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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63화 (63/121)
  • 63화

    처음에 티스베는 어떻게든 그 사실을 부정해 보려 했다.

    “소어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리 없어.”

    뭔가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그 순간은 거짓말을 할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더더욱 뭔가 자신이 모르는 내막이 있었으리라.

    티스베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옆에서 킬리안이 픽 웃었다.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공작을 너무 믿는 거 아닌가?”

    “하지만 뭐하러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해?”

    “뻔하지. 자기가 몰래 이교도들을 쫓고 있었다는 걸 네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왜! 왜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 하냐고!”

    사망 사고에 대한 조사를 했다고 하면 자신이 화라도 낼까 봐?

    소어에게 면책 사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처음 티스베가 범인을 잡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그녀를 걱정했으니까.

    티스베가 걱정되어서 그랬다고 하면 그녀가 이해해 주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데 왜…….’

    결국 돌고 돌아 이 자리.

    티스베의 낯 위로 회한이 올라왔다. 지독한 염증과 함께.

    막막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는데, 옆에서 헛웃음이 들렸다.

    킬리안이었다.

    “넌 정말 그자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군, 티스베.”

    “……무슨 뜻이야.”

    “글자 그대로다. 네가 어지간히 그를 믿는 건 알았다만, 공작이 연기를 퍽 잘한 모양이군.”

    그놈은 네 생각만큼 순하지도, 착하지도 않아.

    이어진 말에 티스베가 미간을 구기며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런 얘기라면 됐어. 소어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아.”

    “그래, 넌 늘 그렇게 말하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너는 네가 아는 것들을 너무 믿어.”

    “주변에 믿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련할까.”

    “물론 그렇겠지. 넌 천재잖아.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다마는.”

    그러나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맹점이 존재한다고, 킬리안은 말했다.

    “네가 잠들어 잇는 동안, 네가 그렇게 순하다고 주장하는 살바토르 공작이 직접 이교도의 잔당을 모두 붙잡아 왔다. 그들 꼴이 어땠는지 알아?”

    사지가 전부 멀쩡히 달린 놈이 없었다고 했다.

    혀가 모두 잘린 것은 물론이고, 그 외의 부분들에서도 도저히 자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저항이 세서 진압이 거칠어졌습니다.

    그에 대해 소어는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 버렸다.

    “그런 걸 두고 탓할 생각은 없다만, 넌 그런데도 그놈이 순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소어는 전장에 익숙하잖아.”

    “그러니 더더욱 순한 것과는 거리가 멀겠지. 전장에서 살인귀라고 불렸다면서?”

    티스베는 입을 다물었다.

    킬리안의 말마따나 자신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본 소어는 정말 순함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으니까.

    킬리안은 침묵을 고수하는 티스베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티스, 난 네가 더 상처받지 않았으면 한다.”

    짧은 말이었으나 그에 담긴 의미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파혼을 그쪽에서 얘기했으니 더 붙잡지 말고 파혼하라는 거겠지.

    어쩄든 킬리안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너라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다.”

    “……고마워.”

    하여 티스베는 그들이 만난 이래 나눈 것 중 손꼽히게 다정한 말을 돌려주고, 킬리안을 등진 채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홀로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티스베가 찾아간 곳은 다름아닌.

    “아가씨?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마흘론의 카페였다.

    조디악의 숨겨진 지부이자, 동시에 티스베와 마흘론의 인연을 만들어 준 바로 그곳.

    마흘론은 조디악을 만든 이후에도 카페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싶지 않다며 카페를 꾸준히 운영해 오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밤이 깊어 문을 닫은 지 오래였음에도 마흘론이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책상에는 자질구레한 수제 장식들이 놓여 있었다.

    목화와 나뭇잎, 가지 등을 이용해 카페에 달 장식을 만들고 있었던 모양인지.

    손을 털고 서둘러 티스베를 맞으러 온 마흘론이 실실거리며 장난을 쳤다.

    “그래서 약혼자 분은 잘 만나고 오셨습니까? 얼굴 보니 무슨 일 있으셨던 것 같은데, 혹시 청혼이라도 받으신 건?”

    “아니, 파혼하자던데.”

    “어쩐지 각 잡고 부르는 게 청혼하려는 것 같기도, 아니, 잠깐만, 뭐라고요? 파혼?? 청혼이 아니라?”

