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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65화 (65/121)

65화

티스베를 만나지 못하는 내내 그는 오래 갈등했다.

그러나 늘 결론은 같았다.

‘티스베를 정말로 위한다면.’

그녀의 곁에는 제가 없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것.

결국 그는 오늘 결단을 내렸다.

-보고 싶었어요, 소어.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잠깐 머리가 아찔해져서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이게 옳은 선택이다.’

소어는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살바토르의 인장이 박힌 편지는, 소어가 처음 파혼을 결심했을 때 작성한 파혼장이였다.

그는 종을 울려 제 솔정을 불렀다.

“라스, 이걸 칼릭스트로 보내라.”

“각하. ……진심이십니까?”

라스는 이 밀봉 아래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고 있었다.

파혼장을 쓸 때 옆에서 지켜본 것이 그였으므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라스는 이것이 결코 좋은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각하께서 약혼녀 분 얘기만 나오면 다른 사람이 되신다니까?

-난 진짜 놀랐다. 각하가 사랑도 할 줄 아는 분이셨구나.

-좀 안심도 되지 않냐. 각하도 사람이었던 거잖아.

라스가 그를 오래 모셔 온 다른 솔정들과 낄낄대며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이 불과 보름 전이었다.

-각하께서도 옆에 사람이 하나쯤 있으면 좋지.

-우리는 사람 아니냐?

-우린 따지자면 개지. 부하 말고, 친구나 가족 같은 거 말이야.

소어의 부하들은 대개 소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많은 전장을 돌아도 그렇게 무자비하고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은 소어가 유일했으니까.

그 사실에 든든함을 느낄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주변인을 걱정하기 마련인 법.

-각하께서는 어릴 때 가족도 잃고, 전장으로 나오기까지 하셨으니 외로우실 거 아니냐. 짝이 생길 때도 됐지.

-난 보기 좋던데. 약혼녀 두고 다른 여자한테 빠져 있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다행이야?

라스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다른 집을 보면 약혼자는 장식품이고, 다른 사람한테 홀랑 빠져서 사생아니 뭐니 치정 문제를 빚는 주인이 한둘이 아니었다.

서로를 비즈니스 파트너 정도로 대하는 것이 사이좋은 수준이니 더 말할 게 있을까.

그러니 소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약혼녀에게 푹 빠져 있는 것은 그들로서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할 일이었던 셈.

‘무엇보다 칼릭스트 공녀님도 우리 각하가 싫지 않은 눈치였고.’

라스는 티스베를 자주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몇 번으로도 그들 사이에 오가는 호감의 기류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순조롭게 결혼까지 가겠거니 싶었는데.

파혼이라니!

라스는 잘 하지 않는 물음까지 던져 가며 파혼장을 보내지 말라는 언급을 은근히 흘렸다.

그러나 소어는 강경했다.

“진심이다. 이 편이 티스베를 위하는 길이니까.”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 그러니 더는 묻지 말고, 곧 돌아갈 채비나 해라.”

수도에 있으면 계속 티스베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살바토르로 돌아가, 봄볕조차도 그대로 얼려 버릴 것 같은 추위 속에 살면 언젠가는 이 감정도 무뎌지리라.

그러면 그녀를 잊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언젠가는 티스베 없이 사는 것도 익숙해질 것이다.

‘이제 티스베도 잘 지내실 수 있겠지.’

* * *

……라고 생각한 지 불과 일주일밖에는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뭐라고 했나. 라스?”

“드.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 공녀님께서, 이교도들의 뒷배로 지목되어 재판을 하신다고-”

쾅!

라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쌓여 있던 것들이 파르르 떨렸다.

소어가 테이블을 거세게 내려치며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 티스베가 왜!”

“자세한 건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그 주교 놈이 거짓 자백을 한 모양입니다.”

“뒷배가, 티스베라고?”

“예! 그렇잖아도 이교도들이 공녀님을 공격하지 말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공통적으로 증언한 탓에 주교의 증언에 신빙성이 실린 모양입니다.”

라스가 그렇게 말하며 들고 온 신문을 내밀었다.

신문에는 라스가 말한 것들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성역 테러의 숨겨진 배후, 칼릭스트 공녀로 밝혀져…… 평판 회복을 위한 조작일 가능성 다수?]

