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렇게 티스베와 에스텔을 태운 성좌들이 하늘을 달리고 있을 무렵.
황궁에서는 소란이 일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성화 때문.
성화를 붙이는 곳은 성역의 산꼭대기에 있고, 성화대에 불이 붙으면 황궁의 가장 높은 홀에서 그 광경을 볼 수 있다.
하여 성화를 시작으로 하여 올해의 건국제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기 때문에, 귀족들은 해가 질 무렵부터 하나둘씩 황궁의 홀로 모여 담소를 나누던 참이었다.
특히나, 모두가 이번 건국제에는 관심을 가진 분야가 있었다.
바로 ‘성녀’를 둘러싼 이야기.
“일레르 영애는 아직도 칩거 중이신가요?”
“칼릭스트 공녀가 무척 반길 만한 이야기군요. 어쩜 그렇게 시기를 하는지, 제 눈살이 다 찌푸려질 정도였다니까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아쉽군요.”
사람들 사이에서 저마다 들었던 가십이 오고 갔다.
물론 그 가십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위 여부를 물어보면 대개 이런 식이니까.
“저는 잘 모르겠지만, 제 친구의 사촌의 연인의 동생이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그런 거라면 사실이나 다름없는 것 아니에요?”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그 숱한 가십 속에 티스베는 희대의 악녀가 된 지 오래.
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티스베보다는 에스텔 쪽에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칩거를 선언한 에스텔이 과연 건국제에서는 어떤 행보를 보일지에 대해서.
“칼릭스트 공녀가 해 왔던 것처럼 일레르 영애도 이번 성화를 올리는 거겠죠?”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던데요.”
“그래도 여태까지 해 온 게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요?”
다들 공연이나 보고 과자나 집어 먹으려는 생각으로 이야기가 오가던 찰나.
어디선가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번 성화를 올리러 가는 것은 에스텔 혼자가 아니라, 티스베와 에스텔 두 명이라고.
“심지어 벌써 두 사람이 성역에 들어갔다고요?”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요? 신전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무래도 이제 알았던 모양입니다. 방금 사제들이 헐레벌떡 뛰어가는 걸 봤다는군요!”
“어머머, 세상에…….”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 소문은 빠르게 홀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이 이례적인 처사에 놀라 수군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바람에, 홀에 있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
티스베와 에스텔이 함께 성역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한 남자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뛰쳐나가는 것도.
* * *
성녀였던 여자와, 성녀가 되기를 거부한 여자 둘이서 성역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반응한 것은 비단 그 남자 하나뿐이 아니었다.
건국제의 시작과 끝에 신께 올리는 제사를 준비하던 사제들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이 상황의 총책임자를 찾아갔다.
그러니까, 킬리안을 말이다.
새카만 흑발을 깔끔히 빗어 넘기고,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를 느슨히 뜬 젊은 권력자는 제 앞에서 꽥꽥대는 이들을 염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사제복을 입고, 하나같이 수치도 모르고 목청을 높여 대는 게 참 역겹기 그지없는 몰골들.
문제는 이번에는 그 역겨운 몰골을 마주하고서도 킬리안이 할 말이 없다는 점이었지만.
“이건 명백히 신전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전하!”
“황태자 전하께 신전에서 해 드린 것들이 적지 않음을 아시면서 어떻게 상의 한 마디 없을 수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시고도 교단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없다.
‘빌어먹을…….’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다시 생각해도 티스베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다음에는 티스베가 직접 부탁하더라도 이런 어정쩡한 거래 조건으로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서 티스베를 다시 내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소어를 떼어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티스베를 다시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건 절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제발.
‘지금쯤은 성역에 들어갔겠지.’
연락도 취해 두었으니 티스베라면 알아서 움직여 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연계 공작을 한 적이 있었고, 킬리안은 일에서만큼은 자신보다 티스베를 더 신뢰했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여길 정리해 주는 거란 말이지.’
하여간 제일 귀찮은 것만 맡긴다.
