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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64화 (64/121)

64화

3년의 시간 동안 소어는 티스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

그녀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툭툭 흘러나오는 것들이 있었다.

“티스베, 우유가 들어간 건 드시지 않는다고요?”

“아, 맞아요. 유제품을 다 먹지 못하는 건 아닌데 우유만 그래요. 어릴 때 일이 좀 있었거든요.”

어릴 적 간식 시간이면 으레 마셨던 꿀을 탄 우유에 독이 들어 있었다고 티스베는 말했다.

“그때 일로 크게 충격을 받은 건 아닌데 그냥, 이상하게 그 뒤로 우유를 입에 못 대겠더라고요.”

“……그러면 충격을 받았다는 쪽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 아닙니까?”

“아니에요. 정말로, 별 생각이 없었어요. 나한테 잘 해준 하녀가 범인이었거든요.”

꼭 저 정도 되는 동생이 있다며, 볼에 보조개가 패이도록 웃던 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아마 그렇게 한 이유가 있겠죠. 뭐, 그렇다고 용서해 줄 생각도 없지만.”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으신 겁니까?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데.”

“물론 나도 그 사람이 좋다는 건 아니에요. 용서할 생각도 없고, 싫은 것도 맞는데. 그냥 이유가 있었겠거니 하는 거죠.”

그 하녀가 정말로 제 허리 정도에나 오는 어린 여자아이가 죽이고 싶고 미워서 우유에 독을 탔겠느냐며 티스베는 웃었다.

“세상에 악하기만 한 사람은 없잖아요.”

그냥, 나한테 좋은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지.

그녀는 그렇게 읊조리며 조금 쓰게 웃기도 했다.

자세히 알 수는 없어도 소어는 티스베가 가끔씩 내보이는 거리감이 그로부터 기인함을 알았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들. 배신의 순간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배신이라면 소어 역시 이골이 난 사람이었는데.

‘그렇기에 더욱…… 놀라웠지.’

세상에 악하기만한 사람은 없으니, 굳이 미워할 것도 없다니.

소어는 티스베의 말에 공감했다.

‘세상에 악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단지 제 잇속을 챙기느라 다른 걸 저버리는 사람이 있을 뿐.

악하지 않기에 도리어 역겨웠다.

처음부터 악한 인간이었더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괜찮은 본성을 지니고도 구역질 나는 판단을 내린다는 점이 그러했다.

“살려주십시오, 각하! 가족을 인질로 협박을 받아서…… 그래서 그랬습니다!”

고작 열다섯 살 난 소어의 등에 칼을 꽂으려던 수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소어 역시 가족을 아끼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은 부러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 결과가 배신이었다.

조금의 온정도 허락되지 않은 삶.

소어는 언제고 제게 칼을 겨누는 이들을 심심찮게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소어의 속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그 선택적인 인간성이 역겨웠다.

악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끔찍했다.

하여 소어는 사람을 싫어했다.

그런데 정확히 같은 이유로,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티스베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을지언정,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것을 선하다고 일컫는 거겠지.

그런 사람이 실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성녀라는 사람은 원래 이런 건가?’

의문해 보아도, 티스베 이외의 성녀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티스베의 선함이 가장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티스베는 어릴 적에도 아무 연관 없는 한 소년을 위해 성물을 잔뜩 가져다 주었으니까.

거기에 있는 게 소어가 아니었더라도, 티스베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상대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선한 사람.

누군가 제 목에 칼을 들이댄다면, 역겨워하기보다는 그 내막의 사정을 생각해 보는 사람.

가장 무르익은 봄의 가장 다정한 날씨를 가져다 만든 것 같은.

‘나의 성녀님.’

나의 티스베.

그녀의 선함이 좋았다.

그녀가 아무 연관 없는 타인에게도 쉽게 내보이는 무의식적인 온정들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그 다정함이.

소어의 입장에서는 잠깐 시선을 줄 가치도 없을 머저리에게조차 공평한 그 다정함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라면.’

