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첫눈에 보기에도 소어는 평소와 달랐다.
단순히 낯이 굳은 게 아니라, 성마르고 강퍅한 성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 점이 킬리안을 조금 의아하게 했다.
‘티스베를 보냈다는 걸 알면 분명 내 멱살을 틀어쥘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절박한 표정을 지을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지금은, 뭐랄까.
깎아지른 절벽에라도 선 것 같은 얼굴이다.
“티스베 얘기를 듣고 온 건가?”
“그렇습니다. 아주 멋대로 일을 쳐 주셨던데.”
소어가 차갑게 비아냥거리며 낯을 구겼다.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어차피 긴 대화 나누려 온 것이 아닙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당장 제가 성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그렇게 소어가 성마른 목소리로 꺼낸 것은 의외의 부탁이었다.
* * *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와 에스텔 일레르 드 칼릭스트가 함께 성역으로 갔다.]
순식간에 홀을 점령한 이 말을 들은 순간.
소어는 제 피가 일순간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 라스에게서 보고 받은 내용이 반사적으로 떠오른 까닭이었다.
“각하, 이교도들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소어는 제 커프스단추를 채우다 말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제야? 늦군. 돈을 지원해 준 지가 언젠데.”
“그간 건국제 준비로 치안 단속이 워낙 심하지 않았습니까.”
“쓸모없는 것들. 일 하나를 못 치나.”
티스베가 그를 밀어냈던 날.
그리고 멈추었던 형장의 칼날이 다시 벼려진 날.
소어는 이단으로 분류되어 신전에서 배척당한 이교도들과 접선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적의 적은 친구니까.
‘이교도들이야말로 지금 상황을 가장 달갑게 여기지 않을 놈들이지.’
신전에서 쫓겨나 신전을 무너뜨릴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게 그들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진짜 능력을 가진 성녀가 등장해 버렸으니.
그렇잖아도 작은 이교도들의 입지가 작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
하여 이교도들은 호시탐탐 에스텔을 해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소어가 한 것은 장작을 쌓아 놓고 기다리는 그들에게 부싯돌을 던져 준 것뿐.
이교도들이 그렇게 불을 피우고 나면 신전과 에스텔이 잿더미로 화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고 나면 티스베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날의 일은 소어에게 차디찬 좌절을 안겨 준 동시에, 한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티스베는 결코 그의 손을 잡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티스베는 상냥하시니까.’
어찌나 상냥한지, 제 어깨에 살짝 손을 얹는 것조차 지나친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최소한 티스베가 제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그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들을 치우는 수밖에.
“전한 말로는 건국제를 노리고 있다더군요. 성역을 터트릴 모양입니다.”
테러 활동은 단순히 요주의 인물을 죽이는 걸로 끝이 아니다.
그런 걸 노렸더라면 아마 청부 살인을 했겠지.
그들이 노리는 건 보여 주기다.
최대한 성대하고 화려하게 일을 터트려서, 사회에 파란을 가져오는 것.
‘그래야 그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 숨어들 틈이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곧 있을 건국제 같은 것은 그들에게 좋은 미끼나 다름없었다.
굳이 신전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성녀’를 노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
“성역이라면 잘 골랐군. 티스베가 휘말릴 일은 없을 테니.”
처음 소어가 그들에게 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을 때 내건 조건은 오직 하나였다.
-너희가 뭘 벌이든, 내 주변이 그에 휘말리는 일이 생긴다면 너희 모두 곱게는 죽지 못할 것을 살바토르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처신을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소어의 주변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의 주변이라고 칭할 수 있는 건 결국 티스베뿐이다.
바꿔 말하자면 티스베가 연루되지만 않는다면 어떤 짓을 벌이든 눈 감아 주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교도들은 단지 조금 정신이 나가 있을 뿐,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자금줄과 목숨줄을 놓고 그런 노골적인 협박도 알아듣지 못했을 리 없다.
하여 소어는 전달된 소식을 듣고 퍽 만족했다.
‘어차피 이번 성화는 에스텔 일레르가 진행할 테지.’
