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본디 이교도들은 오늘 계획이 무척 순조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 새로 잡은 호구 하나 덕분에 자금 사정이 무척이나 넉넉해져서, 모든 일들이 순풍을 맞은 듯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교단장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고, 다른 주교와 사제들도 신이 나서 그에 찬동했다.
“우리의 신께서도 우리를 축복해 주고 계실 거다! 우리는 그분의 사자다! 결코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옳습니다!”
“믿습니다!”
이교도들은 한 번 생긴 이래 최고로 화목하고 결속력 있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또한 실제로 그들이 믿는 신이 그들을 축복해 주기라도 했는지, 모든 일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폭탄을 몰래 성역으로 들여오는 일도.
신전의 사제로 위장하여 성역으로 잠입하는 것도.
어째서인지 성화대로 향하는 길목에 병사들이 깔려 있는 바람에 그들의 눈을 피하느라 조금 고생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성공적으로 병사들도 따돌렸다.
그러니 계획대로 숲에 매복해 있다가 찾아올 성녀를 납치해 가는 것 역시도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수순이었다.
만약, 조금 전 혼자 나타나야 할 성녀가 한 은발의 여자와 함께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대, 대체 저게 뭐야?’
중급 이교도 사제, 엑스라트는 나무 사이를 다급하게 헤치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혼자 나타나야 할 성녀가 웬 여자 하나와 나타난 것까지는 괜찮았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 명은 죽이고 한 명은 납치해 가면 되는 일이니까.
적당히 화살을 좀 맞히고 성녀 쪽만 데려가면 그의 임무에는 차질이 없을 예정이었다.
그래, 그래야 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대체 뭐냔 말이다!’
엑스라트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벅찬 숨과 땀에 시야가 흔들려도, 그의 다리는 멈출 줄 몰랐다.
‘전부, 전부 죽었다.’
그까지 포함해 전부 여덟이 매복해 있었다.
대부분 하급 사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공격 위주의 신성력에 특화된 이들로만 선별된 집단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 죽은 것이다.
고작 한 명에게.
첫 시작은 여자가 마나로 이루어진 활을 꺼냈을 때였다.
활이나 화살통을 매고 있던 것도 아니다.
단순히 자세를 취했을 뿐인데도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예기를 띠는 푸른 화살이 들려 있었다.
[어디에 있든 맞힐 수 있어.]
그리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자가 시위에 얹었던 손을 한 번씩 뗄 때마다 나무에서는 이교도들이 심장에 화살을 맞고 떨어졌다.
만약 엑스라트가 이동에 특화된 물고기자리를 타고나, 교단에서도 가장 빠른 축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그 역시도 일찍이 잡혀 죽었을 것이다.
엑스라트는 살짝 고개를 뒤로 돌려 보았다.
그러자 그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여자가 보였다.
온몸에는 푸른 빛무리가 일렁이고, 이마에는 화살 모양의 푸른 기호가 새겨진 여자.
멀리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서늘한 아름다움을 가진 우아한 미인이었으나 그런 단순한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강렬한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짓누를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마주한 것만 같은 기분.
[잡히면 넌 곱게는 안 죽인다.]
게다가 머리를 깎아 뇌리에 직접 새기는 듯한 이 음성까지!
‘대체 저 여자가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진 거란 말이냐!’
엑스라트는 이단이 되기 전 꽤 오래 신전에 소속되었던 사람이었다.
하여 그는 신성력에 대해서라면 제법 빠삭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여자가 보이고 있는 상태 역시도.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건 분명 강림이다.’
신의 힘을 직접 몸에 깃들게 한다는, 신전 내에서도 극소수만 가능하다는 바로 그 강림!
성공하기만 하면 신의 경지에 근접하게 된다는 능력으로, 신전의 나이 든 주교들도 평생에 걸쳐 겨우 성공시킨다는 능력인데.
‘대체 저 젊은 여자가 어떻게 그걸?’
한 번에 한 가지 이상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기함할 노릇인데 말이다.
게다가 가장 두려운 것은, 지금 이렇게 다리가 떨어져라 달리고 있는데도 조금도 거리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심지어는 좁혀지기까지…….
[거 더럽게 안 서네.]
우득.
뒤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커헉!”
