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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57화 (57/121)

57화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티스베를 붙든 손이 도리어 꽉 붙들렸다.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데, 날 두고 갈 리가 없지!”

그 모습을 본 사이벨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서, 설마 나를 속인-]

“당연한 걸 다 묻네. 그럼 너네가 멀쩡히 도망치게 내버려 둘 줄 알았냐?”

조금 전까지 피를 흘리던 티스베의 몸에서 푸른빛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알레샤!”

[응, 응! 불렀어?]

티스베가 별의 이름을 부르자, 푸르스름한 형태의 금붕어가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나타났다.

“저 빛을 꺼 버려! 네 힘을 빌린 거니까 네가 끌 수도 있지?”

[그럼 저 인간한테 빌려 준 힘을 가져와야 하는데? 그래도 돼?]

“물론이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가져가 버려.”

[그랭!]

금붕어가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수락하자, 이교도들을 둘러쌌던 빛이 빠르게 꺼졌다.

그리고 사이벨의 몸에서도.

푸른빛이 빠져나가고, 모든 권능을 상실한 사이벨이 비명을 질렀다.

“아, 안 돼!!!”

“안 되긴, 콜록, 뭐가 안 돼?”

티스베가 피를 마저 뱉어 내며 킥킥 웃었다.

“폭탄이 터지면 너네는 여기서 다 같이 죽는 거야.”

그 순간 이 자리의 모두는 직감했다.

이교도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순간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처참히 망가졌음을.

* * *

그 시각.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소어의 배경으로 나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성화대로 향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 즉 나무들 사이를 뚫고 말을 달리는 중이었다.

장애물도 변수도 많은 산길에서 이런 속도로 말을 달린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웠지만, 그런 것쯤은 주저할 이유조차 되지 못했다.

스쳐 지나가는 나무의 잔가지가 몇 번씩이나 뺨을 할퀴고 갔다.

그러나 소어는 오히려 속도에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티스베.’

그의 약혼녀 때문에.

혹시라도 제가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 티스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는 결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간절해 본 기억이 없었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소어는 제 죽음 앞에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본인의 죽음조차도 가치를 갖지 못하는 세상에서 대체 무엇에 간절할 수 있을까?

그의 세상은 늘 흑백이었다.

적어도 성인이 되어 티스베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티스베를 보고 있노라면 사람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제가 무언가를 아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놀라웠다.

티스베와 함께 있노라면 그저 결함뿐인 자신도 제법 멀쩡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베푸는 온정을 받고 있노라면 제가 그 지독했던 전장에서 사지 멀쩡히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티스베가 사라진다면, 소어가 그 이후를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약 그 이유에 소어의 과실이 있다면 더더욱.

하여 소어는 글자 그대로 제 목숨줄이 산 정상의 성화대에 있는 것처럼 말을 몰았다.

그러나 성화대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더욱 조여들기만 했다.

만약 도착했는데 이미 티스베가 죽어 있기라도, 아니, 무언가 잘못되어 있기라도 한다면?

일말의 가능성 앞에 이성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성화대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어는 말에서 내려 성화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피비린내가 느껴져, 소어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제발.’

제발 티스베가 무사하기를.

이교도들에게 해 둔 협박 따위는 조금도 그를 안심시킬 수 없었다.

차라리 이교도들이 그를 협박하기 위해서라도 티스베를 인질로 납치해 갔기를 바랐다.

그러면 적어도 티스베는 폭발로부터 안전할 테니까.

모든 진상을 알게 된 티스베가 자신을 경멸하더라도, 다시는 그 온정을 받을 수 없게 되더라도…….

‘티스베가 무사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산 정상의 광경이 점점 시야에 잡혔다.

난투라도 있었던 건지.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이 즐비했다.

서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햇살 아래 백색으로 나부끼는 은발.

그리고 제게 언제나 태양보다도 따스한 빛을 보여주었던 금빛 눈동자.

“티스베!”

소어 본인도 모르게 헐떡임에 섞여 나간 외침에, 기절한 듯 보이는 누군가의 멱살을 쥐고 있던 티스베가 몸을 돌렸다.

맹금류의 것처럼 날카로운 금안이 매섭게 그를 향했다.

처음 보는 티스베의 살기 어린 얼굴.

뛰어가려던 소어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설마 진상을 알게 된 건가?’

