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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58화 (58/121)
  • 58화

    바닥에 쓰러진 이교도들은 죽은 게 아니다.

    대부분 기절했을 뿐.

    티스베는 이유 없는 살생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범인에 대한 증언을 들으려면 한 명이라도 더 살아 있는 게 좋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저 뒤에는 묶인 사제들도 있지.’

    그러니 모두의 목숨이라 함은 소어와 티스베를 비롯해 저들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순식간에 어깨가 무거워진 기분이다.

    ‘솔직히 말해서…… 저들을 굳이 살리고 싶지는 않아.’

    티스베는 신전도, 이교도도 모두 싫었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성녀라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하다가, 손바닥 뒤집듯 한순간에 티스베를 악녀로 매도해 버린 게 신전이었다. 게다가 여기 있는 이교도들은 전부 테러범이고.

    그러니 티스베는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성화대가 망가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는 내 목숨이 중요한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어차피 성화대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쓰이는데, 티스베는 망명할 계획이니 더더욱 도망치는 쪽을 선택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에 소어가 나타나 버렸다는 것이다!

    ‘소어를 죽게 둘 수는 없어.’

    그렇다고 소어를 살리고 제가 죽어 버리는 것도 안 된다.

    소어는 분명히 티스베의 목숨값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괴로워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소어에게 상흔을 남겨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도 죽고 싶지 않아!’

    대체 이게 무슨 난리통이란 말인가.

    난 그냥 나한테 누명이 씌워지는 걸 막고 싶었을 뿐인데!

    ‘빌어먹을…….’

    혹시 내가 죄를 많이 짓고 환생한 건가?

    그러나 돌이켜 봐도 기억나는 게 딱히 없다.

    다 잊힌 지 오래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를 반추할 여유조차 없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폭탄의 기폭 장치는 피스톤 형태였다.

    마나가 차올랐다가, 피스톤에 의해 천천히 내려가는 방식.

    서서히 내려가고 있는 저 눈금이 바닥을 찍으면 폭탄이 터진다.

    이미 마나를 주입한 지금은 추가로 더 조작할 수 없는 상태고.

    그리고 지금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는 남지 않은 상황이다.

    소어 역시 기폭 장치를 확인했는지, 서둘러 티스베의 손목을 잡았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 보입니다. 아래 타고 온 말이 있으니 폭탄이 터지기 전에 최대한 멀리,”

    “아뇨. 말로는 폭탄의 반경을 벗어날 수 없어요. 능선을 따라 폭탄을 설치했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폭탄이 터진다면 산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무슨 방도가 있으신 겁니까?”

    “글쎄요.”

    티스베가 소어에게서 몸을 휙 돌리며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소어에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도움도 안 될 텐데 뭐 하러 왔느냐고.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걸 들었으면 그냥 피신해 있을 것이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서 일을 더 번거롭게 만드느냐고.

    ‘하지만…….’

    과연 그 누가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사지로 달려와 줄 수 있을까.

    산 아래를 향해 달려가는 에스텔을 보며, 킬리안에게 건넬 전언을 마흘론에게 지시하며.

    티스베는 문득 울고 싶었다.

    ‘왜 나는.’

    왜 나는 여기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어쩌면 크게 잘못될지도 모르는 이곳에 서 있나.

    범인이고 뭐고 그냥 도망가는 게 편할 텐데.

    이제 와서 자신이 선택한 길을 탓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 순간이 사무치게 외로웠을 뿐이다.

    제게 도망가라고 말해 줄 사람이, 네가 여기로 오면 휘말릴지도 모르니 전언이나 전해 달라고 말해 줄 사람이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 손바닥만 한 온정 한 번 내밀어 주는 이가 없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뭐…… 그런 걸로 궁상 떨 생각은 없지만.’

    그런 와중에 소어가 제게로 달려온 것이다.

    그렇게 흐트러진 소어는 처음 봤다. 오죽하면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봤을까?

    잔뜩 상기된 낯은 한여름 자두처럼 붉었고, 피로연을 위해 단장했을 결 좋은 금발은 죄 뒤집어져 있었다.

    얼마나 달려온 건지 날렵한 얼굴선을 따라서 땀이 뚝뚝 떨어지는 와중, 가쁜 날숨 때문에 외투조차 없는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하지만 티스베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런 흐트러짐 따위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

    자신이 소어를 부르고서야 그 낯 위로 떠오르던 안도까지.

    소어는 정말, 그저 제 안위가 궁금해서 산을 오른 것이다.

