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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55화 (55/121)

55화

킬리안의 명령에 병사들이 각 대대장을 따라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산 입구를 메웠던 병사들이 사라지자, 에스텔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성역을 돌아보았다.

분명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성역의 마나는 다정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탓일까?

‘짓눌리는 기분이야.’

에스텔이 심장 위로 주먹을 꾹 쥐었다.

열심히 뜀박질을 한 탓인지 심장이 아직도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화살이 날아오던 것이 생생히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두려웠어.’

그 순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티스베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무력하게 화살을 맞고 돌아가야 했으리라.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런데도 내가 성녀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이런 무력감은 싫다.

‘내가 정말 성녀라면 분명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나도 공녀님의 도움이 되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내가 할 줄 아는 건 마물과 소통하는 것뿐인데.’

소통이라고 해 봐야 감정을 파악하고 간단한 의사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차라리 대화가 가능했다면 더 편했을 텐데.’

나는 정말 할 줄 아는 게 없구나.

무력감에 에스텔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에스텔이 서둘러 눈물을 닦으려는데,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어? 우나? 어머, 쟤 우나 봐.]

[짜…… 눈물. 불순해…….]

[몰랐어, 보병궁(물병자리)? 인간은 원래 짜.]

[이 몸은 짜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미천한 인간들이란.]

[마갈궁(염소자리)! 그렇게 무시하다가 큰 코 다친다니까. 쟤들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해내는 애들이라고!]

[흥! 그래 봐야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먼지인 것을.]

[내버려 두십시오, 처녀궁(처녀자리). 마갈궁도 인간이 싫어 그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정을 좀 주었다 싶으면 금세 죽어 버리니 이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번에도-]

[그, 그 입 닥쳐라, 인마궁(궁수자리)!]

옥신각신하는 목소리는 여럿이었다.

들려온 것만으로도 넷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들려온 곳은…….

[……얘들아, 쟤 우리 보는 거 같지 않니?]

[바보……. 그럴 리 없잖아…….]

[하지만 이곳을 보는 것 같기는 하군요. 의아한 일입니다. 딱히 마나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다들 헛소리군. 다들 마나가 우리와 저 세계를 연결해 주는 매개라는 걸 잊기라도 한 건가? 마나로 우리를 불러낸 게 아니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면…… 여길 이렇게 똑바로 보는 이유가 뭔데?]

처녀궁이라고 불렸던 여자 목소리에 모두가 침묵했다.

1, 2, 3.

[역시 보는 거 맞잖아아! 마갈궁!!]

[아, 아닌 척해라! 아닌 척해!]

[시선…… 시선 돌릴 만한 거……!]

[마, 마물! 여기 백양궁(양자리)이 봉인시켜 둔 마물이 있지 않습니까?]

[백양궁? 그 불쟁이?]

[기억해……. 화약…… 너무 먹어서 봉인했던. 이 근처일 텐데. 양머리바위…….]

[아, 저기 있군!]

마갈궁이라고 불렸던 걸걸한 목소리를 끝으로, 딱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에스텔의 근처에 있던 양머리 모양의 바위가 갈라지더니, 돌먼지가 피어오르며 그 사이에서 검붉은 마물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에스텔 역시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잊은 채 눈앞의 마물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워어어!

마물이 기지개를 켜며 울부짖자, 마물의 목소리가 마나를 통해 에스텔에게로 전달되었다.

전에는 단순히 마나에 섞인 감정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확실했다.

“……혹시 너, 배고프니?”

그워엉!

“화약? 난 화약은 없는데……. 아니, 거짓말이 아니야. 냄새가 난다고? 아무래도 그렇겠지.”

여기에는 지금 폭탄이 대량으로 묻혀 있으니까…….

“……아!”

에스텔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을 반짝 떴다.

화약을 먹는 마물이 깨어났다면, 여기 성역에 잔뜩 묻힌 폭탄을 먹여 주면 될 게 아닌가!

왜 때마침 마물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지는 몰라도 잘됐다.

에스텔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배고프지? 내가 먹을 걸 줄게! 아주 많이 있어!”

그우엉!

울부짖은 마물이 에스텔을 훌쩍 들어올려 제 위에 얹었다.

“자, 이쪽이야! 화약 냄새를 따라가! 전부 네 거야!”

에스텔의 지시에 순식간에 커다란 마물의 그림자가 나무들 사이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텅 빈 자리에,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바람결에 실려 왔다.