사제복을 입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들의 정체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었다.

분명 오늘 테러를 감행하려 했던 이교도들이리라.

그리고 어떻게인지는 몰라도 티스베에게 모두 당한 것 같았고.

그 과정에서 이교도들이 분명 티스베에게 무언가를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분명 나를 경멸하겠지.’

내가 티스베에게 감히 다가가도 되는 걸까.

주저한 순간 티스베의 낯이 확 풀렸다.

“……소어?”

그리고 티스베가 눈을 두 배는 더 크게 뜨는 것 같더니, 붙들고 있던 멱살을 놓고 소어에게로 달려왔다.

“진짜 소어잖아?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킬리안이 얘기해 준 건가요?”

“……아, 아! 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사정을 설명해 주어서…… 그보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꼬리가 밟히기 전에 소어가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다행히 티스베는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가 주었다.

“별건 아니에요. 이교도들인데, 아무래도 수상해서 뒷배가 누구냐고 말하라고 했더니 도망치려고 하기에 좀 잡았어요.”

“그…… 럼 대답은 들으신 겁니까?”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한 놈 빼고는 아는 놈이 없다더라고요.”

문제는 그 한 놈, 사이벨을 제일 먼저 족쳐 버렸다는 것이다.

사이벨은 물고기자리의 권능을 빼앗겼다는 걸 깨닫자마자, 노호성을 터트리며 티스베에게 달려들었다.

-이, 이 망할 년이! 네년이 무엇을 망쳤는지 아느냐!

물고기자리의 권능을 상실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무기를 빼앗긴 수준.

분노한 사이벨이 다른 성좌의 권능으로 티스베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만전을 기해도 티스베에게 밀리던 그가 주무기까지 빼앗긴 상태에서 그녀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티스베는 신성력과 마법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성좌의 권능을,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운용했으니까.

물론 숙련도 면에서는 사이벨이 압도적일지 몰라도, 싸움이란 게 어디 숙련도의 문제던가.

‘그 과정에서 피를 좀 쏟긴 했지만…….’

서둘러 물고기자리의 소환을 풀어 버린 이후로는 어느 정도 견딜 만했다.

그렇게 사이벨이 나가떨어지자 다른 이교도들은 공포로 이성이 마비되었다.

-도, 도망쳐야 해!

-저년을 잡아!

-살려 주십시오! 제발!

그나마 상급 사제들은 대항하려 했지만 이미 그 아래로는 전의를 상실해 버린 지 오래,

티스베가 전장을 정리하는 데에는 5분도 채 필요치 않았다.

-뒤, 뒷배가 누군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저희 중에서는 사이벨 주교님만 알고 계십니다! 살려 주십시오!

-그래? 그럼 너희가 살아 있을 필요는 없겠네.

-아아악!

뭐 대충 그렇게 된 것이다.

이교도들과의 전투는 전투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빠르고 깔끔하게 정리되었지만, 티스베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결국 범인도 못 찾았고 폭탄에는 불이 붙었어.’

문제는 이제 그녀도 한계라는 점이다.

이미 피를 여러 번 토했다. 마나는 더 남을 것이 없을 만큼 써 버렸고.

피를 잔뜩 흘린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후들거렸고, 심각한 내상을 입은 탓에 한 번 호흡이 오갈 때마다 배 속이 난자당하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지 않는 것이 다행일 지경이ㄹ다.

‘지금은 광범위한 힘을 쓸 수 없어.’

이교도들은 이미 점화된 폭탄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현 시점에서 테러를 막으려면 폭탄이 터지기 전에 전부 제거하는 방법뿐인데.

‘그건 지금 상태라면 불가능해.’

지금 남은 마나는 아무리 꽉 쥐어 보아도 한 줌도 채 되지 않는 양이었으니까.

그 한 줌을 전부 탈탈 털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내상을 입을 각오를 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도박이지만.

하지만 그 한 줌을 순간이동에 쓴다면, 한 명 정도는 여기서 곧장 안전한 곳으로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한 명 정도는.

‘나 하나 정도는 여차하면 빼낼 수 있어서 범인을 캐고 있었던 건데.’

소어가 와 버릴 줄이야.

결국 선택해야 하는 셈이다.

소어와 자신 중 한 명을 살릴지, 아니면 모두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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