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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45화 (45/121)

45화

“난 쓰레기야.”

“그 말 벌써 서른두 번째입니다, 쓰레기 님.”

마흘론의 대꾸에, 자칭 쓰레기 티스베가 소리 없는 절규를 했다.

덕분에 마흘론은 꼭지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에스텔의 ‘나 성녀 아냐.’ 선언 이틀 째.

조금 착잡해하는 경향은 있어도 썩 이상하지는 않았던 아가씨가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하룻밤 사이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보이기에 칼릭스트 공저까지 몰래 들어왔더니.

티스베가 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문제가 있으면 말씀을 해 보세요!”

“네가 이걸 듣고도 날 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해 줄게.”

“안 할게요! 제 주인 욕하는 솔정이 어딨습니까?”

마흘론은 제법 충성스럽게 티스베를 설득했고, 이는 제법 잘 먹혀들었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 같았던 티스베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애써 정신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면…….”

* * *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설명이 끝난 뒤.

마흘론이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한밤중에 소식지에 글이 써진 걸 보고 살바토르 저택에 갔다가. 살바토르 공작님이 자길 이용하라는 말을 했고, 거기에 아가씨는 또 혹했다 이거죠?”

“……그래.”

“그런데 아가씨는 어제부터 살바토르 공작님과 파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어.”

“그런데도 좀 혹해서 공작님을 날름 집어먹을 생각을 하셨다고.”

“…….”

두 사람의 시선이 말없이 허공을 교차했다.

“……쓰레기.”

“……나도 알아!”

“아니, 그 착한 분한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겁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러려던 게 아니라고!”

티스베가 결국 비명을 내질렀다.

에스텔의 ‘나 성녀 아냐.’ 선언 이틀 째.

그리고 살바토르 저택에 몰래 다녀온 지 하루 째.

‘내가 미쳤었지! 어떻게 소어한테 그런 생각을 해!’

티스베는 비로소 평소의 판단력과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지 깨닫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이 일의 연막에는 소어가 티스베의 판단력을 흐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지만, 어쨌든.

“사람을 이용 수단으로 보는 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데!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소어를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거지?”

“쓰레기 님이 잠깐 미쳤었던 게 아닐까요?”

“……마흘론. 싸우자고?”

“제가 집니다. 진정하세요.”

“으으윽.”

티스베의 몸이 기절한 것처럼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마흘론은 그런 제 주인을 조금은 한심하게, 그리고 조금은 안쓰럽게 내려다보았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쇼. 아가씨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압니다. 상황이 개 같은 걸 어쩝니까.”

“마흘론…….”

“그래도 아가씨가 잘못했다는 건 변하지 않지만.”

티스베의 목소리가 촉촉해졌지만, 이어진 말에 감동은 빠르게 부서졌다.

저 녀석한테 위로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티스베는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더라.”

잡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벼랑 끝에 서자 그것이 너무나도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소어를 당겨 오려는 순간 가까스로 이성이 고개를 들지 않았더라면 아마 일을 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토록 죄책감이 드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그를 밀어낸 순간 소어의 얼굴 위로 스쳐 간 실망을 목격한 탓이리라.

정말 글자 그대로 소어의 낯빛이 그대로 훅 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물론 소어에게 그를 거절한 이유를 설명하자 빛이 어느 정도 돌아오긴 했다.

하지만 뭐랄까.

‘전보다 조금 더 매달리는 느낌이 들어서 더 죄책감이 든단 말이지…….’

그 탓에 지금까지도 자괴감에 신음하고 있지만, 어쨌든 어제 일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덕분에 마음을 굳힐 수도 있었으니까.

그녀는 책상으로 다가가 미리 밀봉해 둔 편지를 집어 들었다.

“킬리안에게 이 편지를 전해 줘. 제안을 받아들일 테니, 되도록 빠른 시일 내로 공저를 방문해 달라고. 보다시피 나는 저택에 발이 묶인 몸이라.”

살바토르 공저에는 몰래 찾아갈 수 있어도, 황궁까지 그럴 수는 없다.

킬리안이 칼릭스트 공저로 찾아오면 분명 또 갖은 가십지들이 추측을 쏟아 낼 테지만.

