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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54화 (54/121)
  • 54화

    “그, 그건 저도 모릅니다요. 저보다 높으신 분들이 어디선가 호구를 잡아 왔다는 이야기밖에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엑스라트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말 엑스트라다운 놈이었다.

    “어쩔 수 없지.”

    더 높은 놈을 족쳐서 알아내는 수밖에.

    그녀의 직감이 맹렬하게 외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활동이 활발해진 이교도들과, 집어먹기 좋은 상을 차려줬음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범인 사이에는 분명 어떤 연관성이 있을 거라고.

    “성화대 쪽에 더 높은 놈들이 있다고 한 건 사실이겠지?”

    “그,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건 전부 말씀드렸습니다요!”

    “그래, 넌 좋은 거짓말쟁이였어.”

    본인이 뱉은 말을 10분도 채 지키지 못했지만 어쨌든 도움이 됐으니까.

    티스베의 입에서 너그러운 목소리가 나오자, 엑스라트의 눈동자에 희망이 차올랐다.

    “그, 그럼 살려 주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야?”

    그리고 이어진 티스베의 대답에 희망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너 날 죽이려고 했다며? 남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으면 내 목숨 날아갈 생각도 했어야지.”

    티스베가 나뭇가지를 하나 더 꺾어 들었다.

    우득, 그 소리에 엑스라트의 몸이 벌벌 떨렸다.

    그는 미처 알지 못했겠지만 티스베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엑스라트 같은 부류였다.

    “내가 어릴 때부터 살해 위협을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라서 말이야. 너 같은 놈들만 보면 이젠 신물이 나. 남의 목숨은 가볍고 제 목숨은 귀한 쓰레기 같은 놈들.”

    “아, 악의는 없었습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

    “차라리 악의가 있기라도 하면 이유라도 물어보지. 이 자식아!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살 거면 주점 종업원을 하면 되지, 사람을 죽이려고 해? 너네 신이 남 죽여서 얻은 돈으로 호강하고 살라고 하든? 어?”

    나뭇가지에서 푸르스름한 마나의 빛무리가 흉흉하게 피어오르자, 엑스라트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사, 살려 주십쇼! 공녀님이신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공격하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어, 그래. 나도 널 믿어. 믿지, 그럼. 하지만 날 공격했잖아? 그럼 죽어야지.”

    티스베가 엑스라트의 말을 귓등이 아니라 콧등으로도 안 믿는 투로 빈정거리며 나뭇가지를 높게 치켜들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티스베는 그대로 정지하고 말았다.

    “거짓이 아닙니다! 공녀님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교단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뭐?”

    ”믿어 주십쇼! 어, 어떤 일이 있어도 공녀님을 해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 누굴 붙잡고 물어도 같은 말을 할 겁니다!”

    “……그러니까. 너네는 폭탄도 설치할 거고 에스텔도 해치고 성역도 망가뜨릴 건데. 근데 내가 절대로 다치면 안 된다는 조건이 있었다고? 콕 집어서 나만?”

    “네, 네! 그렇습니다!”

    엑스라트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티스베의 입술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이런 빌어먹을…….”

    이교도들에 의한 수상쩍은 습격.

    게다가 에스텔만 해를 입고 티스베는 다치지 않는다면, 그 범인으로 몰릴 만한 사람이 티스베 말고 더 있을까?

    완벽하게 티스베가 예측한 범인의 행보대로다.

    ‘함정이 허탕을 친 줄 알았더니.’

    정확히 그 반대다.

    이교도들과 범인 사이에 무언가 연관이 있을 거라는 강렬한 직감.

    그것이 확신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 * *

    “헉, 허억.”

    에스텔은 빠르게 산비탈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다급한 걸음은 조금 휘청이기도 했으나, 시골에서 숲을 누비며 다녔던 그녀의 발재간은 여전했다.

    그녀는 나무뿌리와 돌부리에 걸리지 않고 흙길을 달리는 분야에서만큼은 권위자였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쉼 없이 달린 다리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에스텔은 쉴 겨를이 없었다.

    ‘서둘러야 해!’

    지금 그녀의 발에 사람의 목숨이 여럿 달려 있었으니까.

    조금 전 매복해 있던 이교도들을 한 차례 정리한 뒤, 티스베는 방벽을 풀고 에스텔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매복이 없었으니 돌아가는 길은 안전할 거예요. 그러니 서둘러 성역을 벗어나서 이 이야기를 전해 줘요.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전부 대피시키고요.”

    “고, 공녀님은요?”

