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소어의 발언 이후.
재판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무리 법봉을 두들겨도 잦아들지 않는 웅성거림이 좌중을 메웠고, 법정 안은 어수선해졌다.
밀렌 백작과 재판관들마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와중.
상황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소어를 보자마자 자리를 이탈해 법정 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 온 킬리안의 외침이었다.
“당장 중지! 재판을 중지해라! 전부 내보내!”
“저, 전하. 살바토르 공작은 어떻게 할까요?”
“……자백한 이상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 상황이 정리되면 심문을 진행할 테니 공작을 구금해 감옥으로 이송해라. 폐하께는 내가 보고하겠다.”
“알겠습니다!”
재판정을 메웠던 인파가 썰물처럼 쓸려나갔다.
그 혼란 속에서 소어는 눈을 감고 곧게 서 있을 뿐이었다.
제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그렇게 병사들의 손에 끌려 나갈 때까지도.
본인의 발언 하나로 인해 벌어진 모든 아수라장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혼자만이 초연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알마스의 손에 대중없이 이끌려 나가며.
티스베는 생각했다.
‘……정말.’
정말로 당신이 한 일이었구나.
* * *
티스베가 모든 진상을 알게 된 순간은 약 열흘 전의 일이었다.
“사, 살바토르 공작. 그입니다. 그가…… 그가 저희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연루되지만 않으면 모든 걸 눈 감아주겠다면서…….”
감옥에서 다시 만난, 현 시점에서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이교도 주교인 사이벨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은 순간.
티스베는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는 걸 경험했다.
소어의 이름이 사이벨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왜 이렇게 우스웠을까.
그날은 티스베가 망명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진상 파악을 위해 사이벨을 찾아갔던 날이었다.
원작 <괴물꽃>에서는 아무 뒷배도 없던 이교도들이 갑자기 무슨 뒷배가 생겨서 사망사고며 테러를 저지를 정도로 간이 커졌나 싶었으니까.
그런데.
“소어. 소어라고?”
부정을 할 생각보다도,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폭소를 터트린 티스베의 옆에서 마흘론이 사이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자식, 감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제, 제가 감히 누구의 앞이라고 거짓을 말씀드리겠습니까…… 진실입니다. 그자입니다…….”
사이벨은 비굴하게 눈물을 흘리며 진실을 읍소했다.
처음 감옥에서 그와 다시 재회했을 때 발악하던 태도와는 딴판이었다.
마흘론이 암영을 이용해 몇 차례 고문을 가하자 사이벨은 속절없이 뒤틀린 제 관절처럼 재깍 태도를 바꾸었다.
그렇게 뱉은 말이 이것이었다.
소어가, 그들의 뒷배였노라고.
그 명제가 입 안에서 곱씹힌 순간 웃음이 뚝 잘렸다.
웃음기 하나 없이
“……대체 언제부터?”
“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에, 에스텔 일레르가 성녀로 공표된 이후였으니까요.”
“그 이후라고? 사망 사고는 그럼 뭐지?”
“그, 그건 모릅니다. 확실한 건 그 이후에 그자가 저희와 접선해 왔다는 겁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확실합니다!”
금발에 벽안.
체격에 비해 날렵한 선과, 얇은 느낌이 드는 이목구비. 티스베에 대한 지령까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의 나열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부정할 구석을 찾고 싶어 몇 번이나 캐물었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확실해져가기만 했다.
“소어가…… 흑막이었다고.”
이 모든 것의 범인이 소어라는 사실이.
놀람과 별개로 뇌리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차가웠다.
그러나 마흘론은 도저히 평정을 찾지 못하는 듯 했다.
“말도…… 말도 안 됩니다, 아가씨.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왜 그럴 수가 없는데?”
“살바토르 공작님이, 아가씨께 얼마나…….”
“얼마나 잘했느냐고? 그건 내가 가장 잘 알지.”
그리고 배신자들은 대개 전환점을 맞이하는 그 직전까지 가장 달콤하게 행동할 줄 아는 법이다.
