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에스텔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거무스름한 늑대와 곰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마물의 머리에 올라 앉아 있었다.
그워엉!
에스텔의 지시에 마물은 기쁨의 포효를 하더니, 그 덩치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달려들어 폭탄을 전부 먹어 치웠다.
심지어는 기폭 장치마저.
깜짝 놀란 에스텔이 마물에게 물었다.
“그, 그건 화약이 아니잖아. 그것도 먹어도 되는 거야?”
그룽그룽.
마물은 문제없다는 듯 앞발을 들어 제 뺨을 북북 긁었다.
쇳덩이를 삼켰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한 태도였다.
그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마물의 뱃속에서 쿠르릉거리며 요동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쾅!
폭발음이 인 것이다.
단지 마물이 조금 속이 안 좋은가, 싶은 정도의 크기로.
“……얘 안에서 폭탄이 터졌나 본데요?”
“……기폭 장치까지 삼켰으니까.”
소어마저 조금 황당해서 얼떨떨하게 대답할 정도였다.
저 기폭장치가 마물의 배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분명 이 산 전체를 뒤흔들 굉음이 일었을 텐데, 이건 그냥 지독한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의 방귀소리 정도가 아닌가.
심지어 마물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에스텔은 그 사실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머잖아 곳곳에서 킬리안이 이끌고 온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황태자 전하! 저쪽에 성화대입니다!”
“폭탄, 폭탄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 사제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쓰러진 이들은 전부 체포해! 묶인 이들은 풀어주고, 신원을 확인해라!”
“예, 전하!”
그렇게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교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투옥되었다.
에스텔이 깔끔하게 마무리해 준 덕분에 피해는 전무.
게다가,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티스베가 품에 숨겨 온 영상구가 발견되기까지 했다.
“하여간 철두철미하다니까. 좋은 게 생겼군. 이건 내가 처리하지. 어차피 수습할 일도 많으니까.”
킬리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고, 머잖아 킬리안이 적절히 편집한 영상구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만약 영상구가 편집 없이 공개되었더라면 분명 티스베의 인성 논란이 불거졌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영상구를 편집한 사람은 그녀의 성질머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킬리안이었다.
티스베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 부분들을 잘라내고 세상에 공개된 영상구에는 티스베의 멋진 활약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가서 모두에게 알려요. 성역의 모두를 대피시키려면 서둘러야 해요.
특히나, 에스텔을 성역 아래로 내려 보내며 모든 희생을 짊어지려 하는 부분에서 사람들은 환호했다.
“정말 대단한 용기가 아닌가요? 저는 그 부분에서 눈물을 흘렸어요!”
“본인도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 하시다니!”
“저분이야말로 진정한 성녀가 아니라면 누가 성녀라는 이름을 쓸 수 있겠어요!”
신성력과 마법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티스베가 막강한 신성력으로 이교도들을 무찌르고 테러를 막은 것처럼 보였다.
고귀한 희생정신에, 강대한 신성력, 그리고 칼릭스트의 이름을 단 신탁까지.
“공녀님이 성녀가 아닐 리 없어!”
“그럼 일레르 영애는? 마물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 대단하잖아!”
“신전이 신탁을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도 있지! 이번에도 말을 바꿨는데, 또 잘못 해석하지 않았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나?”
혼란스러워진 사람들은 신전으로 몰려가 확인을 요구했고, 칼릭스트 역시 신전을 압박했다.
그렇잖아도 성역에서의 문제로 난감했던 신전은 머리를 맞댄 끝에 결국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신탁의 아이가 한 명이라는 말은 없었으니, 조건에 부합하는 이라면 모두 신탁의 아이가 될 자격이 있다.]
라는, 아주 애매한 대답을.
“그럼 공녀님도 신탁의 아이가 맞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난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공녀님은 어릴 때부터 천재로 유명했잖아!”
“하긴, 무척 남다르셨지. 그런 분이 신탁의 아이가 아니라는 게 더 이상해.”
“이제야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 같구먼.”
“난 처음부터 공녀님 편이었다고.”
사람들은 티스베를 악녀로 몰아갔던 것은 새카맣게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티스베의 과거 행적까지 끄집어내 어떻게든 욕할 구실을 만들어 내던 것은 아예 없던 일이 되어 버린 듯 했다.
