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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71화 (71/121)
  • 71화

    ”마물이 출몰했다고 합니다!”

    “설마 또 지원 요청이냐? 이제 더는 차출할 기사도 남지 않았는데-”

    “그, 그게 아닙니다! 지원 요청이 아니라, 당장 이곳에 기사가 필요합니다!”

    병사의 외침에 빌헬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들었다.

    “뭐? 그게 무슨-”

    “황궁 옆의 사냥터! 사냥터에서 마물이 출몰했습니다!”

    덜컹!

    빌헬름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황궁 옆의 사냥터에서 마물이 출몰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수도의 중심에 마물이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심지어 사냥터는 황궁의 후원을 따라 숲으로 이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마물이 마음만 먹는다면 곧장 황궁으로 쳐들어오는 건 일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빌어먹을! 자세한 위치가 어떻게 되는 거냐!”

    “다행히 숲 한가운데입니다. 황궁과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병사를 끌어모아 견제하고 있습니다만,”

    “병사들로 될 리가 없지 않나!”

    빌헬름의 옆에 있던 부관마저도 상황의 심각성에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수도 안의 모든 황실 기사들을 보내야 합니다. 아니,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사령관님!”

    “나도 알고 있다! 경, 가서 우선은 근위대를 포함한 모든 기사를 소집해 숲으로 보내라. 신전에 연락을 취하고-”

    “타 가문에 지원을 요청해야지.”

    자리에 모인 모두가 다급한 와중, 유일하게 매끄러움을 유지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사내.

    킬리안의 것이었다.

    그는 제게 이목이 쏠리자 눈썹을 슬쩍 들어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마물이 날뛰기라도 했을 때 최전선에서 막아줄 기사가 없다면 병사들은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그리고 한 부대도 채 되지 않는 기사로 마물을 상대하겠다는 건 그냥 집단 자살 행위에 불과하지.”

    “말씀은 이해하지만 전하, 당장 기사를 차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어느 가문도 쉽사리 증원을 해 주려 들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마지막으로 떠난 부대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

    “그럼 지원을 받지 못한 곳에서 마물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쪽은 다 죽어도 된다는 건가?”

    “그, 그건…….”

    냉정히 말해 우선순위를 놓고 따지자면 당연히 황궁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자면 킬리안이 말한 것과 진배없는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낼 수 있단 말인가?

    ‘어지간한 귀족 가문들에 지원을 요청하면 분명 후폭풍이 여간하지 않을 것이다.’

    황궁에 직접적으로 닥친 위기에 손을 얹었으니 분명 적지 않은 것을 뜯어내려 하겠지.

    빌헬름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자, 킬리안이 느슨하던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려 보였다.

    “왜 고민하는지 모르겠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손을 벌려 왔던 가문이 있지 않나?”

    살바토르.

    그 이름이 나오자 자리의 공기가 차게 얼어붙었다.

    “내가 알기로 살바토르만큼 기사가 많은 가문이 없을 텐데.”

    살바토르가 무슨 가문인가.

    북쪽에 처박혀 온갖 험하다는 것만 겪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기사의 가문이 아닌가.

    다른 가문에도 물론 훌륭한 기사는 많겠지만, 가신들 대부분이 기사인 가문은 살바토르가 유일했다.

    심지어 그들의 영지가 접경지와 가까운 탓에 대부분은 언제나 실전에 투입되어도 무리가 없는 수준이고.

    그 수장인 살바토르 공작은 대대로 뛰어난 기사였던 까닭에, 살바토르의 혈통에 남들보다 우수한 무언가가 섞여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우스개로 돌 지경이었다.

    그리고 현 살바토르 공작은 개중에서도 특히 대단하다고 알려진 인물.

    살바토르는 대대로 중앙 정권에서는 벗어난 가문이었으니 손을 벌리자면 최적이다.

    문제는…….

    “……추방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살바토르 공작은.”

    “그러니 더더욱 괜찮은 상대가 아닌가? 사면의 대가로 병력을 빌려오면 보기에도 모양새가 나쁘지 않을 것 아닌가.”

    듣고 보니 그렇다.

    “아니면 빌헬름 자네는 이보다 더 좋은 방안이 있는지?”

    있을 리가.

    킬리안의 말은 이치에 부합했다.

    ‘현 상황에서는 성녀들이 돕는다고 해도 확실하게 마물을 견제할 방법이 없다.’

    에스텔은 어디까지나 간단한 의사소통만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고, 별다른 능력이 없다.

    강력한 힘을 가진 티스베는 성역에서의 일로 내상이 깊어 정양 중.

