마친 다음에야 티스베는 여정길에 오를 수 있었다.
에스텔을 배웅한 이후에도 칼데일의 군사 주둔지를 찾기까지 제법 헤매야 했으니.
정말이지 험난한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리 늦지 않았다는 거지.’
공문을 사람을 통해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티스베는 일부러 본인이 하겠다고 자원했다.
소어를 만날 핑계가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힘들게 칼데일의 군사 주둔지를 찾아 왔는데.
“아, 아니, 공녀님? 공녀님 아니십니까? 내가 지금 헛것이 보이는 건가?”
도착하자마자 무슨 우연인지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헛것 아니니 진정해요. 라스, 라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네요!”
조금 사나워 보이긴 해도 퍽 서글서글한 성격처럼 보이는 기사는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주 얼이 빠진 성격은 또 아니었던지, 라스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티스베의 위로 제 로브를 둘러 주었다.
“대체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신 건진 모르겠지만, 으으. 일단 안내하겠습니다. 이런 차림으로 있으면 분명 이목을 끌 겁니다.”
티스베는 라스의 안내를 받아 사령부 막사로 왔다.
“어라……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뭐 금방 오실 겁니다.”
그리고, 소어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렇게 현재 여기.
티스베는 모포를 몸에 둘둘 감아 얼굴만 쏙 내놓은 채로 물었다.
“라스. 소어가 금방 돌아올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음, 그러게요. 이제 슬슬 돌아오실 때가 됐는데 말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죠?”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각하신데. 그럴 일은 없습니다. 아마 잠깐 다른 길로 샜다가 오는 거겠죠. 일단 밖에 나가서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막사의 천막이 걷혔다.
그리고 홍안의 기사 몇몇이 붉게 언 볼을 한 채로 들어왔다.
“라스, 여기 있었습니까?”
“옆엔…… 웬 여자?”
“어, 있어.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일단 눈 깔아라. 그런데 각하께서는?”
“각하? 아까 여기로 가시던데. 못 본 겁니까?”
“……여기로 왔다고?”
라스가 멍청하게 말을 한 번 중얼거렸다가, 느리게 고개를 뒤로 돌려 티스베와 시선을 마주쳤다.
불길함을 감지한 눈빛이 교환된 순간.
소어에 대해서라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설마…… 도망친 건가?’
하는, 아주 불길한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