[……잘 풀렸네요. 만족하십니까, 처녀궁?]

[그래. 저 애도 슬슬 능력을 개화할 때가 되었잖아. 내 별자리를 타고나서 그런지 마음이 쓰인단 말이야.]

[성공…… 이번에는. 어쩌면…….]

[크흠. 성공할 거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니까.]

[그래. 우린 그만 돌아가자. 다음에 또 만날 날이 오겠지.]

재앙이 강림하거든 또 보자꾸나, 내 별의 아이야.

처녀궁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 자리에 머무르던 바람도 흩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 * *

그 시각, 성화대.

“준비는 전부 끝이 난 건가?”

“예, 주교님. 마나로 점화하고 30분이 지나면 차례대로 터지기 시작할 겁니다.”

“음, 그래. 고생했다.”

이교도들의 주교, 사이벨의 말에 다른 이교도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신전 사제로 위장하고 성역으로 들어온 지 몇 시간 째.

드디어 이교도들의 임무는 끝을 보이고 있었다.

성역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산이나 다를 바 없는 이곳의 능선을 따라 폭탄을 설치하고, 그것이 또 성화대로 모이게끔 만들어 점화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심지어 군데군데 보초를 서는 듯한 병사들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교도들이 이번 일에 사활을 걸고 신도들을 여럿 파견한 게 아니었더라면 분명 진즉 발각당했으리라.

“주교님, 기절시켜 둔 신전 사제들은 어떻게 할까요?”

“성역과 함께 끝을 맞이하도록 저쪽에 내버려 둬라. 저들도 우리 교 부흥의 제물이 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이벨의 명령에 이교도 사제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서둘러라! 전부 마치고 모여야 사이벨 주교님께서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실 수 있다! 꾸물거리는 놈은 이곳에 두고 간다!”

사이벨이 타고난 성좌는 물고기자리.

그리고 물고기자리는 장소와 장소를 연결해 이동을 빠르게 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여 차용 단계에서는 엑스라트처럼 단순히 이동 속도를 빠르게 해 주고, 가기 힘든 장소를 좀 더 쉽게 지날 수 있도록 해 준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강림을 할 수 있게 되면 단순히 이동속도를 빠르게 해 주는 것을 넘어, 일정 영역 안의 사물 혹은 생명체들을 순간이동시킬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이벨은 이교도 주교들 중에서도 몇 안 되는 물고기자리 강림을 성공한 이른바 순간이동 능력자였다.

무려 주교씩이나 되는 그가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이기도 했다.

‘모든 게 순조롭군.’

신전 사제들을 쌓아 놓는 걸 본 사이벨이 성화대 주변을 한 번 날카롭게 훑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첨예한 안광에 흡족한 기색이 서렸다.

폭탄도 전부 설치가 잘 되었고, 계획한 대로 잠입도 문제없었다.

‘이게 다 그 호구 놈 덕분이다.’

막대한 금액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건 게 오직 제 주변을 휘말리게 하지 말라는 것뿐이라니.

게다가 워낙 인간관계가 협소한 탓에 그 ‘주변’이라는 건 고작 약혼녀 한 명 뿐이고.

그러니 이만한 호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칼릭스트 공녀가 여기 나타날 리가 없지.’

준비는 모두 마쳤으니 폭탄을 점화하고, 터지기 전에 유유히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주변을 모두 둘러본 사이벨이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이동할 때가 된 것 같군. 괜히 더 지체하지 말고 서둘러 이동하지.”

“그런데 주교님, 성녀를 붙잡으러 간 일행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뭐? 아직도 성녀가 성역으로 들어오지 않았단 말이더냐?”

“아, 아마 지금쯤 들어왔을 텐데…….”

모호한 대답에 사이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천리안을 써 보면 될 것 아니냐? 천칭자리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나?”

“몇 있기는 합니다만, 아까 병사를 따돌리고 신전 사제들을 제압할 때 망을 보느라 전부 마나를 소진해 버려서…….”

“이런 바보같은 놈들! 여력을 남겨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이벨이 버럭 소리를 쳤다.

그는 이교도들 전원을 순간이동시켜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마나를 아껴 놓아야 하니 섣불리 신성력을 쓸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주교님! 성역 안에 사람이 예상보다 많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쯧, 됐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잠깐만 확인해 보고-”

그때.

“주, 주교님! 저기 누가 옵니다!”

한 말단 사제의 외침에, 이교도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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