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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43화 (43/121)

43화

“수고했어, 물고기자리. 이제 그만 들어가 봐.”

[헤헤, 나 쓸모 있었지?]

손가락 세 개 정도 크기의 금붕어가 티스베의 손 좌우를 오가며 꼬리지느러미를 살랑였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

“그럼. 아주 최고였어. 멋진 다리를 놓았잖아.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단숨에 올 수 있었고.”

[으응, 무언가를 잇는 거라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으니까! 또 불러 줘!]

“그래그래. 돌아갈 때 또 부를게.”

티스베는 자꾸만 칭찬을 조르는 금붕어에게 산뜻하게 미소 지어 주고는, 마나를 거두었다.

그러자 금붕어, 물고기자리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어쩐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은 것처럼 보였지만, 어쩔 수 없다.

‘성좌의 역할은 이제 끝이니까.’

조금 전.

티스베는 살바토르 저택으로 왔다.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침 물고기자리를 부르기 좋은 날이었지.’

물고기자리를 불러 칼릭스트 저택의 제 방 창문과 살바토르 저택을 잇는 다리를 만들게 하고, 그 다리를 건너오기만 하면 됐다.

건널 때는 황소자리를 불러 마력으로 만든 마차를 끌게 했고.

거기에 투명화는 덤이다.

그렇게 티스베는 방문 한 번 지나지 않고 소어의 저택으로 올 수 있었다.

‘소어가 어떻게 온 거냐고 물으면 적당히 마법에 대해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소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떻게 왔는지, 그리고 왜 왔는지.

어쩌면 그것은 그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티스베에게는 오늘 소란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소어는 유난하게 친절을 베풀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을 응접실도 아닌 집무실까지 들인 것이 그 첫 번째 증거였다.

“당장 벽난로를 켜 둔 방이 많지 않아서……. 불편하시다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 다른 방을 데우라고 명령해 두었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은 소어는 사람들을 시켜 티스베에게 갖은 물건들을 하나씩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다.

“추우실 테니 우선 이것부터 두르세요.”

첫 번째는 눈이 소복이 쌓인 것처럼 희고 부드러운 담요.

“도수가 그리 높은 건 아니니 한 잔 하시는 게 몸을 데우기 좋을 겁니다.”

두 번째는 따뜻하게 데운 꿀 술과 집어 먹기 좋은 간식들.

“티스베가 머무시기에 이곳은 조금 삭막한 듯하여…….”

그 다음으로는 이 날씨에 찾아보기도 힘든 갖가지 꽃과 장식들이 솜씨 좋게 방 안에 꾸며졌고.

순식간에 티스베의 주변에는 따뜻하고 달콤한, 혹은 폭신한 것들이 잔뜩 쌓였다.

게다가 도대체 언제 준비한 건지, 소어는 데운 돌을 넣어 따뜻하게 해 둔 털 실내화를 손수 신겨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도.

달칵 소리와 함께 조금 상기된 얼굴의 소어가 들어왔다.

“여기, 말씀드렸던 프랄린을 가져왔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사치품과 함께였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티스베가 성좌를 돌려보낼 틈을 만들기 위해 소어에게 일부러 부탁했다는 점 정도지만.

“고마워요. 어서 이리 와서 앉아요.”

“그러겠습니다. 둥지는 마음에 드십니까?”

“아주 안락한데요? 여기서 평생 지내라고 해도 지낼 수 있겠어요.”

“……!”

티스베의 말에 소어의 눈이 조용히 빛났다.

”티스베가 원하신다면 평생 이런 곳을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 농담이에요.”

“저는 진담입니다.”

소어의 말에 티스베가 픽 웃으며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정말요? 내 방도 이렇게까지 호화롭지는 않을 텐데.”

분명 여긴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조금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정적인 방이었다.

마치 돈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정리벽이 있는 학자의 서재 같은 느낌.

그러나 이제 그 서재는 어느 낭비벽이 있는 아가씨가 한껏 사치스럽게 꾸며 둔 휴게실같이 되어 버렸다.

티스베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문득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소어, 혹시 여기 저택에 당신 말고 다른 사람도 사나요?”

“저 혼자 기거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온갖 사치품은 다 어디서 온 거죠?”

다이아몬드와 로즈쿼츠로 꾸민 등불은 그렇다고 치자.

발을 부드럽게 감싸 주는 크림색의 융단과, 다양한 각도에서 별무리 같은 반짝임을 자아내는 보석 가루가 뿌려진 베일 장식도.

