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물어볼 생각인가요?”
“물론 그렇게 할 거예요.”
굳게 다짐하듯 고개까지 끄덕이는 에스텔에, 티스베가 픽 웃었다.
그녀는 순수한 사람들에게는 퍽 애정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뭐 그럴 필요 있나요. 물어봐요, 뭐든.”
“그럼 왜 망명하시려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이렇게까지 뭐든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순수한 사람들의 솔직함을 조금 얕보고 만 것 같다.
티스베는 잠깐 당황했지만, 동요는 그리 길지 않았다.
망명하겠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이유를 숨길 필요가 있나.
“그냥…… 별 이유 없어요. 내 평판이 땅에 떨어진 거, 에스텔 양도 알잖아요.”
“하지만 그건 다들 공녀님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인걸요.”
“맞아요. 하지만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지금 만연하게 퍼져 있는 소문들은 사실 대부분 티스베의 잘못이 아니다.
단지 티스베를 향한 악의일 뿐.
“나는 늘 무언가로 불려 왔어요.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성녀라고 불렸고, 당신이 나타난 이후에는 사기꾼, 혹은 악녀라고 불렸죠.”
성녀로 불릴 때 티스베는 모두의 선망을 받았다.
그 때문에 티스베는 천재를 연기하기 위해 혹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여야 했고, 가끔은 독이 든 우유를 마시게 되기도 했다.
웃는 낯으로 다가온 이들이 제 등에 칼을 박고, 믿었던 이들이 제 허울을 이용할 생각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 누구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가끔은 지금이 조금 더 후련하기도 해요. 성녀라는 이름도 사라지고, 공녀라는 이름도 위태로운 지금의 내게서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 대가로 모두에게 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 조금 넌센스일 뿐.
어딜 가든, 누굴 마주치든 티스베를 보는 눈길에는 은근한 경시가 스며 있었다.
정말로 저 여자가 사람을 죽였을까?
가십지에 쓰여 있던 소문들이 사실일까?
설마 근거도 없는데 소문이 그렇게 퍼졌을까…….
신탁을 잘못 해석한 것은 신전인데 욕을 먹는 것은 티스베라니 참 간편한 일이다.
그녀 혼자만 희생하면 되니 얼마나 편한가.
“성녀도 악녀도 전부 지긋지긋해요.”
그 누구도 그녀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았다.
설령 티스베의 주변인들이 그녀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시선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싫었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요. 내가 성녀였던 것도, 모든 사람들에게 돌을 맞은 악녀였던 것도 모르는 곳으로.”
“그럼, 거기 가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는 어떻게 되나요?”
“전부 작별해야겠죠.”
티스베는 그 말 뒤에 ‘아쉽지만’을 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또한 미련 같았다.
‘어차피 나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일 뿐이고, 내가 사라진다고 해서 큰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닐 테니까.’
자신이 사라진다고 아쉬워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물론 할아버지는 조금 속상해하실지도 모르지.
하나뿐인 아들에 이어 하나뿐인 손녀까지 당신 곁을 떠난 셈일 테니.
하지만 금세 적응하게 될 것이다. 알마스는 상실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소어는 마음에 걸리지만.’
소어도 자신이 없으면 그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애정을 주어도 보답해 줄 수 없는 자신 같은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이 훨씬 약혼녀로 잘 어울릴 것이다.
그래서 티스베는 떠나는 것을 말할 때도 거리낌이 없었다.
“아마 금방 전부 날 잊을 거예요. 사람은 망각과 적응의 동물이니까.”
“그때가 되면, 공녀님은요?”
그러나 이 질문을 들었을 때는,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제 입매가 굳어지는 걸 느꼈다.
“그때가 되면 공녀님은 행복해지시나요?”
“……그건 알 수 없죠. 새 출발을 한다고 해서 전부 행복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거기서도 공녀님은 눈에 띄실 거예요. 공녀님은 아주 멋진 분이시니까요! 그렇게 공녀님이 또다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또 지금과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럼 그때는 어디로 도망치실 건가요?
이어진 물음에 티스베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가정.
도망친 곳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까?
‘아니.’
그때도 떠날 수 있을까?
그때도…… 과연 새로운 곳에서의 행복을 꿈꿀 수 있을까?
티스베 그녀는 영영 모를 것이다.
그녀가 망명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러나 지금 티스베와 마주보고 있는 한 사람, 에스텔에게만큼은 그 표정이 너무도 잘 보였다.