    “응. 파혼.”

    두 번씩이나 티스베의 입에서 파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마흘론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떴다.

    “아, 아니, 왜, 왜요??”

    “내가 파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걸 알았대.”

    “그래도 이젠 아니잖습니까! 해명을 하셨어야죠!”

    “내 말 한 번 안 듣고 떠나 버렸는데 어떻게 해?”

    맙소사. 마흘론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바지에 한 번 닦고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에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이제 어쩌실 겁니까?”

    “그게 문제라서, 오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어.”

    그리고 결론도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원래 계획대로 할 수밖에.”

    “네? 그럼……?”

    “그래. 그렇게 데여 놓고도 여기서 살 생각을 한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지.”

    티스베가 환멸이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머리칼을 길게 쓸어넘겼다.

    더 이상 그녀의 얼굴에 킬리안의 앞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혼란은 없었다.

    단지 고요히 침체된 회한과 염세 뿐.

    ‘처음부터 그저 우스운 꿈이었던 거지.’

    언제는 티스베가 공녀라는 지위를, 성녀라는 추앙을 아쉬워했던가?

    오히려 모두 지긋지긋하게 여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남아서 살기를 바랐던 것은, 그냥.

    ‘이제는 정말 정 붙일 만한 곳이 있을까 싶어서.’

    상처 입어 제대로 매이지 못한 채 맴돌기만 했던 삶.

    철새에게조차 있는 회귀지가 티스베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소어에게라면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런 결과라면.’

    더 기대할 필요도 없었다.

    티스베는 고개를 돌려, 살바토르 저택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찬 밤바람이 머리칼과 치맛단을 쓸어 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준비해, 마흘론.”

    나는 여길 떠날 거니까.

    * * *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린 살바토르 공저의 집무실.

    중후한 분위기의 안쪽과 다르게 온갖 화사하고 푹신한 것들로 꾸며진 소파를 짚고 선 사내가 있었다.

    멀끔한 복장과 상반되게, 흠뻑 젖은 금발을 이마 위로 잔뜩 흩뜨린 채 고개를 숙인 사내가.

    흘러내린 머리칼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소파 위의 쿠션을 적셨다.

    둥근 자국이 생기는 걸 알면서도 숙여진 낯은 도로 올라올 줄을 몰랐다.

    침묵이 오래 자리한 끝에 사내, 소어는 그저 눈을 감았다.

    그조차 조금은 고통이었던 탓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제 괜찮겠지.’

    괜찮아야 했다.

    그가 되었든, 티스베가 되었든.

    그러나 머릿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약혼녀의 얼굴이 지워지질 않았다.

    자신이 파혼에 대해 처음으로 입에 담은 순간의 그 놀라고 상처받은 얼굴이.

    -……파혼을, 하겠다고요?

    일순 제 혀를 잘라 사죄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만약 목을 내놓아 사죄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칼을 꺼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티스베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성역에 폭탄이 잔뜩 심어졌을 때.

    티스베는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티스베는 자신과 소어, 그 둘의 목숨을 놓고 저울질하는 대신 도박을 택했다.

    누구라도 제 목숨이 저울 위에 놓이는 순간에는 비겁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라도 삶을 택할 텐데도.

    -사람들이 날 두고 영웅이라고 한다면서요? 성녀에서 악녀, 그 다음엔 영웅이라니 출세했네요.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그 일이 대단치 않다는 듯 가볍게 웃고 있을 뿐이다.

    -난 성녀도 영웅도 아니에요. 그런 대단한 사명감을 짊어질 만한 사람이 못 되거든요. 만약 당신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난 분명 도망갔을 거예요.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소어에게는 제 목숨 하나 더해진다는 것이 크게 다른 의미를 주지는 못했다.

    여전히 티스베는 소어를 죽게 내버려 두고 도망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 과연 그런 순간에 떠밀렸을 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티스베는 마냥 자애로운 사람은 분명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매정하고 각박한 사람 또한 아니었다.

    ‘그러니 그 자리에 내가 있었던 건 의미가 없다.’

    만약 거기에 그토록 싫어하는 킬리안이 있었더라도 티스베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달리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온정을 베풀 수 있는 사람.

    그게 티스베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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