‘에스텔의 문제가 급해.’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가씨, 그러면 파혼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어제 일로 깨달았어. 나는 소어와 결혼할 수 없어.”

아니, 여기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내가 이대로 살바토르 공작 부인이 되면 어떻겠어? 마흘론.”

“개꿀이겠죠.”

“…….”

“아닙니까? 잘생기고 헌신적인 남편에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 부까지 딸려오는데요.”

아니,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인 거라고.”

그래, 바로 이게 문제다. 그녀가 망명하려는 아주 근본적인 이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희대의 악녀니, 사기꾼이니 하는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겠지. 내가 그걸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모두 포기하고 소어에게 기대는 것은 잠시나마 위안을 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티스베를 결코 행복하게 만들지 못할 선택이었다.

그럼 그 원망의 화살은 스스로나 소어에게 향할 테고.

“언젠가는 그 선택을 후회하겠지. 그리고 소어까지도 불행하게 만들 거야.”

혹자는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티스베 역시 이것이 만약 저 혼자만의 일이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소어의 일이잖아.’

소어의 행복을 바란다.

그는 티스베가 만나 본 중 가장 다정하고 순수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혹시라도 제가 약한 마음이 들어 소어의 앞날을 망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 계속 이러느니…… 파혼을 하고 친구로 지내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할 거야.’

어쩌면 망명에 대해서도 얘기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어를 믿으니까.

티스베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데, 편지를 품에 넣은 마흘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가씨.”

“응?”

“지금 파혼하시려는 이유가 그러니까 평판 때문인 거잖아요?”

“평판도 있고, 내 입지도 있고.”

“뭐 그게 그거죠. 아무튼 성녀 뭐 그런 걸로 엮인 것들 때문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면…… 만약. 진짜 만약에 그 문제가 해결되면 어쩌실 겁니까?”

문제가 해결되면?

생각해 본 적 없는 명제에 티스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여태까지와 다를 바 없이 살 수 있다면.’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내가 노력해서 쌓은 것들이 폄훼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글쎄. 그럼 굳이 망명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파혼도요?”

“당연하지. 소어 같은 결혼 상대를 어디서 구해?”

티스베는 픽 웃었다.

이런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제법 편안해진다.

아마 마흘론도 그걸 알고 이런 말을 던진 거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까. 되도록 이번 일이 잘 풀리길 바라야겠지.”

“계획은 정해지신 겁니까?”

“그래.”

티스베가 책상에 놓인 깃펜에 가볍게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깃펜이 둥실 떠올랐다.

이건 얼마 전부터 하고 있는 간단한 마법 연습이었다.

마법 계산식을 이용해, 무엇이든 관통시키는 궁수자리의 능력을 ‘차용’하는 것.

‘자잘한 일에도 성좌를 부르는 건 효율이 떨어지니까.’

성좌의 힘을 빌리는 세 가지 방법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차용은 어느 정도 익혀 두는 편이 좋았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티스베가 팔을 가볍게 횡으로 내저었다.

슈욱!

허공에 가로로 누워 있던 깃펜이 화살처럼 날아가 벽에 걸려 있던 달력에 꽂혔다.

‘건국제’라는 글씨가 적힌 날짜에.

“2주 뒤에 있을 건국제. 그걸 이용할 거야.”

* * *

제국 최대의 축제, 건국제.

여기에는 다른 축제들과 다른 행사가 하나 껴 있었다.

바로 성역이라 불리는 산꼭대기에 있는 성화를 올리는 것.

그리고 그건 여태까지 티스베가 도맡아 해 온 일이었다.

왜냐? 그녀는 성녀니까.

하지만 더는 아니다.

새롭게 등장한 성녀 에스텔이 성화를 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만약!

에스텔이 갑작스럽게 ‘나 성녀 아냐.’라고 선언하지만 않았다면.

“덕분에 신전도 난처하고, 건국제를 주최해야 하는 황실 입장도 난처해졌지. 성화 행사를 책임져야 할 성녀 본인이 계속 거부를 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내가 듣기로 그 행사 준비 총괄이 너라던데, 킬리안.”

“그래서?”

킬리안이 티스베의 말을 끊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점을 이용하시겠다고, 티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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