나뭇가지의 단면이 정통으로 엑스라트의 등에 꽂혔다.
방금 꺾은 나뭇가지는 흉기라기엔 애매한 물건이었으나, 마나가 실리자 너무도 쉽게 엑스라트에게 꽂혀 버렸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은 엑스라트가 스스로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듯 바닥을 굴렀다.
그와 함께 엑스라트가 잔뜩 끌어 올렸던 마나가 역류하며 속을 난장으로 헤집었다.
“쿨럭, 쿨럭!”
[화살을 쏘면 한 번에 죽어 버려서 산 채로 잡으려니 힘드네. 진작 이렇게 할 걸.]
“으, 으으…….”
엑스라트가 신음하며 땅바닥을 기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본단으로 가서 변수가 생겼다는 걸 알려야 했다.
그러나 이미 몸은 안도 밖도 망가져 버렸고, 죽음의 그림자는 점점 그에게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개 들어. 당장 죽이지 않을 테니까.]
죽음의 목소리라기에는 너무도 상냥해 보이는 음성.
엑스라트는 저도 모르게 그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다.
빛을 등진 여자의 은빛 머리칼. 꿀을 녹인 듯한 금안이 소름끼칠 만큼 아름답게 보였다.
그제야 엑스라트는 여자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카, 칼릭스트…….”
설마설마 하면서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칼릭스트의 공녀는 마나 친화도가 높을 뿐 그 어떤 능력도 타고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게다가 성역으로는 아직 티스베와 에스텔이 함께 성화를 올리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성녀와 정답게 걷고 있는 저 여자가, 설마 성녀인 에스텔과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사이로 알려진 칼릭스트의 공녀일 거라고 짐작할 수나 있었을까?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자 신전에 적을 둘 시기에 보았던 어린 성녀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졌다.
특유의 염세적이고 오만한 표정까지도.
그러나 엑스라트에게는 그런 것에 놀랄 틈이 없었다.
칼릭스트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티스베의 발이 그의 낯을 걷어차 버렸으니까.
“커헉!”
[지금부터 네가 말할 수 있는 건 내 질문에 대한 대답뿐이다. 알겠어? 어기거나 대답하지 않으면 네 관절 하나씩 날아갈 줄 알아.]
“쿨럭, 쿨럭! 나, 나는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그렇겠지. 난 널 존중해. 우리 서로 뱉은 말과 신념을 지키며 살자고.]
그러니까 너는 절대로 입을 열지 마.
[나는 지금부터 네 관절을 하나씩 날려 줄 테니까.]
누가누가 뱉은 말을 잘 지키는지 보자고. 알겠지?
* * *
티스베는 뱉은 말을 아주 잘 지켰다.
안타깝게도 엑스라트 쪽은 아니었지만.
“성화대 쪽에 폭탄이 있고, 능선을 따라서 또 설치해 놨다, 라.”
이거 아주 제정신들이 아니네.
티스베가 엉망이 된 꼴로 싹싹 빌고 있는 엑스라트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성역을 폭파시키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 완전히 이 산 하나를 망가뜨리겠다는 속셈이었다.
‘게다가 킬리안의 사병들 말고는 다른 수상한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니.’
티스베의 함정은 완전히 허탕을 쳤다.
범인이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이다.
‘분명 에스텔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티스베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혹시라도 범인이 보낸 암살자가 사제로 위장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물어봤지만.
“그럴 리 없습니다! 사제를 구분하는 건 성수를 손목에 부어서 세례 흔적이 나타나는지를 통해 확인하는 겁니다요!”
“그럼 너네같이 세례 받은 변절자들은 어떻게 걸러내는데?”
“세례 흔적은 파문당할 때 사라집니다. 그래서 성수를 부어도 아무런 흔적이 나타나지 않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운이 좋게 특수한 약품을 어렵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투명하지만, 마나가 주입되면 빛을 발하는 약품을 구해 세례 흔적을 만든 것이다.
“저희야 세례를 받은 적이 있으니 알고 있지만, 암살자 따위가 어떻게 그 흔적에 대해 알고 조작하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다.
‘게다가 따로 사주를 받은 것도 아니라고 하고.’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있었다.
“너희, 원래 돈 없잖아. 약품이고 폭탄이고, 그걸 다 어디서 구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