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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72화 (72/121)

72화

‘조금은 예상이 빗나가도 좋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예상을 그대로 적중시키는지.

티스베가 데려온 손님은 당연하지만, 에스텔이었다.

마물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유일한 사람.

“마물들은 조금 변덕스러워서…… 부탁을 잘 안 들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약간 출몰시키는 정도라면 굳이 어렵게 부탁하지 않아도 들어줄 거예요.”

“그래? 다행이네. 따로 자극해야 하나 고민했거든.”

티스베와 에스텔이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옆에 앉아 있는 킬리안의 낯빛은 실시간으로 파리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다.

티스베가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손님을 데려왔다며 에스텔을 내보였을 때, 킬리안은 진심으로 눈을 찌르고 싶었으니까.

“티스베. 내가 분명 사람이 다치는 것도 불법적인 것도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하지만 제국 법 어디를 봐도 마물을 부리면 징역을 산다는 말은 없던데.”

“그렇겠지, 마물을 부릴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엔 있는걸.”

티스베가 에스텔을 손바닥으로 가리키자, 에스텔이 방긋 웃었다.

“……일레르 영애는 이 일을 진심으로 찬성해서 여기 있는 건가?”

“그럼요. 공녀님이 하시는 일이 잘못되었을 것 같진 않아요. 뭐가 됐든 물심양면으로 돕겠어요!”

“아주 좋아, 에스텔. 아주 훌륭해.”

티스베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오직 킬리안만이 절망할 뿐이다.

“빌어먹을…….”

앞뒤 상황 없이 이 장면을 본다면 이들이 이 제국을 구할 성녀로 추앙받고 있는 유일무이한 두 사람이라고, 과연 누가 믿어주기나 할까?

이 제국은 어디로 가는가…….

절망하는 킬리안의 날렵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 그의 어깨에 티스베가 손을 얹었다.

그녀는 드물게 퍽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걱정 마, 킬리안. 네가 말한 것들은 꼭 지킬 테니까.”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는 것과,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것.

킬리안이 누차 당부한 것들이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이 다정한 위로에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바꿔 말하자면 그거 빼고 전부 하겠다는 거 아니냐?”

“하하.”

“……이 미친 여자야…….”

그렇게 킬리안의 눈물을 뒤로 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티스베의 거사일로.

* * *

그렇게 다시, 현재.

“에스텔, 거기 상태는 어때요?”

“아주 괜찮아요! 병사들이 사냥터로 조금 깊이 들어와서 애들한테 도망가라고 했어요. 다들 술래잡기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즐기고 있다니. 에스텔도 들키지 않게 조심해요.”

“제가 있으니 그건 걱정 마십쇼!”

티스베의 손에 들린 검은색 결정 너머, 씩씩한 마흘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그림자를 일부 가두어 통신을 가능하게 만든 이 결정은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할게. 마흘론, 그리고 에스텔도.”

“예, 아가씨!”

“맡겨 주세요!”

충성스럽게 말을 내뱉은 두 사람이 통신을 종료하고, 티스베는 펜던트를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그녀의 입매에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후후후.”

계획을 처음 세운 날로부터 보름.

기사를 제국 각지로 차출하여 수도를 텅텅 비게 만들겠다는 티스베의 계획은 아주 완벽하게 먹혀 들었다.

그 이름하여 술래잡기 작전!

‘이렇게 잘 먹힐 줄은 몰랐는데.’

작전의 개요는 간단했다.

마물들을 설득해서 출몰과 도망을 반복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처음 이 얘기를 했을 때 에스텔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게 될까요? 얘기는 해보겠지만, 마물들은 제멋대로에요.”

“그렇죠. 악동 같다면서요. 알고 있어요.”

<괴물꽃>에서 에스텔이 마주하는 고비들은 대개 마물이 에스텔의 말을 듣지 않아 발생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에스텔은 매번 진땀을 빼 가며 마물들과 소통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티스베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마물들의 공통점은 짓궂다는 거잖아요. 장난기가 많고. 그러니까 그 점을 이용해서, 재밌는 놀이를 제안해 보는 거 어때요?”

바로 술래잡기.

병사를 술래라고 하고, 술래로부터 잘 도망치는 놀이를!

“이게 과연 먹힐까요?”

