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61화 (61/121)
  • 61화

    티스베의 말에 소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조금 전 연한 홍조를 띄웠던 것과는 다르게 새빨갛게 붉어진 낯이 더없이 순진한 소년의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티스베는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당황해요? 안아 준 게 처음도 아닌데.”

    “보, 보고 싶다는 말은…… 처음 해 주셨습니다.”

    “아, 정말요?”

    하긴, 그동안은 소어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으니까.

    같이 있으면 편하고 좋기는 하지만 굳이 가깝게 여기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은 망명할 생각뿐이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선을 그었던 것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뭐, 과거의 일이고.

    “앞으로 자주 해 줄게요.”

    티스베가 웃으며 말하자, 소어가 조금 벅찬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수줍음이라도 타는 것 같은 모습에 티스베는 다시 한 번 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날씨는 다른 때보다 차가웠지만 그들의 만남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순서는 평소와 비슷했다.

    카페에서 만나 차를 마시고 극장에서 함께 극을 관람하고, 이후에는 근사한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여느 커플이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하기까지 한 순서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두 사람이 상류 귀족인 데다 티스베가 워낙 유명인사가 되어 버린 탓에 조금 모습을 숨기고 다녀야 한다는 점 정도.

    모습을 숨기는 방법은 단순했다.

    카페는 그 시간대를 통째로 빌리고, 극장에서는 상층의 일등급 박스석을 전부 사들여 주변을 텅텅 비워 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 식당은, 티스베조차도 조금 놀랄 만한 곳이었다.

    “소어, 설마 여길 통째로 빌린 거예요?”

    “예. 티스베도 알고 계신 곳입니까?”

    “그럼요! 황궁 주방에서 수석으로 일하던 요리사가 차린 곳이잖아요!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예약이라도 하면 반년은 기다려야 한다던데!”

    “그렇습니까? 이번에는 운이 좋게 식당 주인과 연이 닿아 빌릴 수 있었습니다. 티스베 마음에 드신다면 다행입니다.”

    소어의 말로는 그 요리사의 부인이 살바토르의 방계 출신이라고 했다.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 식당을 통째로 빌릴 수 있었겠어?’

    지체 높은 귀족들이 거금을 주어도 예약 순서를 바꿔 주지 않는다고 유명한 식당이었는데 말이다.

    티스베는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그들은 오붓하게 식사를 했다.

    당연하지만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대화는 늘 정다웠으니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티스베가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유자 셔벗을 한 입 떠 넣었을 때였다.

    “티스베,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뭐든 물어봐요!”

    “저와 파혼할 계획이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팅, 팅, 팅그르르…….

    티스베의 손에서 티스푼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소어의 입에서 ‘파혼’이라는 두 글자가 나온 순간 굳어 버린 티스베와, 그런 티스베를 은은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는 소어.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티스푼과 그들 사이의 정적까지.

    티스베의 완벽했던 데이트가 와르르 무너진 순간이었다.

    * * *

    티스베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소어, 넌 무슨 그런 얘기를 데이트 잘 즐기고 후식 먹을 때 하니……?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여유를 발휘할 수 없었다.

    후식이고 나발이고 방금 삼킨 유자 셔벗이 단단히 얹힐 것만 같았으니까.

    게다가 너무 놀라 버린 탓에, 아니라고 부정할 타이밍도 놓쳐 버렸다.

    “어, 어디서 그 말을 들은 거예요?”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건국제 전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우연히라고 해봤자 소어가 그걸 들을 만한 곳은 한 명밖에 없다.

    ‘킬리안 이 XXX XXXX XX가…….’

    티스베는 진심으로, 그리고 굉장히 드물게 살인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킬리안을 죽이는 게 아니라 소어에게 상황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런 얘기를 듣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소어. 내가 설명할 수 있어요. 전부-”

    “아뇨, 설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소어는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그러나 조금은 쓰게 미소 지었다.

    “티스베가 절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아마 절 위해 그렇게 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은 제가 저택에서의 일로 당신께 부담을 드렸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건 그저,”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 파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진 소어의 말에, 허둥지둥하던 티스베의 몸짓이 우뚝 멈추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파혼을, 하겠다고요?”