조금이나마 온정을 갈구하는 것도 큰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이름도 모를 소년에게도 다정했던 당신이니, 약혼자에게 약간의 손길을 베풀어 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비록 사람을 죽이는 것 외에는 가진 재능이 없는 자신이지만.

누구를 사랑해 본 적도 사랑받아본 적도 없는 자신이지만.

‘당신이라면…….’

그 어린 날처럼 내게 온정을 베풀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내게 조금 더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

소어는 제 손을 내려다 보았다.

티스베의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맨손은, 흉터와 굳은살로 보기 흉했다.

물론 마디가 선명하고 곧게 뻗은 손이라 그 뼈대가 보기 나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일상적인 흔적을 제외하고는 크게 모난 곳 없는 킬리안의 손에 비하면 흉측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소어가 살아온 생의 흔적이기도 했다.

마지막 방패였던 선대 살바토르 공작, 어머니마저 명을 달리하자 살바토르는 장로들의 손에 떨어졌다.

당연하지만 소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시 소어는 명목 상으로만 공작일 뿐, 계승식을 제대로 치르지도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살바토르의 적통이 하나라도 더 존재했다면 난 분명 죽었겠지.’

그래서 소어는 가문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제일 먼저 칼을 들었다.

그가 계승식을 치르고 제대로 된 공작이 된다면 장로들도 어쩔 도리는 없을 테니까.

후계자가 계승식을 치르는 방법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선대 가주가 직접 계승식을 주최하여 황제의 허가를 받고 후계에 작위를 넘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사 서임을 받아 직접 황제에게 작위 계승을 받는 것.’

저것이 소어가 목표한 일이자, 어린 나이에 전장으로 간 이유였다.

그렇게 밟은 전장은 끔찍했다.

스스로가 생존할 가치가 있는지 묻게 된다는 점에서 특히나.

살바토르 영지는 북쪽이고, 살바토르가 담당하는 것 역시 북쪽의 접경지들이다.

일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곳.

그곳에서 소어가 한 일은 단순했다.

밟고 선 설원을 피로 뒤덮이게 만드는 일.

날이 추워 그 흔한 까마귀조차 없는 전장에서 전투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다.

얼마 전까지는 사람이라고 불렸을 무언가의 시체를 밟고.

빠르게 식어가는 더운 피를 뒤집어 쓴 채.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질 때면, 소어는 제 입술 새로 부옇게 뿜어져 흩어지는 입김을 보며 죽은 낯으로 같은 것을 떠올렸다.

제 기억에서 가장 찬란하였던 순간.

대가 없는 무조건적인 친절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해 준, 제게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다가와 사라졌던 소녀.

“기회가 된다면 또 보자!”

그 말이 뭐라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잊히질 않았다.

너무 꺼내 보아서 닳고 닳은 기억의 편린을 부여잡고 살았다.

‘성녀라고 했으니 어쩌면 신전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회가 될 때마다 어디가 됐든 신전엘 갔다.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냥, 또 보자고 했으니까…….’

다시 만나길 바라는 것도 죄는 아니지 않을까.

잘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티스베를 정말로 다시 만났던.

프리지아와 백합으로 꾸민 카페에 발을 들였던 날.

“살바토르 공작? 반가워요.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라고 해요.”

환히 미소 지으며 그를 돌아보는 티스베를 본 순간, 소어는 제가 그 지독한 전장에서 살아나왔음에 처음으로 감사를 느꼈다.

형용할 수 없이 기쁘고, 더할 수 없이 충만한 기분.

숨통이 트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으나, 3년 사이 욕심은 끝을 모르고 커졌다.

‘나를 사랑해주기를.’

다른 이들에게 주는 것과 같은 애정 그 이상을 주기를.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이 일상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인조된 낙원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제 곁이 편안하다면 티스베가 떠날 이유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조차 오만한 생각이었던 걸까.

-건국제 이전에 티스베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네와의 파혼을 고려하고 있다더군.

이 말을 듣는 순간, 소어는 깨달았다.

그녀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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