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킬리안은 진심으로 티스베가 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네가 파혼하자고 한 게 아니라, 살바토르 공작이 그랬다고?”
“그렇다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공작이 왜? 그럴 사람이 아닌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소어가 이럴 사람이 아니잖아.”
지금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이었다.
소어는 티스베가 조금만 선을 그어도 울상으로 매달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파혼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더라면 제가 더 잘하겠다고 했으면 했지, 순순히 파혼하자고 말을 꺼낼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내가 싫어진 것도 아닌 것 같았고.’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소어의 낯에는 티스베에 대한 애정이 서려 있었다.
정말로 그는 스스로의 말대로 티스베를 위해 파혼을 결정한 것이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티스베는 고민했고, 결론을 내렸다.
역시.
“소어가 갑자기 이렇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말을 전한 놈이 내 말을 개같이 전달한 게 아니겠어?”
틀림없이 킬리안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한 거겠지!
티스베가 웃는 얼굴로 손을 위로 가볍게 까딱이자, 잠시 수그러들었던 화병 조각들이 다시 날을 세웠다.
“……일단 진정해 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까. 나는 별 말 안 했다.”
물론 킬리안은 소어에게 티스베가 파혼을 생각하고 있노라고 말하기는 했다.
심술을 부리고 싶었으니까.
그는 이 제국에서 유일하게 편집되지 않은 티스베의 영상구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이었다.
영상구는 성역에 들어간 순간부터 촬영되고 있었으므로, 쉽게 말하자면 그날의 모든 일을 본 셈이다.
티스베가 손쉽게 사람을 죽이던 것과, 그 아수라장 속에서 허무와 공허가 황무지의 모래바람처럼 난자하고 있던 그 순간순간들.
그리고 끝내 제게 달려온 소어를 발견한 순간 허물어지던 표정까지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웃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기도 했다.
그 순간의 티스베는 사무치게 슬퍼 보이는 동시에 기쁨에 겨운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마 티스베 본인조차도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걸 모르고 있을 터다.
그리고 평생 모르겠지.
‘알려 줄 생각이 없으니까.’
질투가 났다.
티스베를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그조차 모르는 표정을, 소어에게는 보여 준다는 것에.
킬리안은 줄곧 그와 티스베 사이에 소어가 끼어들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렇게 보자면, 꼭 그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든 것 같지 않나.
그래서 킬리안은 편집된 영상구만 남기고 원본 영상구는 완전히 폐기해 버렸다.
티스베에게는 “혹시라도 원본이 유출될 가능성을 남겨 둘 수 없으니까.”라고 대꾸했지만 실상은 저러한, 좀 더 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러고도 구겨진 기분이 영 풀리지 않아서 소어에게 심술을 부린 것이다.
-건국제 이전에 티스베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네와의 파혼을 고려하고 있다더군. 혹시 아나? 머잖아 티스베가 다른 사람과 약혼하겠다고 할지.
뭐, 이 정도?
애초에 저 말을 듣고 소어가 불쾌함을 표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티스베는 절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라고.
“정말 별 말 아니잖아.”
“……그렇네.”
“그렇다니까.”
티스베가 수긍하자, 킬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지? 내가 파혼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에 그렇게 실망한 걸까?”
“나야말로 묻고 싶군.”
그렇게 티스베가 없으면 당장 죽을 것처럼 굴어 놓고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킬리안의 시선이 손톱을 잘근대는 티스베를 향했다.
‘기분이 이상하군.’
소어와 티스베가 헤어지는 것은 잘된 일인데, 저렇게 동요하는 티스베를 보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빌어먹을 영상구만 안 봤어도, 티스베가 소어를 본 순간의 표정만 보지 않았어도 이렇진 않았을 텐데.
가볍게 한숨을 내쉰 킬리안이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파혼할 생각이었다면서? 티스베. 이렇게 된 거 파혼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랬지.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왜? 살바토르 공작을 사랑하게 되기라도 했나?”