그러니 자신은 성역이 보이는 황궁의 홀에서 티스베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불타는 성역을 보며 놀란 척을 해 주기만 하면 되는 셈이다.
정말이지 만족스러운 계획이었다.
적어도 티스베가 성역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소어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홀에서 튕겨지듯 뛰쳐나와, 급히 제 솔정을 이교도들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본인은 곧장 킬리안을 찾아온 것이다.
성역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그러나 이런 내막을 모르는 킬리안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성역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부탁이라니?
대체 왜?
“공작, 지금 자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나? 이 기간에 허가받지 않은 자가 성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황명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당장 성역으로 가지 않고 전하를 찾아온 게 아닙니까!”
“그럼 설명을 해야 할 것 아닌가! 티스베는 작년까지 계속 성화를 올려 왔어! 에스텔과 함께 갔다고 해서 큰 문제가-”
“이교도들이 성녀를 노린 테러를 준비 중입니다. 운이 나쁘면 당장 성역이 터질 수도 있겠지.”
“……뭐? 잠깐-”
킬리안이 다른 설명을 요구하듯 소어를 붙들었지만, 그는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이만하면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난 지금 성역으로 갈 테니, 후에 체포하든 허가장을 쓰든 하십시오.”
난 내 약혼자를 거기서 빼내야겠으니까.
소어는 그 말을 남기고 곧장 킬리안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모든 것이 5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해일이 덮치고 간 자리의 허망함처럼, 킬리안은 그 뒤로도 잠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제법 쌓였을 즈음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먼저 나간 소어보다 빠를 수는 없어도, 최대한 빠르게 성역으로 가서 모든 사람을 빼내야 했다.
‘심지어 지금은 평소보다 사람이 많이 있다.’
이유는 물론 티스베의 부탁 때문에.
킬리안이 제 사병들을 여럿 깔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니 만약 성역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인명 피해는 평소의 배가 될 것이다.
“빌어먹을, 시종장! 말을 준비해! 당장 성역으로 간다!”
급박한 움직임이 황궁 한쪽에서부터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티스베와 에스텔은 성역에 도착해 있었다.
티스베가 두 별자리를 돌려보내고 에스텔을 바닥으로 내려 주며 말했다.
“자,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해요.”
“여기가 성역…….”
부드럽게 땅으로 착지한 에스텔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신전에서는 밖으로 정보를 잘 내돌리지 않는다.
그래서 단순히 성화대가 존재하는 산이라서 성역이라고 부르는 줄 알고 있었는데.
“공기가 정말 다른 느낌이네요……!”
“밀도가 높죠?”
“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했는데, 밀도가 높다는 말이 딱인 것 같아요!”
신기해하는 에스텔을 따라 티스베가 미소 지었다.
하지만 미소 짓는 얼굴과 달리 속내는 썩 좋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성역의 밀도 높은 공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만 오면 마나가 역류하는 느낌이야.’
마나 운용법을 찾느라 여러 가지 금서들을 뒤질 때, 그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이곳은 마나의 시작점이라고.
‘별자리들과 가장 온전하게 이어진 곳이 이곳이라고 했던가.’
바꾸어 말하자면 이곳은 마나를 이용하지 않아도 성좌들과 어느 정도 이어져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이곳에 오기만 하면 숨이 답답하고 마나가 금방이라도 역류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에게 짓눌리듯이.
‘이런 상황에서 기습을 받으면 곧장 대응하기 힘들 수도 있겠는걸.’
성좌를 계속 불러 둘 수 있는 상황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지만, 이런 곳에서 성좌를 계속 불러 두는 것은 무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성역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나 티스베와 달리, 에스텔은 성역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연신 눈을 빛내 가며 산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으니 말이다.
“여긴 정말 포근한 장소네요! 왜 성역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아요.”
“포근…… 한가요?”
“느껴져요. 이 장소가 우리를 반기고 있어요.”
“그거 다행이네요.”
난 죽겠는데.
티스베가 애써 인상을 구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꾸했다.
그때, 몇 발짝 앞서 가던 에스텔이 휙 몸을 돌렸다.
“그런데 공녀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