“날 믿어요.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치고 술래잡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없어요.”

그리고 티스베의 예상은 적중했다.

지난 보름 동안 그들은 제국의 각지를 돌아다녔다.

물론 제국은 어마어마하게 넓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아무리 먼 거리도 물고기자리가 있다면 몇 시간 안에 다녀올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어째서인지 마물들은 대부분 에스텔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마물들을 설득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일 뿐이지만.

“음……. 저, 공녀님. 이 친구가 죽기 싫으면 당장 꺼지라고 하는데요?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주겠다고…….”

“그래요? 나도 그거 잘하는데. 어디 한 번 해 보라고 해 봐요.”

그리고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아주 소수의 상황들은 티스베가 해결해 주었다.

마물들이 꼭꼭 숨어 있는 곳은 대부분 인명 피해를 생각할 이유가 없는 넓고 인적 없는 장소였으니까.

-마나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그렇게 몇몇은 티스베의 새로운 기술을 온몸으로 시험해 본 뒤에야 술래잡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런 마물들은 처음에는 썩 내키지 않는 투로 임했지만, 지금은 아주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고.

‘대부분 에스텔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지.’

어찌나 호의적인지, 에스텔과 떨어지는 걸 아쉬워하는 놈들도 있었다.

오늘 황실 사냥터에서 날뛰고 있는 그 마물도 그랬다.

“성역에서 만난 친구인데, 저를 굉장히 좋아해요. 화약을 많이 먹게 해줘서 그런가 봐요.”

아마 지금쯤 마흘론의 도움을 받아 암영의 능력으로 숨어 있는 에스텔과 사냥터 곳곳을 누비고 있을 터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좀 귀찮지만,’

에스텔은 마물을 아끼니까, 괜히 다치게 둘 순 없었다.

무엇보다 에스텔 본인이 저렇게 누비고 다니는 걸 퍽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기도 했고.

‘마물이 움직이기 시작한 지 세 시간 정도 지났나.’

그렇다면 이제 황궁에도 얘기가 전부 퍼진 지 오래일 터다.

기사가 전례없이 모자란 상황이니 다들 혼란에 빠졌을 테고.

미리 말을 맞추어 둔 킬리안이 소어를 사면하라고 옆구리를 열심히 찌르고 다니겠지.

그럼 이제 티스베가 할 건 무엇이냐?

“티스베, 여기 있었느냐? 황궁에서 공문이 왔구나. 사냥터에 마물이 출몰했는데 병력이 모자란 모양이다. 성녀인 네가 도와주기를 바라는 듯하고. 물론 강요는 아니니 네가 결정하거라.”

“음…… 온 연락은 그게 전부인가요?”

“황태자 전하께서 따로 보낸 편지가 있다. 보겠느냐?”

티스베는 대답 대신 알마스에게서 편지를 받아 밀봉을 뜯었다.

킬리안 특유의 날카로운 필체로 적힌 문구가 보였다.

[새장 문을 열었다. 종달새를 데려와.]

티스베가 바라던 바로 그 문구.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었다.

“갈게요.”

모든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알리는 한 마디였다.

* * *

“여긴 언제 와도 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한 기사의 물음 물음에, 앞서가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붉고 검게 물든 설원 위에, 그가 입고 있는 흰 갑옷은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림자가 질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밟고 선 것이 제 그림자뿐인 땅.

희뿌연 입김이 금발의 사내, 소어의 입에서 느리게 흩어졌다.

“뭐든 쉽게 변하는 건 없는 법이지.”

그렇게 그는 10년 전과 같은 땅에 다시 섰다.

침엽수 우거진 설산을 향하는 시선에는 여전한 회한이 물든 채.

10년 전과 같은 사람을 속절없이 떠올리면서.

‘티스베.’

그녀를 잊겠다는 결심으로 칼데일까지 스스로를 내몰았으나, 우습게도 이곳에 오자 그리움은 더욱 간절해졌다.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만난다고 해도 그녀는 더 이상 전과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아주지 않을 텐데.

소어는 결국 티스베 앞에서 자신이 여태 쌓아 온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선택을 했다.

아니, 어쩌면 결국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적절치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티스베가 재판을 받게 될 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소어는 앞뒤 잴 겨를도 없이 곧장 은행으로 달려가 공증된 장부를 요청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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