그 슬프고도 허망한 표정이.
어딘지 익숙한 그 표정을 보며 에스텔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공녀님은 제가 고향을 떠나서 수도로 온 이유를 모르시겠죠. 수도에서는 다들 절 두고 성녀라고 하지만…… 저는 사실 고향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마물과 이야기하는 걸 들켰거든요.”
그래서 에스텔은 도망치다시피 외숙부의 저택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미 고향에서는 미친 여자라는 소문이 쫙 퍼져서, 그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사실 에스텔은 성녀라는 말을 듣게 된 이후에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 그날 사냥터의 호수에서 마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두가 죽음을 직감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이 마물을 잠재운 게 아니라면.
‘과연 나는 성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대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저는 고향이 너무 그리워요.”
돌아가고 싶다는 것.
“수도로 도망가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거긴 제가 미쳤다는 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고, 멋진 것들이 가득하다고 자주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로도 멋진 일을 많이 겪었다.
꿈에만 그리던 티스베도 만나 보았고, 모두의 선망을 받는 황태자의 파트너로 황궁의 연회에 참석해 보기도 했다.
상상도 못 해 본 성녀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하지만 겪어 보지 못한 것들이 늘어 갈수록 에스텔은 고향이 그리워졌다.
동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볼 때의 기분이라거나, 젖은 흙내음 나는 오솔길.
빼곡한 나뭇잎 그림자를 밟고 숲속을 누비던 그 시간들과 풍경이.
저택의 소박한 제 방과 주말이면 스튜 냄새에 잠이 깨던 날들이.
그 모든 게 그리웠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자신은 여전히 미친 여자 취급을 받을 텐데도.
“참 우스운 일이에요. 거기가 뭐 그렇게 좋다고 그렇게 그리운 건지.”
누군가 그랬던가.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에스텔은 그 말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었다.
그래서 티스베가 망명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불쑥 묻고 싶었다.
‘떠나는 거야 공녀님의 자유시지만.’
과연 떠나서 행복해질 준비가 되신 걸까?
“조금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려 봤어요. 공녀님은 저처럼 떠난 곳을 그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거든요.”
물론 공녀님이시라면 어디 가서든 잘 지내시겠지만!
에스텔이 환히 웃으며 가볍게 주먹을 쥐어 힘찬 자세를 해 보였다.
그리고 티스베는 자리에 멈추어 선 채 그런 에스텔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떤 대답을, 혹은 어떤 반응을 내어 주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
‘물론 에스텔의 배경은 알고 있었어.’
<괴물꽃>에 나오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에스텔이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행복해질 준비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쩌면…… 그냥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가슴 안쪽 어딘가가 찌르르 조여드는 느낌이 났다.
그 탓에 티스베가 저도 모르게 심장 위쪽을 짚은 순간이었다.
“……?”
목에 건 마흘론의 펜던트가 진동했다.
그것도 몹시 격하게.
의아함에 티스베가 펜던트를 집어 보자, 다급한 마흘론의 음성이 펜던트로부터 흘러 들어왔다.
“-가씨, 아가씨! 지금 어디십니까! 벌써 성역으로 들어가신 건 아니죠!”
“당연히 성역이지. 도착한 지 꽤 됐어. 성화대로 가는 길인데?”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성화냐고 물으려는 순간.
“젠장! 당장 거기서 나오셔야 합니다! 신전 사제로 위장한 이교도들이 성역으로 들어갔다는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그게 왜?”
“아니, 왜냐니요? 제 말 안 들으셨습니까? 이교도들이 폭탄을 최근 대량으로 매입했다고 아까 그렇게 말씀드렸잖습니까!”
“……뭐?”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굳어 버렸다.
돌이켜 보면, 폭탄…… 뭐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이교도들이 글쎄 돈이 어디서 났는지 폭탄을 대량으로 구매했다더랍니다! 아가씨! 제 말 또 안 듣고 계시죠!
한…… 이쯤?
문제는 그때 티스베가 킬리안의 편지를 읽느라 마흘론의 잔소리를 평소처럼 귓등으로 들었다는 거고.
“그놈들 분명 에스텔 일레르를 노리고 성역을 터트리려는 겁니다! 그러니까 빨리-”
그러니까 빨리 성역을 벗어나라는 마흘론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지만, 티스베는 그걸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에스텔, 피해요!”
에스텔의 등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