가십지들은 매일같이 티스베의 대단한 신성력과 그녀가 그 사실을 여태 숨겨 온 이유가 무엇일지 추측하기 바빴고, 사교계에서는 티스베의 용기를 높이 사사한다며 갖은 칭송의 말을 뱉어 냈다.
그렇게 건국제로부터 보름.
정말 모든 건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구설수의 주인공, 티스베에게는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 * *
현 시각, 제국 최고의 인기인이 되어 버린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의 방.
“다 망했어.”
제국 최고의 인기인은 영혼까지 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 망했다고, 마흘론. 다 망했어…….”
“거 참. 잘됐구만 뭘 그러십니까? 우는 소리 그만 하고 사과나 드세요.”
우는 소리를 하는 티스베의 입에 토끼 모양의 사과가 쏙 들어왔다.
눈물 나게도, 사과는 맛있었다.
가열차게 사과를 씹는 티스베의 옆에서 마흘론이 또 다른 토끼 사과를 깎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가씨야 어떨지 몰라도, 저는 지금이 아주 좋습니다. 거리에 나가면 다 아가씨를 칭송하고 있다고요! 솔직히 아가씨가 아니면 그 테러를 어떻게 막았겠습니까? 에스텔 일레르까지 다 같이 날려 버렸겠지.”
“그건 맞지. 내가 아니면 그걸 어떻게 막아?”
“그럼요, 그럼요. 비록 앞뒤 안 가리고 무식하게 힘을 써 댄 것도 모자라 죽을 때까지 마나를 끌어모은 덕분에 보름째 병석 신세를 못 면하고 계시지만, 에스텔 일레르가 아니었더라면 다 같이 죽은 목숨이었겠지만, 그래 놓고 진범은 찾지도 못했지만! 이 마흘론은 아가씨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냥 욕을 해라, 욕을.”
티스베가 또 다른 사과를 집어 아삭 베어 물며 눈을 흘겼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건국제가 지나고 일주일 째.
티스베는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건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땐 정말 놀랐지.’
체감 상으로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사흘을 누워 있었다고 한다.
마나를 너무 사용해 버려서 내상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고.
그 바람에 몇 번씩이나 사경을 헤맸다고도 했다.
“어휴, 아가씨. 저는 살면서 그런 광경은 처음 봤습니다. 칼릭스트 공작님이랑, 살바토르 공작, 황태자까지 한꺼번에 대사제 멱살을 잡았다니까요?”
마흘론은 그때를 반추하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멱살을 잡았다는 건 과장이겠지.’
하지만 일단 세 사람이 나란히 티스베를 살리라고 신전을 협박했다는 건 잘 알겠다.
“특히 칼릭스트 공작님이 대단하셨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분인 줄 몰랐는데, 어우…… 손녀딸 사랑이 대단하시던데요.”
“……할아버지가?”
“그렇다니까요! 그렇잖아도 신전 놈들이 아가씨를 오죽 팔아넘겼습니까? 그걸로 쌓인 게 이만저만이 아니셨던 모양이에요. 공작님을 독대하고 나온 추기경 목에 붉은 선이 하나 그어져 있지 뭡니까.”
물론 그것 또한 과장일 것이다.
마흘론은 티스베와 그녀의 할아버지, 알마스 사이 데면데면한 관계 때문에 곧잘 알마스의 행동을 과장해서 말하곤 했으니까.
“알겠는데, 마흘론. 너 거짓말 좀 하지 마. 저번에는 뭐? 할아버지가 살롱 하나를 탈탈 털었다더니. 말이 돼 그게?”
“아, 아니. 진짠데…….”
“상식적으로, 살롱 하나를 다 털었다는데 나한테는 왜 옷이 한 세트밖에 안 와?”
“그건…… 저도 모르죠.”
“어휴, 허풍쟁이. 누가 들으면 할아버지가 내가 쓰러졌다고 신전을 다 태워 버리겠다고 한 줄 알겠네. 왜? 킬리안 멱살도 잡았다고 하지.”
“……맞는데…….”
“됐다, 됐어.”
당시 마흘론은 무척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티스베에게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아무튼 진실이야 어찌 되었든.
사제들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던 중상이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티스베는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건국제로부터 보름이 된 지금은 기온에 조금 예민해졌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증세가 없을 수준이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고?
“내 망명은 이제 망했어.”
바로 이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