-네 긴 혓바닥이면 사제들 입 다물게 하는 건 일도 아니잖아, 킬리안.
킬리안은 티스베의 핀잔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와 달리 황족의 예복을 빠짐없이 차려입은 젊은 권력자에게서는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지금 고작 그딴 얘기를 하자고 예법도 잊고 내 앞에서 목청을 올려 대는 건가?”
그 한 마디에 저마다 소리를 질러 대던 이들이 일제히 움츠러들었다.
개중 주교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다시 기세를 세웠다.
“전하. 종들이 목청을 높인 것이 언짢으셨다면 깊이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신전과 한 마디 상의 없이 이런 일을-”
“상의하면, 그대들이 뭔가 할 수 있는 건 있나? 에스텔 일레르 하나 설득하지 못하면서?”
“그, 그건 에스텔 양이 면담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신의 종인 저희가 어찌 성녀님을 강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겠지. 나도 그 때문에 여태 에스텔 양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대들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네. 그래서 나도 그대들의 입장을 존중하는 방법을 쓴 것이지.”
킬리안의 대꾸에 잠자코 듣고 있던 고위 사제 하나가 발끈해서 끼어들었다.
“전하, 이렇게 멋대로 통보하는 게 어디가 존중하는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대들이 에스텔을 강제하지 않길 원하지 않았나. 하여 나도 에스텔이 유일하게 면담을 허락한 사람을 데려왔을 뿐일세.”
“……설마 지금 그것이 칼릭스트의 공녀라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나? 그게 아니라면 내가 대체 뭐하러 공녀를 함께 들여보낸다는 거지?”
“그, 그건…….”
사제들의 말문이 막혔다.
누군가는 킬리안이 3년 전까지는 칼릭스트의 공녀와 제법 교류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티스베와 킬리안이 3년이라는 세월 동안 교류가 부재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3년 간 데면데면했던 그들이 이제 와서 손을 잡을 이유는 없었다.
특히나 티스베의 입지가 말도 못 꺼낼 정도로 무너진 지금이라면.
그리고 기세등등했던 사제들이 주춤한 틈을 킬리안이 놓칠 이유가 없었다.
“어이가 없군. 그대들의 체면을 생각해 일부러 내가 귀족들의 반발과 오욕까지 감당해 가며 책임을 뒤집어쓴 건 생각지도 않고, 이렇게 몰려와서 소란을 피워?”
“저, 전하.”
“어디 한번 진상을 얘기해 볼까? 응? 그대들 말대로 성화에 대한 건 신전의 책임이지. 그런데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그대들이 성녀를 강제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미적지근하게 굴었다는 게 공표되면 과연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겠나?”
노골적인 협박에 사제들의 낯이 얼어붙었다.
킬리안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중압감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잔뜩 얼어붙어 있던 사제들 중 하나가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무례를 범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모두가 이건 킬리안의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말려 버린 이상, 더 이상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없는 것이 현실.
황급히 꼬리를 마는 사제들을 보며 킬리안이 느슨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이 일에 대해 교단에는 알리지 않을 테니, 그대들은 제대로 처신하도록.”
그대들이 모시는 신을 하루빨리 곁에서 모시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덧붙여진 말에 사제들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줄행랑을 쳤다.
“쯧, 한심한 것들.”
저깟 것들이 감히 제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데도 신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니 차마 건드릴 수가 없다.
종교는 곧 민심.
괜히 건드렸다가 신전에서 킬리안을 배척하는 쪽으로 나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킬리안이 정말로 걱정하는 건 신전 쪽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쪽은 조무래기들이지.
‘진짜는…….’
쾅!
그때 등 뒤에서 문이 거세게 열렸다.
뒤를 돌아보자, 칼날처럼 차갑게 벼려진 낯을 한 금발의 사내가 보였다.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이거 천성이 귀족은 못 되시겠는데, 공작.”
현 시각 킬리안이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 1순위가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