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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47화 (47/121)

47화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건국제 당일.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요. 듣고 계십니까, 아가씨?”

“그래. 듣고 있어. 그러니까 목소리 좀 낮춰, 마흘론.”

“듣고 있는 목소리가 아니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거 시끄럽네. 킬리안이 보낸 편지가 와서 그래.”

티스베가 시니컬하게 대꾸하며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손길로 편지 봉투를 북북 뜯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화려하게 치장한 상태였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오늘은 건국제였고, 그간 알마스의 만류로 집 안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티스베가 정말 오랜만에 외출을 허락받은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계획을 실행하는 날이기도 하지.’

그녀의 의뭉스러운 파트너는 아주 훌륭하게도 독촉장을 보내 왔다.

티스베에게 조금 전 배달된 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통보는 끝났다. 한두 시간 이내로 다른 귀족들도 이를 모두 알게 될 테고, 신전에서도 조치를 취하겠지. 그러니 되도록 빨리 움직여.]

요약하자면 이 정도.

만약 제법 정성 들여 걱정과 계획에 대한 당부를 담아 편지를 보낸 킬리안이 이 말을 들었더라면 분명 적지 않은 억울함을 표하겠지만, 어쩌겠는가.

킬리안은 여기 없었고 티스베에게 그는 수상쩍은 용의자 중 한 명일 뿐인 것을.

‘하지만 킬리안의 말이 맞아. 좀 빨리 움직이긴 해야겠네.’

티스베는 손끝에서 불꽃을 피워내 편지를 태우며 생각했다.

건국제 당일까지 방에 처박혀 ‘차용’ 연습이나 했더니 그녀의 신성력과 마법 실력은 제법 수준급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재를 가볍게 털어내고, 책상 위에서 여전히 시끄럽게 잔소리를 하고 있는 마흘론의 펜던트를 집어 왔다.

“-더랍니다! 아가씨! 제 말 또 안 듣고 계시죠!”

“알면서도 열심히 말하네.”

“제가 걱정이 되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몇 번을 말씀드려요? 최근 이교도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니까요!”

“알아들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획을 무를 수도 없잖아.”

“괜히 오래 시간 끌지 마시고 최대한 빨리 성역에서 나오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알겠어, 알겠어.”

마흘론이 그 뒤로도 몇 번 더 이교도들이 수상하다, 일을 칠 것 같다고 말했지만 티스베는 무시했다.

‘일도 돈과 사람이 있어야 치는 거지.’

티스베가 알기로 이 시점에 이교도들은 입지가 약했다.

성녀가 마물을 다룰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능력과 함께 나타난 시기이니 어쩌면 당연하다.

<괴물꽃>에서 훗날 일을 치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나중의 일.

지금은 별거 없는 신흥 종교나 다를 바 없는 세력이 그들이었다.

그러니 수상해 봐야 뭐 얼마나 수상하겠는가.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만.’

티스베는 목에 펜던트를 걸고, 어깨에 털 망토를 걸쳤다.

“마흘론. 에스텔이 아직도 집에 있는 거 맞지?”

“맞습니다. 질레트 백작이 혼자 마차를 타고 나가는 것도 확인했고요.”

“좋아. 그럼 가 볼까.”

준비를 마친 티스베가 별들의 이름을 작게 속삭였다.

“알레샤, 델타.”

물고기 자리와 염소자리.

화려한 꼬리지느러미가 달린 금붕어 형체와 염소머리를 한 남자의 형체가 허공에 나타났다.

[나, 나! 나 불렀어?]

[이 몸을 이제야 찾다니. 배가 불렀나 보군.]

“불렀지. 열두 개의 별자리를 다 다루다 보니.”

티스베가 시니컬하게 대꾸하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가 보자고.”

범인을 잡으러.

* * *

에스텔 일레르.

그리고 최근에는 드 칼릭스트라는 이름을 받게 된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누구라도 한 번쯤 돌아볼 만한 아름다운 외모에는 수심이 깊게 서린 채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건국제라 모두가 소란스러운 와중이지만, 그녀 혼자만큼은 침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며칠 째 방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세간에는 단순히 에스텔이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에스텔은 구휼 행사가 끝나자마자 질레트 백작에게 크게 혼이 났다.

