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티스베에 한해서라면 욕심을 주체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니까.
욕심을 너무 부린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든 비극이 되는 법이다.
‘아니, 비극이라고 할 순 없겠지.’
티스베에게는 이 편이 더 좋은 결과일 테니까.
문득 소어는 떠나기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장부를 넘기고 감옥에 수감된 이후, 그를 취조한 것은 다름 아닌 킬리안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검은 방에 들어온 검은 머리칼의 사내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미리 말하는데, 내가 직접 온 건 너 때문이 아니다. 티스베 때문이지. 티스베에게 설명해 줄 말은 있어야 할 테니까.”
미묘하게 하대하는 말투로 바뀐 킬리안의 낯에서는 선명히 경멸과, 적의가 담겨 있었다.
동정심이라거나 그의 사정을 궁금해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일반인의 시선이겠지.
소어는 익숙하다 못해 조금은 따분하기까지 한 그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티스베는, 어떻게 됐습니까? 혐의가 풀린 겁니까?”
“그래. 그리고 칼릭스트에서 전해온 바로 말하자면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는군. 그러니 면회 올 기대는 마라.”
“안 합니다. 혹시라도 온다면 만나지 못하게 조치해 주십시오.”
“주제넘은 발언을 다 하는군. 네가 그걸 요청할 입장이 된다고 생각하나?”
“어차피 저와 티스베 사이를 떨어트려 놓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랬지. 사실 지금도 그래. 나는 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킬리안이 과거를 회상하듯 시선을 깔며 비릿하게 웃었다.
“티스베의 옆자리에 무슨 저런 반편이를 데려다 놨나 했다. 티스가 그렇게 싸고돌지만 않았어도 난 널 죽였겠지.”
킬리안의 목소리에는 어떤 악의가 없었다.
그만큼 단순한 감상인 것이다.
소어와 킬리안의 인간성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둘 모두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갖추어야 할 만한 부분이 어딘가 결여되어 있었다.
“하지만 티스는 아니야. 그 애는…… 사람을 대할 때 무척 방어적이지.”
사람에게 배신을 많이 당했으니까.
“그런데도 사람을 믿으려고 하는 게 티스베다. 거기서 그 애와 나 사이에 거리가 생기지.”
굳이 배신을 당한 적이 없더라도 킬리안은 누군가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될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티스베는 동시에 사람이 얼마나 진실될 수도 있는지를 보는 사람이었다.
배신당하고, 사람을 믿는 것이 두려워도 또다시 한번 내키는 대로 속고 마는.
그 별 것 없는 인간성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티스베는 일종의 별종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낄 수밖에 없는 무언가이고.
”그녀가 널 얼마나 신뢰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한다. 몇 번이나 내가 네 실체를 얘기해 주려 했는데 한 번도 들으려 하질 않더군.”
그리고 소어는 그 신뢰를 박살 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티스베의 믿음을.
그 점이 킬리안의 부아를 뒤집었다.
그는 알마스의 손에 붙들려 나가는 티스베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보았으니까.
“……속일 거면 끝까지 속였어야 헀다. 솔직할 자신이 없었으면 티스베가 어떻게 되든, 끝까지 티스베에게 좋은 놈이 되었어야 해.”
“후회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저와 같은 입장이 되신다면 같은 선택을 하실 겁니다.”
“아니, 나는 그러지 않을 거다. 티스를 속여 놓고 이제 와서 진실을 드러낸다면 그거야말로 기만이지.”
“그렇다면 저는 기꺼이 기만자로 살겠습니다.”
소어와 킬리안은 달랐다.
킬리안은 어떤 짓을 해서라도 티스베를 놓는다는 선택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의가 따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티스베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어는 달랐다.
무엇을 가져다 놓아도, 그 모든 가치에 티스베가 우선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녀를 위해 시작한 거짓이었으니.’
진실을 밝힘으로써 경멸과 비난을 받는다고 한들 그녀에게 피해가 가게 둘 수 없었다.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그리고 동시에 파괴적이고 어리석은 애정이다.
‘사죄하고 싶은 마음도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티스베에게 마음의 짐을 안겨 주는 행위가 되겠지.
그가 어떤 변명조차 하지 않고 형을 받아들여 최대한 빠르게 칼데일로 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티스베에게 어떤 변명을, 혹은 어떤 사과를 해야 할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어서.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그저 추하게 울며 매달릴 것 같았다.