    이곳에 이교도들이 폭탄을 설치해 놨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그저 개죽음 명단에 제 이름을 올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소어. 하나 골라 봐요.”

    티스베는 소어를 등진 채, 자신이 매년 불을 붙이곤 했던 성화대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거든요.”

    하나는 실패할 확률이 9할 쯤 되고, 성공하면 여기 있는 모두가 살지만 실패하면 모두가 죽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 혼자 도망치는 거.”

    “……고민할 필요도 없군요.”

    티스베가 뒤를 돌았다. 그러자, 환히 미소 짓는 소어가 보였다.

    “어서 떠나세요, 티스베. 방도가 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안심할 수 있겠군요.”

    “그럼……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 텐데요?”

    “어느 목숨도 당신의 것보다 중하지 않습니다.”

    굳이 몇 번씩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어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은 그가 저런 대답을 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단지 귀로 한 번 듣고 싶었을 뿐.

    “……하하.”

    티스베는 건조하게 웃고는, 잔기침을 몇 번 했다.

    땅바닥에 남은 피를 뱉어낸 티스베가 다시 한 번 마나서클에 손을 가져다댔다.

    “어쩔 수 없네요, 정말.”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티스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몸에서 푸른 빛무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언제보다도 선명하고 짙게.

    그리고, 조금은 기쁜 것처럼.

    머잖아 기폭 장치의 눈금이 바닥을 찍었다.

    길었던 소동의 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 * *

    건국제의 성화를 방해하기 위해 이교도들이 성역에 폭탄 테러를 계획했다는 이야기는 건국제의 열기만큼이나 빠르게 퍼져 나갔다.

    특히, 새롭게 등장한 성녀 에스텔과 몰락한 성녀 티스베가 함께 성화를 붙이러 성역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였기에 더욱 이야기가 빨리 퍼졌다.

    덕분에 건국제 내내 어딜 가나 테러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이교도 놈들이 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그런 짓을 다 한 거람?”

    “그러게. 신전에서 호되게 쫓아낸 게 아니었나?”

    “어디든 자금줄이 있었겠지. 그렇잫아도 배후를 수색 중이라더군.”

    “정말 큰일이 날 뻔했지 뭐야. 성녀님을 노리고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이교도들에게로 비방이 몰린 만큼, 당시 성역에 들어갔던 두 사람 역시 끊임없이 화제에 올랐다.

    특히, 온몸을 던져 테러를 막아 낸 티스베에 대한 이야기는 과장 조금 보태서 하루 종일 들려오는 수준이었다.

    “자네도 그거 봤나?”

    “뭐, 영상구? 당연히 봤지! 정말 대단하시더군. 공녀님께서 그런 힘을 가지고 계셨다니!”

    “공녀님도 공녀님이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전율을 느꼈다네. 공녀님이 폭탄을 옮기다 쓰러지기 직전에 성녀님께서 마물을 타고 등장했던!”

    “키야, 그거 정말 압권이었지!”

    그렇다. 영상구가 있었다.

    킬리안이 진범이라 뒤통수를 칠 때를 대비해 티스베가 몰래 챙겨 왔던 영상구가!

    심지어 그 영상구는 티스베가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 단순히 단면만을 촬영하는 것이 아닌 소지자를 중심으로 넓은 반경을 모두 찍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교도들의 테러 시도가 있었던 날.

    티스베는 마지막 남은 마나와 생명력까지 끌어모아 폭탄을 하나씩 없애기 시작했다.

    그러나 폭탄은 산 전체에 깔려 있었고, 만전의 상태도 아닌 티스베가 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콜록, 콜록!”

    결국 티스베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만약 받아 주는 소어가 없었더라면 볼썽사납게 땅바닥을 굴렀으리라.

    소어는 사색이 되어 티스베를 부축하며 애원했다.

    “티스베! 그만, 그만두십시오.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곳으로 도망치셔야 합니다!”

    “이런, 콜록, 몸으로 어딜 가요……. 콜록, 콜록!”

    티스베는 끝까지 정신을 붙잡고 마나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녀가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는 법.

    입을 막았던 손에 흥건한 피를 보며 티스베는 느리게 눈꺼풀을 오르내렸다.

    ‘이렇게 끝인가……?’

    아무리 마나를 더 끌어내려 해 봐도 잡히지 않는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티스베가 그렇게 눈을 감으려는 순간.

    “저기 보인다! 가서 다 먹어 버려!”

    어디선가 에스텔의 외침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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