“나와 상의도 없이 그런 말을 하다니, 대체 정신이 어떻게 된 게냐! 너 때문에 지금 몇 명이 곤란해졌는지 아느냐! 어서 신전으로 가 용서를 구하고 발언을 정정하거라!”

“상의하지 않은 건 죄송해요. 하지만 발언을 취소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공녀님이 계시잖아요.”

“에스텔, 티스베 공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아니. 공작님께서 저리 강경하시니 아마 큰 문제없이 차기 공작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렇게 입지가 박살 난 공녀가 공작위에 올라 봐야 비웃음을 살 뿐이다. 네가 칼릭스트 공작가에 들어가서 빈자리를 채워 주어야 한단 말이다!”

에스텔의 외숙, 질레트 백작은 성정이 그리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사리에 밝고, 가문에 대한 충정이 깊을 뿐이었다.

그는 제 외조카가 가져올 광영을 기대했고, 또 제가 일평생 몸 바친 가문이 그로써 더욱 비상할 것을 꿈꾸었다.

‘사실 그게 대부분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겠지.’

문제는 에스텔은 도저히 그에 동의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녀님이 신탁의 주인공이에요. 제가 봤어요! 공녀님은 정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계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거라. 네가 잘못 본 거겠지! 공녀님께서 그런 걸 가지고 계시다면 왜 이런 비난에도 침묵하시겠느냐?”

“그, 그건…….”

티스베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도 침묵하는 이유라니.

그건 에스텔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봤는걸.’

황궁 연회장에서, 티스베를 뒤쫓아갔을 때.

살짝 열린 휴게실의 문틈 너머로 에스텔은 똑똑히 보았다.

티스베가 무언가 작게 속삭이자 주변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하더니, 푸른 빛무리와 함께 형체들이 나타나는 것을!

‘그건 착각이 아니었어.’

에스텔은 마나를 기민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나에 담긴 사념들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워낙 시골에서 살았던 탓에 그 사실마저도 최근 신전에서 알려 준 덕분에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에스텔은 어릴 때부터 공기에 섞인 마나의 사념들을 느껴 왔다.

마물들과 소통하는 것 역시 마물이 가진 마나의 사념을 느끼는 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티스베가 무언가의 형체들을 불러낸 순간.

-……아.

에스텔은 휴게실에 기쁨과 반가움이 만연하기 시작한 걸 느낄 수 있었다.

티스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지만, 적어도 에스텔은 알았다.

저 푸르스름한 형체들이 그녀를 몹시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을.

‘마치 내가 마물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어.’

열 살 무렵에 에스텔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길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니 더 깊숙이 들어가고 말았는데, 거기서 마주하고 만 것이다.

어째서인지 모여 있던 마물 무리를.

그 흉측한 형체에 울음이 터진 것도 잠시.

에스텔은 금세 울음을 그쳤다.

-너희…… 훌쩍, 날 반가워하는 거야?

마물들의 마나에 섞인 사념이 자신을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날 에스텔은 마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길을 찾아 숲을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에스텔은 종종 숲으로 마물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그것은 에스텔이 본인도 깨닫지 못한 사이 능력을 개방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성녀님도 나처럼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계실지도 몰라.’

그렇다면 자신이 알려 주어야 했다.

자신이 아니라 티스베가 진짜 성녀라고.

하지만.

“공녀님은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다. 너도 네 생각을 바꾸기 전까지는 아무도 만나지 못할 줄 알거라.”

질레트 백작의 식객일 뿐인 에스텔이 외숙부의 반대를 뚫고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에스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 안에 갇히고 말았다.

건국제가 된 오늘까지도.

‘나 때문에 공녀님이 곤란해지셨으면 어떡하지.’

얼른 만나서 공녀님이 진짜 성녀라고 설명해 드려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막막했다.

고향이 그리웠고, 마물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몰래 찾아와 주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생각이 그 즈음에 이르자 눈물이 비죽 나와, 에스텔은 베개에 고개를 박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똑똑.

똑똑똑.

쾅쾅쾅!

에스텔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었다.

“……?”

하지만 방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창문에서 난 소리 같았는데……?’

하지만 여긴 3층이란 말이야.

생각이 그에 이른 에스텔이 반신반의하며 몸을 돌리자, 창문 밖에서 손을 흔드는 누군가가 보였다.

“고, 공녀님?!”

“창문 열어 줘요! 빨리요!”

바로 티스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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