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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66화 (66/121)

66화

“음? 왜요?”

달그락.

에스텔의 맞은편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여자, 티스베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뱃놀이를 나온 사람답게 그녀는 얼굴을 반쯤 가리는 베일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때문에 맞은편에 앉은 에스텔이 볼 수 있는 것은 여자의 하관, 그것도 아주 여유로운 미소뿐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티스베가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문제는커녕, 아무 일 없다는 듯한 아주 우아한 모습.

챙 넓은 모자와 베일, 그리고 어깨가 파이고 긴 소매가 여유 있게 디자인 된 드레스는 티스베가 가진 특유의 귀족적이고 고상한 분위기를 한껏 살려 주었다.

머리를 모자 아래로 깔끔히 틀어 올린 덕분에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은 우아함이 돋보였고, 티스베가 특히 좋아한다는 호수의 정경과 그녀는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게다가 그녀가 끌고 나온 배는 현재는 명을 달리한 칼릭스트 공작 부인이 생전에 큰 규모의 뱃놀이를 할 때나 쓰던 것으로, 에스텔이 살면서 보았던 모든 사치의 집약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배 위에서 우아한 티파티를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세상에 이런 뱃놀이가 있다니.’

에스텔이 아는 뱃놀이는 대개 단둘만 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조각배를 타고 호수 위의 풍경을 즐기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호화 유람선 같은 것을 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러니 다른 때였더라면 에스텔 역시 이 상황을 즐기며 한껏 행복해 하고 있었겠지만…….

“그…… 이교도 말이에요. 벌써 기사까지 났던데요.”

“일부러 빨리 퍼지라고 정보를 흘려 두었으니까, 당연하죠.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기사가 날 거라는 거.”

“그, 그렇죠…….”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라서 오히려 더 심란하다는 걸 과연 공녀님이 알아주실까?

에스텔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것 같다는 결론이 나질 않았다.

“하아…….”

그러니 한숨만 나올 수밖에.

에스텔이 이걸 알게 된 건 며칠 전의 일이었다.

물론 그것 역시 에스텔의 자의는 아니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신전으로부터 세례도 받아 평화롭게 지내던 에스텔에게 불쑥 불청객이 찾아왔던 것이다.

-에스텔, 나 망명할 거예요.

라는 말과 함께.

-사실 그냥 조용히 떠나려고 했는데, 날 신경 써 준 게 고마워서 말하고 가려고요.

-저, 정말로 떠나시려고요?! 이제 아무도 공녀님을 욕하지 않는데요!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이교도들의 배후가 나로 밝혀질 테니까.

-네???

-물론 진짜로 나인 건 아니고, 그냥 그렇게 증언이 나올 거예요.

-네??? 그게 가능해요?

-물론이죠, 에스텔. 세상에 안 되는 건 없어요.

돈과 힘이 있다면.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고는 뱃놀이 약속을 잡은 뒤 왔던 것처럼 홀연히 떠났다.

물론 아주 홀연히는 아니었다. 가기 전에 그녀는 줄을 몇 시간이나 서서 먹어야 하는 가게의 프랄린을 한 상자 선물로 주고 갔으니까.

-내가 먹어 보니 맛있더라고요.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하나 샀어요.

라고 말하며, 본인도 제 몫으로 산 것 같은 한 상자를 들고 갔다.

어쨌든 프랄린은 정말 맛있었다.

에스텔은 그 귀하고 비싼 프랄린을 조금씩 아껴 먹으며, 하나를 입에 넣을 때마다 티스베의 말에 대해 떠올리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뱃놀이 약속 날이 된 오늘.

에스텔은 티스베가 했던 말의 실체를 마주하고 말았다.

문제는 여전히 티스베가 무슨 생각인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덕분에 지금 에스텔의 앞에는 지난번 티스베가 사다 준 프랄린을 비롯해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디저트들이 잔뜩 깔려 있었지만, 에스텔은 근심이 어린 나머지 개중 몇 개밖에는 먹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 깔린 수심을 눈치 챈 티스베의 입술이 다시금 휘어졌다.

“왜 그렇게 어두운 얼굴이에요? 나한테 나쁘게 흘러가는 게 아니래도. 걱정할까 봐 일부러 미리 말해 준 건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그냥, 걱정이 되어서요.”

“뭐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공녀님이 망명을 하지 않으실 줄 알았어요.”