기사에는 사이벨이 드디어 입을 열었으며, 그들의 배후로 티스베를 지목했음이 적혀 있었다.

또한 이것이 만약 진실이라면 모든 것은 티스베가 일부러 자신의 떨어진 평판을 회복하기 위해 이교도를 이용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도.

기사는 다음 주에 있을 재판에 대해 이야기하며 끝을 맺었다.

티스베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가져오지 못하는 이상, 이 증언을 뒤집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기사가 그렇게까지 자극적으로 쓰이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티스베가 테러의 배후가 맞든 아니든, 그녀가 엄청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었으니까.

게다가 에스텔이 처음 등장했을 때 신빙성 없는 추측과 날조 등으로 티스베를 물어뜯었던 가십지들이 전부 도륙이 난 탓에 더욱 눈치를 보는 것도 있었으리라.

문제는.

“이…… 빌어먹을 버러지들이…….”

그 어느 핑계를 가져다 대도 지금 소어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만.

콰직.

소어의 손아귀에서 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들었다.

증언을 한 당사자, 사이벨은 소어를 만나 본 이교도 중 유일하게 혀가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은 소어가 전부 혀를 잘라 감옥에 넣었지만 성역에서 곧장 잡혀 들어간 사이벨의 혀까지는 미처 자를 수 없었던 것이다.

‘자백하지 못하도록 손을 써 두었으니 괜찮을 줄 알았건만.’

그 갈아서 거름으로 써도 시원찮을 놈이 감히 티스베를 언급해?

이건 말도 안 된다.

‘티스베가 다시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게 생겼다니!’

수상쩍은 사망 사고 때는 증거를 워낙 잘 처리했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이야기가 나돌기는 해도 티스베에게 직접적으로 위해가 가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사이벨이 거짓 증언을 해서 재판이 열리는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심지어 이 일이 보통 일도 아니고, 성역 테러를 시도한 이교도들과 관련이 있는 일이니 더더욱!

‘티스베의 신분이라면 문제가 생겨도 사형까지 갈 일은 없겠지.’

아마 최대가 추방.

최소가 모든 지위를 박탈하고 자발적 망명을 권유하는 정도이리라.

게다가 이교도와 관련된 일이니 신전에서 비호해 줄 일도 없고.

“빌어먹을!”

욕설을 짓씹은 소어가 구긴 신문을 내던지며 인상을 썼다.

“신문이 나올 정도라면 이야기가 이미 퍼졌다는 건데, 칼릭스트는 어떻게 하고 있지?”

“신전 쪽에 협조를 구하러 공작 본인이 찾아간 모양입니다만, 아무래도 협조를 해 줄 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신전 입장에서는 이번 일에 티스베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성녀가 둘씩이나 된 데다, 성역 테러의 일에 티스베가 워낙 화려하게 활약해 버린 까닭에 입지가 난처해진 게 신전이다.

그런데 그런 티스베를 다시 끌어내릴 만한 사건이 생기다니, 오히려 신전 쪽에서 이 일을 더 기뻐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다.

그 사실을 소어 역시 모를 리 없었다.

“그렇겠지, 젠장. 그럼 티스베는 무얼 하고 계시지? 분명 적잖이 놀라셨을 텐데.”

위로가 될 만한 것을 보내라는 말을 하려다가, 소어는 말을 멈추었다.

‘……이제는 그런 걸 보낼 사이가 아니지.’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보내도 되긴 할 것이다.

파혼을 했지 그들이 절연을 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걸 보내고, 교류를 이어 나가다 보면 저도 모르게 기대하는 마음을 다시 가지게 될 것 같았다.

살바토르로 돌아가려는 이유 또한 그런 게 아니었던가.

소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주먹만 움켜쥐고 있자, 라스가 대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소어는 저도 모르게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알아본 바로 칼릭스트 공녀님께서는…… 오늘 에스텔 일레르 영애와 뱃놀이를 가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호화롭게요.

* * *

빙판이 전부 녹기에는 아직 이른 계절.

뱃놀이를 하기 딱 좋을 정도로 녹은 호수 위에 ‘나 비싸오’하고 적어 놓은 것 같은 배가 둥실 떠 있었다.

아무래도 여러 명이 타고 놀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배에 탄 사람은 오직 두 사람.

그리고 개중 한 명, 에스텔은 시종일관 불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고, 공녀님.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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