티스베의 냉랭한 말투에 마흘론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아가씨, 그건-”
“물론 나도 믿고 싶지 않아. 고작 이 얘기 하나 듣고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도 없고.”
티스베는 이견을 받을 생각이 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그리고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조용히 떠나려고 했더니.”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겠다.
“일을 크게 쳐야겠어.”
그렇게 티스베는 현재까지의 일을 준비했다.
사이벨에게 거짓 증언을 시키고, 그 사실을 신문사에 미리 흘려 정보가 더 잘 퍼지게 하고.
스스로를 미끼로, 아주 요란하게 함정을 판 것이다.
목표는 오직 소어.
파혼장을 내밀고 저택에 쏙 숨어버린 그 남자를 낚기 위해서다.
물론 마흘론은 이 계획에 줄곧 마음을 졸여 오기는 했다.
“하지만 아가씨, 저는 이게 잘 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잘못되면 아가씨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신분이 됩니다.”
“그럼 떠나면 되지.”
“하지만 범죄 기록이 있으면 세이즈로는 못 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난 칼릭스트잖아. 할아버지가 가만 놔둘리도 없고. 여차하면 킬리안에게 도움을 좀 받지 뭐. 걔는 나한테 빚진 게 있으니까.”
킬리안과 칼릭스트의 합작이면 티스베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대신 지위를 박탈하고 자발적 망명을 권유하는 정도로 끝내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망명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난 상관 없어.”
그냥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다.
소어가 재판장에 나타날지, 나타나지 않을지.
“소어가 그동안 날…… 정말 속이고 배신한 건지 알고 싶어.”
그걸 알기 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 * *
그렇게, 현재.
‘정말 소어였어.’
티스베는 저택으로 돌아와 멍하니 앉아 있었다.
피의자 신분에서 풀려나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이 애초에 무언가의 표정이란 걸 짓고 있는 상황이었던가?
밖에서는 언제나 얼굴을 신경 써 온 습관이 무색하게도 그 순간 티스베는 아무것도 의식할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명제만을 쉼 없이 곱씹을 뿐이다.
소어가 모든 것의 흑막이었다는 것.
‘대체 왜?’
어떻게, 보다는 왜?가 먼저 떠올랐다.
그런 것을 보면 아무래도 무의식 중에는 소어가 마냥 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던 모양인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것쯤은 지금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이 된 까닭일까.
누구에게나 착하고 친절한, 선하기 그지없는 약혼자가 사실 뒤에서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
심지어는 이교도들에게 돈을 대 주어 가면서까지 범죄를 저지르도록 종용해 왔다.
‘아마도…… 나를 위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소어가 티스베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은 진짜라는 것.
-티스베, 무엇 하느냐. 어서 나가자!
알마스의 손에 이끌려 재판정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소어의 시선이 잠깐 그녀 쪽을 향했다.
아마도 티스베라는 이름에 이끌렸던 것이리라.
‘……소어.’
정말 찰나였지만, 마주친 눈동자는 여전했다.
의심할 줄 모르는 어린 짐승의 눈망울처럼 자신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느껴지는 파란 눈동자.
소어는 티스베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대로, 티스베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진짜 범인을 찾지 못할 수밖에 없었겠지.’
티스베는 여태껏 범인이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자신을 적대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무 좋아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처음 한 가정부터가 잘못되었으니 범인을 찾는 길이 요원할 수밖에.
어쨌든 티스베는 모든 목표를 이루었다.
진범도 잡고, 상황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그런데 이 답답한 기분은 뭘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가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정말 이상했다.
도저히 울 만한 상황이 아닌데, 그런 기분도 아닌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속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어서?
소어의 배신을 알게 되어서?
그도 아니라면, 소어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 주었다는 사실이 기쁘기라도 한가?
모두 정답이 될 수 있었으나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정답이 될 수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티스베의 눈에서 알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점차 숱하게 쌓였던 감정들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속에 남은 것은 한 가지.
“……소어를 다시 만나야겠어.”
아주 단단한 결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