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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46화 (46/121)
  • 46화

    “뭘 굳이 묻니? 당연하지.”

    “……허.”

    곧장 나온 대답에 킬리안의 입매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현재, 칼릭스트 공저.

    킬리안은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티스베의 편지를 받고 조금 전 그녀를 찾아온 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는 생각에 제법 상쾌한 기분이었는데.

    순식간에 기분을 잡쳤다.

    웃음기가 걷힌 킬리안의 낯에서 불쾌함이 역력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티스베 네가 어쩐 일로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흔쾌히 답장했나 싶었는데. 그렇게까지 살바토르 공작과 약혼 관계를 이어 가고 싶은 건가?”

    “내 약혼자에게 쓸데없는 관심이 많네. 소어는 좋은 약혼자야.”

    “그렇게까지 확신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네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그만, 킬리안.”

    킬리안이 무언가 말을 뱉으려 했지만, 티스베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

    “사탕 뺏긴 어린애처럼 굴지 마. 그리고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파혼은 할 거야.”

    “……뭐? 그런데 왜,”

    “뭐가 왜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파혼이랑, 네가 시켜서 하는 파혼이 같겠냐?”

    티스베가 와락 인상을 구기며 쏘아붙이자 킬리안의 표정이 멍해졌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정해! 네가 할 수 있는 건 권유가 전부야. 나한테 명령하지 마. 내 일은 내가 너보다 잘 알아.”

    그것도 훨씬.

    “그러니까 파혼 말고, 다른 조건으로 거래를 하자는 거야. 그 편이 너에게도 이득이잖아?”

    킬리안의 목적이 처음부터 티스베의 파혼이었다면 이미 달성한 셈이니까.

    ‘교묘하군.’

    킬리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티스베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그럴싸해 보인다.

    심지어는 킬리안에게 더 좋은 조건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속은 빈 알맹이지만.

    ‘거래 조건으로 다른 걸 걸면, 파혼을 하겠다고 말만 하고 하지 않아도 그만이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티스베의 말마따나 현 상황 때문에 곤란한 것도 사실이었다.

    티스베를 만나기 위해 구휼 행사에서 일찍 자리를 떴는데, 그 이후에 에스텔이 이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킬리안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에스텔에게 사람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전하! 일레르 영애께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에스텔 양이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며? 이래서야 행사는 치를 수 있겠어?”

    “그래. 여차하면 성녀가 등장하기 전까지 했던 것처럼 고위 사제를 보낼 거다.”

    “아주 꼴이 우습겠네. 황실까지도 인정한 성녀가 버젓이 있는데, 그 본인을 고작 행사 하나 참여시키지 못하다니. 황실의 권위가 아주 땅에 떨어지겠어.”

    티스베의 빈정거림에 킬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였으니까.

    킬리안이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음만 흘리자, 티스베가 손을 가볍게 튕겼다.

    “내가 에스텔을 설득하는 걸 도와줄게. 너도 날 도와줘.”

    “……속내는 알겠다만, 이번만큼은 거절하기가 힘들군. 에스텔을 데려올 수 있는 건 확실해?”

    “그래. 에스텔이 왜 저러는지 짐작 가는 데가 있거든.”

    무엇보다 나도 에스텔이 저렇게 나오면 곤란하기도 하고.

    티스베가 호언하자, 킬리안이 고민 끝에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을 말해 봐.”

    거래 성립이었다.

    * * *

    티스베의 계획은 이러했다.

    그녀에게 악명을 만들어 주려는 범인이 노릴 만한 상황을 일부러 가장하고, 킬리안이 그걸 몰래 지켜보고 있는 것.

    “요컨대 함정을 파자는 거군?”

    “그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냐. 여태까지 범인들은 늘 비슷한 수법을 보여 왔으니까.”

    “널 모욕한 이들만을 죽인다는 거?”

    “맞아.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게 공공연히 드러난 사람만을 노린다는 거야.”

    바로 그게 핵심이었다.

    티스베를 모욕한 이들만을 노린다는 것은 그저 연막일 뿐.

    티스베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티스베에게 혐의가 돌아갈 게 뻔한 이들만을 노리는 것.

    “그럼 현 시점에서 나와 가장 사이가 안 좋을 사람이 누구겠어?”

    “에스텔 일레르, 드 칼릭스트 양이겠군.”

    “그렇지. 알아보니까 내가 에스텔과 머리채 잡고 싸운 게 아니냐는 말도 있더라.”