심지어 꿀 술과 간식들이 담긴 금 쟁반 손잡이에는 루비가 박혀 있는 것 같지만 그것도 그렇다고 치자. 이 정도 귀중품은 사치스러운 가문에서는 딱히 사치품으로 쳐주지도 않는 물건이니까.

그런데…….

“이 곰 인형, 베르세유 공방 물건 아니에요?”

티스베가 소어가 제법 무신경한 손길로 빈 1인용 소파에 앉혀 두고 간 커다란 곰 인형을 슬쩍 끌어당겼다.

곰 인형의 옷에는 고급 인형만을 취급하는 베르세유 공방의 문장이 박혀 있었다.

곰 인형에 별 취미가 없어 곁눈으로만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뭔가 다른 점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이거…… 한정판 물건인데요?”

코와 눈동자를 청금석으로 박고, 오팔석을 가공하여 꾸민 이 곰 인형은 인형 공방에서 다시없을 걸작으로 단 하나만 만들어 경매에 내놓은 물건이었다.

당시 하도 다양한 귀족 가문에서 저 곰 인형을 사겠다고 덤볐던 터라, 티스베도 대충 이 인형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인형이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되었다는 소식도.

그런데.

“이걸 사 간 게 소어였어요?”

“……그렇습니다.”

“세상에!”

소어와 곰 인형이라니.

그것도 경매까지 해 가며 낙찰 받은 물건이라니?

조금 의외다.

“사실 그렇잖아도 이런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잔뜩 있는 것도 그렇고.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곰 인형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흔히 있는 물건은 아니잖아요.”

설마…….

“소어, 이런 취향이었어요?”

“…….”

맞은편에 앉은 소어의 표정이 조금 착잡해 보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애써 참는 듯한.

완벽하게 알 수는 없어도 지금 이 순간 소어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주 많은 생각이.

그 끝에 소어가 힘겹게 입을 뗐다.

“……혹시 이런 취향인 남자는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설마요. 취향은 취향이죠.”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다양한 수집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소어도 개중 한 명이 아니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

곰 인형 정도면 그리 이상한 취향도 아니고.

하지만 숨기고 싶다면야.

“걱정 말아요. 취향에 대해서는 함구해 줄게요.”

“그…… 음……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소어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착잡해졌지만, 방 안이 어두워 티스베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보다 이런 고급품이라면 꺼내 주기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걸 만져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괜찮습니다. 가지고 싶으시다면 가지셔도 됩니다. 티스베가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드릴 수 있습니다.”

“아끼는 물건 아니에요?”

“당신께 아낄 정도는 아닙니다.”

소어가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른 때였더라면 별다른 생각 없이 저 순수한 청년의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자아내는 호선을 감상했을 티스베지만, 오늘만큼은 불쑥 장난기가 돌았다.

“그럼 나 이거 가질래요.”

“그러십시오.”

“이 보석 장식도.”

“마음에 드셨다니 기쁩니다.”

“저 러그도 마음에 들어요. 테이블도, 소파도. 저 그림도 줘요. 책장에 있는 것도 모두.”

“내일 사람을 불러 전부 옮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저택도 말하면 주겠다는 말이 나올 것 같은 태도에, 티스베가 작게 웃었다.

“내가 달라고 하면 다 주려고요? 안 된다는 말 한 번이 없네요.”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원하신다는데.”

제가 당신께 작은 위안을 드릴 수 있다면.

“제 모든 걸 취하셔도 좋습니다.”

소어의 말에 티스베는 이번에도 웃었다.

“내가 뭘 달라고 할 줄 알고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제 지위도, 재력도.”

원하신다면 저까지도.

말이 끝날 즈음 소어와 티스베 사이의 거리는 조금 전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소어가 거리를 좁혀 온 까닭이었다.

티스베의 발치에 신을 신겨 줄 때처럼 무릎을 꿇어앉은 소어에게서 나직한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티스베.”

제 약혼녀를 올려다보는 청년의 새파란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희열이라 부르기에는 잠잠하고, 욕망이라 부르기에는 다정한.

흔히 유혹이라 부르는 빛깔.

“당신이 오늘 저를 찾아 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실 겁니다.”

당신이 가장 약해져 있는 순간에 기억해 준 것이 나라서.

당신에게 좋은 것들을 안겨 줄 수 있는 기회를.

늘 한 발짝 물러서 있는 당신의 틈을 헤집을 기회를 품에 안은 기분이었다.

“그러니 무엇이든 청하십시오.”

당신이 천국을 바란다면, 나는 내 곁을 제외한 모든 곳을 지옥으로 만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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