제 손을 짓이겨도 좋으니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고.
‘……그거야말로 최악이지.’
소어는 한숨을 내쉬고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는 검을 가볍게 털어, 도로 검집에 넣었다.
“그만 돌아간다.”
“예, 각하.”
그렇게 막사로 돌아가는 내내, 소어는 최대한 티스베의 생각을 지워 내려 애썼다.
꺼낼 수 없는 마음을 곱씹어 무엇하나.
제 괴로움만 짙어질 뿐이다.
‘지금도 자꾸 환청이 들려서 괴로운데.’
이곳에 티스베가 있을 리 없건만, 자꾸만 불쑥불쑥 티스베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어, 이리 와요! 거기 서 있지 말고.
-약혼자가 있으니 이런 게 좋네요. 혼자 오기 좀 심심했는데.
-이거 먹어 봤어요? 세상에, 정말 맛있겠다…….
대강 이런 것들.
지금도 그랬다.
“여긴 정말 춥네요. 소어가 어쩐지 겨울에도 썩 추워 보이지 않더라니.”
소어의 유달리 예민한 청각은 작은 소리도 아주 잘 잡아내곤 했다.
그래서일까? 환청이 늘 이렇게 생생한 것은.
“하하, 각하께서 유난히 추위를 덜 타시죠. 저희끼리 혹시 눈사람이 아니냐고 할 정도랍니다.”
“눈사람 소어라니, 귀엽겠네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환청은 조금 더 선명했다.
이젠 제 부하인 라스와 대화를 하고 있지 않나.
‘기왕 대화를 할 거라면 나와 하는 쪽이 나은데.’
이런 상태로 미루어 보자면 조만간 환청이 아니라 헛것이 보여도 이상하지 않겠다.
소어가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런 우스개 같은 생각을 하며 사령부의 천막을 걷으려는 순간.
이어진 대화에 소어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십니다, 공녀님. 이 먼 곳까지 직접 와 주시다니요!”
“신성력을 쓰면 금방이니까요. 소어가 사면됐다는데 가만 있을 순 없잖아요.”
얼른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티스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꼭 진짜이기라도 한 것처럼.
* * *
‘칼데일이 춥다고 듣긴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추울 줄이야.
티스베는 두꺼운 털망토 위로 모포를 몇 겹씩이나 두른 채 오들오들 떨며 생각했다.
언제나 수도의 안온한 기후 속에 살아온 티스베에게 칼데일의 추위는 도저히 견딜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신성력이나 마법 중에 몸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물론 양자리가 불과 관련된 신성력이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이다.
춥다고 손에 불을 피워 뺨에 지질 수는 없는 법.
결국 티스베는 모포를 잔뜩 두르고, 난로 옆에 찰싹 붙어야 했다.
마흘론이 봤더라면 “아가씨, 그런 품위 없는 태도도 하실 줄 아셨습니까?”라며 낄낄댔을 모양새.
그러나 티스베는 이곳에 온 것이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여기에 소어가 있으니까.’
소어의 사면이 발표된 것은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다.
사실 발표라고 하기도 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까지는 비공식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소어가 증원군을 보내주면 그 대가로 사면을 약속하겠다는 공문인 거지. 이게. 말이 더럽게 복잡하네.”
“당연하지. 황제 체면이 있는데.”
킬리안이 티스베의 말에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어쨌든 황제는 황제.
그 권위를 유지하려면 귀족에게 증원을 요청할 때도 최대한 고개를 빳빳이 들어야 하는 법이다.
‘위기에 처했으니 도와달라’ 보다는 ‘도와주면 그 공을 잊지 않겠다’ 정도로.
“어쨌든 이만하면 사면이나 다름없지.”
“그래, 이 정도면 됐어. 수고했다.”
티스베는 만족스럽게 웃고는 거의 곧장 칼데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왜 ‘거의’라는 말이 붙었느냐면, 중간에 해야 할 일이 좀 많았던 까닭이다.
다른 일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술래잡기에 재미를 들려 버린 마물들을 다시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그렇게 보름을 사방팔방 뛰어다닌 끝에, 티스베는 굳게 다짐했다.
‘또 이런 짓 벌이면 내가 티스베가 아니라 킬리안이다.’
일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벌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