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 그러니까…… 제가 성화를 붙여야 하고, 그래서 저를 데려가기 위해 공녀님이 직접 오셨다고요?”
“바로 그거예요. 여러 번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네.”
“이, 이게 무슨…….”
에스텔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제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다면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건데.
‘공녀님이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내 방으로 들어오신 이게 현실이라고?’
게다가 심지어 나를 데리러 온 거라니?
그냥 꿈이라고 해 줘!
에스텔의 소리 없는 절규가 울려 퍼지는 이곳은 질레트 백작저.
조금 전, 에스텔은 티스베를 발견하고 서둘러 창문을 열어 주었다.
-대체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들키면 어쩌려고요!
-에스텔 양만 조용히 하면 안 들켜요. 그보다 우리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하고 되묻는 티스베에, 에스텔은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만나는 외부인이 너무 반가웠던 것이다.
그러나 반가움은 잠시.
이어진 설명에 에스텔은 혼란스러워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 무엇부터 정정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결국 내질렀다.
“고, 공녀님. 뭔가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공녀님은 특별한 힘이 있으시잖아요. 지금 이렇게 온 것도 그렇고!”
티스베는 그 말에 눈을 한 번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연회가 있었던 날. 나를 본 거죠?”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나무랄 생각 없으니까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그 광경을 봤더라면 충분히 그런 오해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뿐이에요.”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고는 비가시화 상태로 만들어 둔 성좌들을 다시 눈에 보이게끔 가시화했다.
순식간에 나타난 푸르스름한 형체들을 본 에스텔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에스텔. 그날 이런 것들을 봤죠?”
“네, 네! 그게 뭔가요? 마물인가요?”
에스텔의 말에 성좌들이 버럭 짜증을 냈다.
[감히 이 몸을 하찮은 마물 나부랭이로 착각하다니!]
[나빠! 마물은 조금도 귀엽지 않다구!]
하여간 시끄럽기는.
티스베는 손을 내저어 성좌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에스텔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건 마물이 아니라 신성력과 마법의 한 종류에요. 설명하자면 복잡하지만, 신성력과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별거 아닌 일이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무척 대단한데요……?”
티스베가 가볍게 웃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신전에만 가도 아주 많을 거예요. 조금도 특별하지 않아요.”
확고한 티스베의 말에 에스텔은 혼란스러워졌다.
여태껏 그녀는 티스베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능력을 알지 못해서 본인이 성녀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직접 만나 본 티스베는 자신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본인의 능력이 특별하지 않다고 했지만, 적어도 이 사실이 밝혀지면 사교계가 또다시 한바탕 뒤집힐 거라는 것 정도는 확실하다.
신성력이나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그러면 티스베를 향한 비방도 줄어들 테고, 그녀가 성녀가 아니라는 말들 또한 금세 사라질 텐데.
“왜…… 능력을 숨기시는 거예요?”
에스텔의 물음에 티스베는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런 질문을 들을 줄 알았지.’
상황이 예상한 범주 내에서 흘러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조금 착잡한 일이기도 했다.
예상한 일을 피해 갈 수가 없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해야만 하는 일이다.
“에스텔. 예전에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해요?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네, 기억해요. 하지만…… 이게 정말 제자리를 찾아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 아무리 생각해도 성녀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마물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에스텔이 아니라면 누가 성녀를 하겠어요?”
“그거야말로 정말 별거 아닌 일인데요……. 무엇보다 제가 보기엔 공녀님이 그 자리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걸요.”
“당연하죠! 난 이 자리에 오래 있었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에스텔도 이 자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예요. 날 믿어요.”
날 믿어, 에스텔.
난 네가 훌륭한 성녀가 돼서 대륙에 닥친 재앙과 당당히 맞서는 걸 본 사람이라고.
물론 책에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시기의 에스텔은 아직 햇병아리이긴 하지.’
갓 상경해서, 세상을 두려워하는 햇병아리 시골 아가씨.
그러니 내가 조금 도와주어야지.
티스베는 활짝 웃으면서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에스텔의 두 손을 잡았다.
“자신이 성녀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면 우선 행동해 봐요, 에스텔. 뭐든 한 발짝 나아가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은 두렵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그건…… 공녀님의 경험담인 건가요?”
“그럼요. 정 두렵다면 내 손을 잡고 함께 나가요. 성화를 붙이러 가는 길은 내가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티스베의 격려에 에스텔의 눈동자에 의지가 들어차는 것이 시시각각 보였다.
바로 이 점이 에스텔의 좋은 점이었다.
유약한 성정에 걱정도 많고 겁도 많지만, 용기를 내어야 할 때가 되면 주저하기보다는 행동하는 걸 선택하는 성장형 주인공.
그게 에스텔이었으니까.
어느새 단단한 표정이 된 에스텔이 굳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공녀님 말씀대로 용기를 낼게요. 저, 성역으로 가겠어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좋아요.”
티스베가 싱긋 웃곤 몸을 돌려 저들끼리 티격태격하고 있는 성좌들에게 손짓했다.
“염소자리, 마차에 자리를 하나 더 만들어줘. 에스텔 양과 함께 성역으로 간다. 물고기자리, 다리를 놓을 수 있지?”
[응, 응! 맡겨 줘!]
[저놈 따위가 없어도 내 마차는 하늘을 달릴 수 있다!]
두 성좌는 경쟁하듯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머잖아, 티스베와 에스텔 주변의 마나가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에스텔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조심스럽게 떴다.
그러자 열린 창문 너머, 은하수를 옮겨온 듯 반투명한 다리가 어디론가 쭉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한, 성좌들처럼 푸르스름하지만 뚜렷한 형태의 마차도.
뚜껑이 없는 이인승 마차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마차를 끄는 게 말이 아니라 반인반수 형태의 염소자리라는 것 정도였다.
순식간에 나타난 풍경에 에스텔은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러나 티스베는 이런 것이 익숙한지 태연히 마차의 문을 열 따름이었다.
“뭐 해요, 에스텔? 어서 타요! 성역까지는 갈 길이 멀다고요.”
“타, 탈게요!”
에스텔은 서둘러 티스베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사실 마차라기보다는, 허공에 올라탄 느낌에 가까웠다.
‘허공에 올라타다니.’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개념이란 말인가.
에스텔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공녀님, 이 능력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맞나요? 역시 이걸 사람들에게 밝히면…….”
“아, 그러고 보니 그 말을 안 했네요.”
“무슨 말이요?”
“내가 왜 사람들에게 이 능력을 밝히지 않는지.”
티스베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나, 망명할 생각이거든요.”
“네?”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떠나려고요. 이 정도 능력이면 어디 가서든 밥은 먹고 살겠죠. 그런데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게 들통 나면 분명 쉽게는 안 보내 줄 것 같아서요.”
“아, 아니-”
그래도 되는 건가? 이분은 공녀신데? 망명?
무엇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에스텔에게, 티스베가 마지막을 날렸다.
“참, 이거 에스텔한테만 알려 준 거니까. 비밀이에요?”
“네???”
“그럼 출발하죠!”
“꺄악!”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빠르게 출발했다.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제 방 창문을 바라보며 에스텔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내가 과연 잘 선택한 게 맞을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그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을 질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