    그러니 그들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살바토르에 기사를 요청하는 것이 보다 현명했다.

    문제는, 황궁이 위기에 처했으니 부디 살바토르 공작을 사면하여 병력을 빌리자고 황제에게 읍소해야 한다는 점이지만.

    다행스럽게도 빌헬름은 이런 문제에 있어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필요할 때 머리를 잘 조아리는 놈이 군비도 넉넉히 받아 전쟁을 잘 치르는 법이었다.

    “……이견, 없습니다. 지금 당장 폐하를 뵈러 가야겠군요. 뭣들 하고 있나? 경들은 서둘러 위치로 가게!”

    “그럼 나는 신전에 지원을 요청해야겠군. 살바토르가 올 때까지 기사만으로 견제하기는 힘들 테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빌헬름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순식간에 방 안의 사람들은 각자 맡은 일을 하러 사라졌다.

    그렇게 홀로 남은 방 안.

    킬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할 만큼 했다, 티스베.”

    어쩐지 조금…….

    아니, 조금 많이 피곤한 목소리였다.

    * * *

    사건의 전말은 보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공녀님은 살바토르 공작님의 뛰어난 무력을 이용하시겠다는 거죠?”

    “그렇죠! 이해를 아주 잘하네요, 에스텔.”

    “헤헤, 공녀님께서 설명을 잘 해주신 덕분인걸요!”

    에스텔이 까르르 웃자, 티스베가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화사하게 웃으며 에스텔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쿵짝이 기가 막히게 떨어지는 이곳은 황궁.

    “아주 잘들 노는군.”

    킬리안은 자매라고 해도 믿을 만한 두 성녀를 착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끼지 못해 안달일 자리에 끼어 놓고 왜 그리 울상이냐고?

    그야 이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란 게 결국.

    “황궁을 테러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아주 신이 나셨어.”

    저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자신마저 이 미친 연합에 끼어 같은 배를 타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고.

    모든 사건의 발단은 바로 어제, 티스베가 소어를 데려오겠노라고 선언한 순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티스베를 돕겠다고 말한 순간이겠군.’

    티스베의 고상한 위협에 킬리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를 위협하던 꽃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주 소담스럽게 화병에 꽂힌 모습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어쨌든.

    돕기로 한 건 돕기로 한 거였으니 발을 뺄 수도 없다.

    “어떻게 할 생각인데? 미리 말하지만 사람이 다치는 건 안 된다.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도 안 되고.”

    “물론 사람이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를 생각도 없고.”

    “그럼 그 두 가지를 충족시키면서 살바토르 공작을 데려올 방법이 있나?”

    “물론 있지. 내가 알기로 살바토르만큼 기사가 많은 가문이 없거든?”

    “그건 나도 알고 있다만, 그래서? 살바토르에 기사가 많은 게 무슨 상관이지?”

    “왜 상관이 없어? 수도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래서 병력이 아쉬워지면 제일 먼저 생각날 게 살바토르인데.”

    티스베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킬리안의 낯빛이 하얘졌다.

    “티스베, 너 설마…… 전쟁을 하려고?”

    “발상이 뻔하네. 전쟁 나면 사람이 우르르 죽을 텐데.”

    그럼 일단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전쟁에는 기사보다 병사를 먼저 찾잖아.”

    수준 높은 무위를 가진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그냥 쪽수를 늘리기 급급한 것이다.

    “내가 노리는 건 수도에 기사가 부족해지는 일이야.”

    기사가 부족해지면 분명 제일 먼저 살바토르를 찾을 테고, 그럼 아쉬울 대로 추방도 취하할 수 있으리라.

    이론 상으로는 완벽했다.

    “그러니까 그걸, 대체 어떻게-”

    킬리안은 일순 말을 멈추었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일전, 황실 군사령관 빌헬름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병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가 부족한 기사를 어떻게 배치하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한 이야기.

    -마물을 상대할 때는 머릿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기량이 뛰어난 한둘이 전투를 좌우하죠.

    그래서 병사들만 주둔하는 곳에 마물이 나타나면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라며, 빌헬름이 불평을 토했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생각나는 이유는, 단순한 기우일까?

    킬리안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티, 티스베. 너…… 너 설마…….”

    “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난 그만 가볼게. 할아버지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내일 손님을 데려올 테니 그때 보자고.

    티스베는 산뜻하게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인 오늘.

    “그러니까, 마물을 특정 구역에 출몰시킬 수 있겠느냐는 거죠?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일단은 가능해요!”

    킬리안은 불길한 예감은 결코 빗나가지 않는다는 세상의 진리를 한 가지 깨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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