    “이교도들이 폭탄을 설치했다면 그걸 확인해야 해요. 방금 놓아준 놈이 하나 있으니 붙잡아서 물어보려고요.”

    “위험할 거예요! 공녀님의 능력으로 빨리 내려가서 알리는 게-”

    “아뇨, 그렇게 하면 늦을지도 몰라요. 찾아야 할 것도 있어서.”

    티스베가 범인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이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에스텔은 그녀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티스베가 강경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당신이 가서 모두에게 알려요. 성역의 모두를 대피시키려면 서둘러야 해요. 마음 같아서는 아까처럼 능력을 써 주고 싶지만…… 여긴 마나 농도가 너무 높아서 그럴 여력이 없어요.”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며 몇 가지 당부를 더 덧붙였고, 에스텔은 더 왈가왈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지금.

    ‘얼마나 달린 거지?’

    에스텔은 너무 숨이 차면 시야가 흐려진다는 걸 경험하고 있었다.

    시야가 너무 흐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말발굽 소리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말이…….

    “……진짜 말이잖아?!”

    에스텔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을 탄 한 남자가 빠른 속도로 에스텔의 맞은편에서 산을 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에스텔도 아는 사람이었다.

    햇살처럼 밝은 금발과 맑은 벽안의 소유자.

    티스베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처럼 보던.

    “살바토르 공작님!”

    에스텔의 외침에 달려오던 말이 속도를 줄이더니, 에스텔의 앞에 급하게 멈추어 섰다.

    “일레르 영애! 티스베, 티스베는 어디 있습니까?”

    사내, 소어의 모습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지난번 연회장에서 보았을 때의 단정함은 온데간데없고, 제 목이라도 졸린 것처럼 사납게 굳어진 낯이 그가 얼마나 이 사태에 가슴을 졸이고 있는지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설마 티스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없었어요! 하지만 서두르셔야 할 거예요. 공녀님은 위에 계세요!”

    에스텔의 말에, 소어가 가볍게 묵례해 감사를 표하고는 다시 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에스텔 역시 서둘러 산을 마저 내려가자, 언제 온 건지 입구에 포진한 킬리안과 병사들이 보였다.

    “에스텔 양!”

    “전하, 저기 에스텔 양입니다!”

    “티스베, 아니, 칼릭스트 공녀는?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헉, 허억, 숲에서 화살이, 헉, 날아와서, 공녀님이…….”

    에스텔은 숨도 고르지 못하고 서둘러 티스베와 겪은 일을 얘기했다.

    티스베가 빨리 사람들을 대피시키라고 했다는 것까지도.

    모든 상황을 전해들은 킬리안의 낯빛이 굳어들었다.

    “빌어먹을,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다. 빨리 사람들을 대피-”

    “저, 전하! 전언입니다!”

    그때, 멀리서 경비가 달려왔다.

    “웬 적발 사내가 전하께 이 편지를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적발? 혹시 곱슬머리에 뒷머리를 꽁지로 묶고 있었나?”

    “예! 아는 분이십니까?”

    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발의, 곱슬머리를 꽁지로 묶은 사내라면 티스베가 데리고 있는 심부름꾼이었다.

    그도 몇 번 그 심부름꾼에게 편지를 전달받은 적이 있었으니 당연히 알고 있다.

    킬리안은 경비에게서 편지를 전달받아 밀봉을 거칠게 뜯어냈다.

    편지에는 간단한 상황이 설명되어 있었다.

    이교도들이 잠입했으며 폭탄을 설치했고, 성녀를 노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능선을 따라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종착지는 성화대.”

    그것만으로도 글을 쓴 사람이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을 대피시켜야겠다고 생각한 킬리안의 사고가 빠르게 뒤집혔다.

    ‘산에서 폭탄이 터지면 산사태 위험이 크다.’

    사실상 그 점이 가장 위험했다.

    산사태가 일어나면 사람을 함부로 투입할 수 없으니까.

    이교도들 역시 그 점을 노리고 능선을 따라 폭탄을 설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폭탄을 설치한 위치를 알아내 최대한 제거하면 위력은 줄어들 것이고, 그럼 산사태 위험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제들이 성역에 방벽을 칠 수 있겠지.’

    신전에 연락을 취해둔 지 오래이니, 그들 역시 금방 도착할 것이다.

    그럼 피해를 막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모든 판단이 끝난 킬리안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명령을 번복한다! 능선을 따라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하니, 이 개 대대는 산 속의 병사들과 합류해 폭탄을 찾아 제거한다! 나머지 일 개 대대는 나를 따라 성화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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