에스텔의 말에 티스베의 입술에서 미소가 살짝 가셨다.

그러나 에스텔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망명에 간절하다기보다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게 목적인 것처럼 보이셔서요. 그래서…… 지금은 딱히 문제랄 게 없으니 계속 뵐 수 있는 걸까 싶었거든요.”

“……그렇긴 하죠.”

어쩌면 이러는 것도 도망치려는 행위일지 모르고.

티스베가 무미건조하게 덧붙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베일로 살짝 가려진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녀가 오늘 굳이 베일을 쓰고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기껏 신경 써서 뱃놀이를 준비했으니 화기애애하게 보내야 할 텐데, 어쩐지 웃음이 통 나질 않아서.

정보를 일찍 흘려 둔 덕분에 기사가 실린 신문은 오늘 새벽에야 신문 배달부의 손에 들렸다.

즉, 현 시점에서 수도 안의 대부분이 신문을 받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알마스 칼릭스트 또한 존재했다.

신문을 받아 보고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던 티스베의 할아버지.

‘이제 더는 할아버지가 날 아낀다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

아니, 사실 조금 전부터 그랬다.

알마스가 티스베를 에스텔에게 보낼 수 없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티스베는 알마스가 자신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단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외면했을 뿐.

그러나 오늘 아침.

신문을 받아본 알마스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할 때.

-걱정 마라, 티스베. 내가 어떻게든 해 보마.

티스베는 이제 정말로 그를 인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유가 뭐가 됐든 알마스는 진실로 그녀를 아끼고 있었다.

그것이 티스베는 조금 두려웠다.

‘할아버지가 날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좋을 텐데.’

혹시라도 알마스가 하나 남은 손녀딸까지 잃고 상처에 시름하게 될까 봐.

‘할아버지한테도 망명에 대해 얘기해 드려야 하나.’

생각해 보면, 티스베가 아팠던 것 때문에 내색하려 하지 않을 뿐 알마스는 티스베가 힘을 숨겨 왔다는 사실을 조금 서운해 했다.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어서 그랬겠지. 괜찮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날 좀 더 의지할 수 있게 되거든…… 큼, 큼. 한 번쯤 얘기해 준다면 좋겠구나.

그래, 그랬었다.

부모에게 사랑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일이 전부 끝난 뒤에는 설명을 해 드릴 수 있을 텐데…….

“…….”

티스베는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려 버렸다.

‘이것도 다 미련이야.’

괜한 생각하지 말자.

티스베는 상념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디저트 접시를 에스텔의 앞으로 밀었다.

“에스텔, 이것도 먹어 봐요. 무거운 얘기는 그만 하고요. 다 잘될 거예요.”

“……그렇겠죠? 공녀님은 늘 제게 잘해 주시는 것 같아요. 언제나 감사해요.”

“에스텔이 좋은 사람이라 그래요. 난 착하고…… 순한 사람한테는 무르거든요.”

“아, 살바토르 공작님 같은 분한테 말이죠?”

에스텔의 입에서 툭 튀어나간 말에, 티스베의 표정이 일순 굳어 들었다.

그제야 에스텔은 제 말이 티스베의 아픈 곳을 의도치 않게 찔렀다는 사실과 함께 한 가지를 깨달았다.

티파티에 있는 것들은 전부 고작 며칠 만에 휘리릭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티스베는 분명 이 티파티를 일주일도 더 전에 계획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상대는…….’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분명 그였으리라.

깨달음에 에스텔이 저도 모르게 말을 잃자, 잠시 굳었던 티스베의 입술이 다시 매끄럽게 호선을 그었다.

“……그렇네요. 별생각이 없었는데, 둘이 비슷하네.”

“혹시 실수였다면 죄송해요. 그, 여기는…….”

공작님을 위해 준비했던 게 아니냐고 물으려 하자, 티스베가 손을 내저었다.

“처음 의도가 뭐가 됐든 당신이랑 왔는걸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말아요.”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글쎄요.”

고요한 대답 뒤, 티스베의 낯을 가린 베일이 강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렸다.

뜻을 알 수 없는 미소가 올라온 입술이 특유의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모든 건 재판이 끝나면 알 수 있게 되겠죠.”

에스텔은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아 티스베가 권하는 음식만을 열심히 먹었다.

음식은 모두 놀랍도록 훌륭했다.

* * *

그렇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일주일 뒤.

티스베의 재판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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