    티스베가 시니컬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현재 세간의 관심은 전부 티스베와 에스텔에게로 쏠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황궁 연회에서의 일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이 왕왕 돌고 있는 그들이었는데.

    거기에 에스텔의 선언까지!

    “아주 난리들이 났지.”

    킬리안의 말에 티스베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에스텔과 단둘이, 다른 사람들은 찾아올 수 없고…… 오직 둘이서 오랜 시간을 함께 있어야 하는 곳을 다녀온다고 한다면.”

    네가 범인이라면 이 상황을 노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라면 당장 이 현장을 습격할 사람을 보낼걸.”

    티스베의 말에 킬리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다.

    방금 언급한 ‘다른 사람들은 찾아올 수 없고, 오직 둘이서 오랜 시간을 함께 있어야 하는 곳’이 어딘지 짐작해 버린 까닭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들은 건국제를 앞두고 있고.

    둘째 티스베는 에스텔을 설득해 그녀가 성역으로 성화를 붙이러 가는 걸 도와야 하며.

    마지막으로 성역은 건국제 기간 동안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한다.

    이 세 가지 명제가 모이자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티스, 너 설마…….”

    “그래.”

    티스베가 느슨하게 다리를 꼰 채 입을 열었다.

    “성화를 붙일 때, 내가 에스텔과 함께 성역에 들어갈 거야.”

    “제정신이 아니군.”

    킬리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티스베? 여태 성화를 올리는 건 원칙 상 오직 한 사람만이 자격을 가질 수 있었어.”

    “나도 알아. 당연히 안 되겠지.”

    내 능력만으론.

    티스베는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검지를 세워 킬리안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널 끌어들인 거 아냐? 건국제 주최를 총괄하고 계신 황태자 전하.”

    “다른 거라면 몰라도 이건 안 돼.”

    “왜? 역시 네가 진범인가? 그럴 줄 알았어.”

    “아니, 티스베. 네가 나보다 잘 알지 않아? 성화에 대한 원칙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신전이 정하는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통보해.”

    신이시여.

    킬리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티스베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건국제 이전까지 에스텔을 설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해.”

    에스텔은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 할 테고, 티스베도 할아버지 때문에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상황이니까.

    성좌의 힘을 이용하면 몰래 나갈 수야 있겠지만, 그걸 킬리안한테 밝힐 수는 없다.

    결국 원하든 원치 않든 건국제 당일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셈이다.

    “그러니 네가 할 건 오직 세 가지야.”

    첫째는 건국제까지 성화에 관한 모든 걸 비밀에 부치는 것.

    둘째는 건국제 당일이 되면 신전에 티스베와 에스텔을 들여보내기로 했다고 신전에 ‘통보’할 것.

    마지막은.

    “-사람을 몰래 성역 곳곳에 심어서 혹시라도 범인이 나타날 때를 대비할 것.”

    사실 티스베 입장에서는 이게 가장 중요했다.

    “만약 범인이 나타나서 나와 에스텔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그 사실을 말해 봐야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거야. 그러니 증언해 줄 다른 누군가가 필요해.”

    발언권도 영향력도 강하고, 티스베의 편을 들어줄 이유도 없어 보이는 제삼자가.

    “그게 나라는 건가?”

    “그래.”

    그리고 여기까지가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계획.

    마지막으로는 한 가지 연막이 있었다.

    ‘킬리안이 진범일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니까.’

    방금 그녀는 일부러 제 증언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야 킬리안이 뒤통수를 치고 싶어질 테니까.

    그가 만약 진범이라면 이 계획에서 티스베가 노렸던 대로 그녀를, 혹은 에스텔을 습격한 다음 입을 씻으면 그만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무도 티스베의 주장을 들어 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

    ‘하지만 난 이제 성좌를 다룰 수 있지.’

    성좌의 힘으로 장면을 녹화해서 영상구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단 말씀.

    그러니 킬리안이 뒤통수를 치더라도 영상구를 내보이기만 하면 그만.

    ‘그리고 겸사겸사 에스텔을 만나서 얘기도 할 수 있으니까.’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어때, 킬리안. 이견 있어?”

    “하아…… 있어도 네가 허락해 주지 않겠지.”

    “그럼 없는 셈 치고.”

    티스베가 가볍게 박수를 짝 쳤다.

    계획은 완성되었다.

    불이 붙은 도화선이 빠르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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