    “예. 애초에 원하셔서 한 약혼도 아니지 않습니까. 칼릭스트와 살바토르는 굳이 서로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티스베의 문제도 해결이 되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소어. 나는-”

    “무엇보다 티스베가 파혼을 원하고 계셨다면 그렇게 해 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티스베라면 분명 더 좋은 혼처를 만나시겠죠.”

    오늘 자리는 그간 만났던 시간이 길었으니 예의를 차리기 위함이었다며, 내일 파혼장을 보내겠노라고 말하고 소어는 떠났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라는 일방적인 말로, 티스베에게서 어떤 대답조차 듣지 않고서.

    그렇게 순식간에 모두 끝나 버렸다.

    ‘난…… 빌어먹을 시작도 안 해 봤는데…….’

    털썩.

    티스베는 자리에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았다.

    가슴이 헛헛해서,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가슴 안쪽이 시렸다.

    ‘이번에야말로 함께해도 좋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남겨져 버렸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남겨짐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이번만큼은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티스베가 파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소어가 떠난 거니까.

    ‘실망한 걸까?’

    내가 뒤로 파혼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때문에?

    “…….”

    티스베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말 한마디 들어보지 않고 떠난 소어에게 매정하다며 화를 내거나.

    그러나 티스베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후회와는 거리가 멀었고, 남을 탓하는 쪽은 더더욱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알레샤. 카우스. 델타.”

    [응! 나 불렀어?]

    [다시 보는군요, 필멸자여.]

    [흠, 이곳은 내 품격에 조금이나마 맞는 공간이로군.]

    순식간에 나타난 성좌들이 한마디씩 말을 보태고, 어느새 티스베의 몸에는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당장 황궁으로, 아니, 그 개 같은 킬리안 자식한테 간다. 물고기가 길을 놓고, 염소가 끌어. 궁수는 호위해. 황궁은 경비가 삼엄하니까.”

    일단 이 사달을 낸 원흉부터 족치고 시작한다.

    * * *

    그렇게, 다시 현재.

    킬리안은 때 아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것도 본인이 열심히 비호한 소꿉친구에게.

    킬리안은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겸허하게 입을 열었다.

    “……티스. 일단 그것부터 내려놓고-”

    “닥쳐.”

    피슉!

    킬리안의 옆을 스쳐간 화병 조각이 벽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킬리안의 뺨에는 얇은 상흔을 남겼다.

    그는 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끈한 감각을 느끼며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너 아직 내상이 있지 않던가?”

    “내상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가 참게 생겼어!”

    티스베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마나가 담긴 목소리가 방 안을 우렁우렁 울렸다.

    “파혼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지! 네가 뭔데 그걸 소어한테 말해!”

    “내가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잖아.”

    “누가 없는 소리를 했대? 있는 소리를 처 나불댔으니까 내가 이러는 거지!”

    티스베의 눈썹 끝이 다시 치켜올라가자, 그녀의 주위에 있던 깨진 화병 조각들이 하나씩 공중으로 떠올라 킬리안을 겨누기 시작했다.

    황궁의 소장품이니 만큼 상당히 비싼 물건일 게 분명한 저 화병은, 조금 전 티스베가 불쑥 킬리안의 집무실로 쳐들어오자마자 깨트린 물건이었다.

    -어? 티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무슨 일은 무슨 일. 너 소어한테 파혼 얘기했다며.

    -어?

    와장창!

    -넌 죽었어, 이 개자식아.

    ……라는 말과 함께 화병은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현재는 티스베의 훌륭한 무기로 변모한 상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널 비호해 줬는데…….’

    킬리안은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억울해졌다.

    “살바토르 공작, 그렇게 안 봤는데 어이가 없군. 내가 몇 마디 좀 했다고 쪼르르 가서 일러바친 건가? 치졸하기는.”

    “치졸한 건 너겠지. 소어는 별 말 안 했어! 대체 뭐라고 했기에 소어가 파혼하자고 하는 건데?”

    티스베가 외친 말에, 킬리안의 표정이 묘연해졌다.

    마치 귀를 의심하기라도 하듯.

    “……살바토르 공작이, 네게 파혼하자고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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