킬리안의 물음에 티스베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거기서 티스베의 말문이 막혔다.
부정을 했으니 뭐라도 뱉어야 하는데, 말이 도저히 나오질 않았던 것이다.
소어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럼 나는 왜 이렇게 동요하는 거지?’
말마따나 소어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인 것도 아닌데…….
“……그냥, 이상하잖아.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하니까. 걱정이 돼. 소어한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뭐, 네가 그렇다면.”
티스베는 평소와 달리 시선을 피하며 말하고 있었지만, 킬리안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는 티스베를 잘 알았다.
그녀가 사람에게 데인 것이 많음에도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고, 동시에 그 사실을 썩 인정하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냥 나처럼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 될 일인데.’
언뜻 비슷해 보이는 티스베와 킬리안의 차이는 거기서부터 비롯되었다.
킬리안은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었고, 티스베는 늘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
과거에는 킬리안에게. 그리고 지금은 소어에게.
그리고 이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킬리안은 막연히 티스베의 애정이 제게 예전만큼 돌아오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얘기 좀 더 해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쨌든 네가 원흉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 변화가 있었다면 네가 알겠지.”
“내가 정말 억울하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추론이긴 하다만…….”
킬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곤, 이어 말했다.
“애초에 살바토르 공작과 만난 건 그때 한 번뿐이다. 어쨌든 멋대로 성역에 발을 들인 건 사실이니 경위서를 작성해야 해서.”
소어가 어떻게 이교도들의 테러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망 사고에 관련해 티스베에게 얽힌 추문을 해결하고자 해당 사고들을 조사해 보고 있었는데. 그 사고들이 이교도들의 소행이라서,
-테러의 꼬리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예.
-대단한 우연이군. 우연이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테러 이후 밝혀진 이교도들의 범죄는 단순히 성역에 대한 테러 하나뿐이 아니었다.
티스베가 범인이었을 거라고 추정되었던 모든 사망 사고들이 사실 이교도들의 소행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이교도의 소행이라는 게 밝혀졌다고 수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교도들의 하찮은 세력으로 이만한 짓을 저지를 수 없다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알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하여 그 뒷배가 누구인지 찾는 수사가 한창인 상태.
-티스베가 궁지에 몰렸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 물밑으로 이런 걸 쫓고 있었을 줄이야.
킬리안은 진심으로 조금 감탄했다.
심술이 난 이유에 그 탓도 조금은 있었으니까.
“살바토르 공작이 아니었더라면 테러도 막지 못했을 거다. 내게 그 사실을 알려 줬던 게 살바토르 공작이니까.”
킬리안은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며 말을 맺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티스베의 표정이 어딘가 묘했다.
킬리안이 말한 것 중 그녀가 알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른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이교도들이 테러를 하려는 걸 알게 된 게 소어 때문이었다고? 내가 전언을 보내서 알게 된 게 아니었어?”
“그래. 네가 보낸 건 그 뒤에 도착했어.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문제는 아닌데…….”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입술에 손을 올렸다.
마치 튀어 나가려는 말을 주워 담으려는 사람처럼.
“……소어는, 네게 이야기를 듣고 성역으로 왔다고 했어.”
사소한,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균열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 * *
소어가 거짓말을 했다.
‘왜?’
아무리 생각해도, 티스베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너무 급한 상황이라 말이 꼬이기라도 했나?
아니면 굳이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느 것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너무 그 생각만 했더니 머리가 아파서, 이제는 그냥 그 사실을 묻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사실 소어가 한 건 정말 사소한 거짓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걸 어떻게 넘겨?’
세상에 거짓말을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티스베의 믿음이었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거짓말은 쌓이고 쌓여 기필코 상대를 가장 아프게 속이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그게…….’
파혼이라는 결과였던 걸까?
이번에도 나는 소금 성을 쌓고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