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42화 (42/121)

42화

고작 이 말이 뭐라고 이렇게 듣고 싶었을까.

‘정말, 이게 뭐라고.’

미사여구도 필요치 않았다.

어떤 거창한 말들도 필요치 않았다.

그냥 솔직하고 담백한 걱정.

원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더라도, 안부를 여쭙고자 했습니다. 제 주제넘은 행동이 심기를 어지럽혀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답장을 받아 기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습니다.]

소어는 말수가 적었지만 필담을 나눌 때만큼은 조금 거침이 없었다.

아니, 사실 원래도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성격은 아닌 것 같긴 했지만.

필담을 나눌 때면 특유의 조심스러움이나 머뭇거리는 얼굴이 보이질 않으니 더욱 거침없어 보이는 것이리라.

티스베는 일필휘지로 적히는 글씨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어 적었다.

[그렇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면 직접 찾아오지 그랬어요?]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그래요.]

다른 때였더라면 약속도 잡지 않고 찾아오는 걸 썩 달가워하진 않았겠지만.

이런 기분일 때 소어를 보는 거라면 좋았다.

그러니 이건 약간의 변덕이었다.

티스베는 지금 소어가 보고 싶었으니까.

[그렇다면 제가 내일 티타임에 방문하겠습니다. 지난번 말씀 주셨던 디저트 가게의 프랄린을 사 두었는데, 이번 기회에 드릴 수 있겠군요.]

프랄린.

티스베는 그제야 제가 그런 것을 한 번 입에 담은 적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소어와 만나던 중 신문을 보다가 한 광고를 발견했던 것이다.

-오, 여기도 광고를 싣는구나?

-뭔가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까? 티스베.

-별건 아니에요. 요즘 한창 유행 중인 디저트 가게인데, 이곳의 프랄린이 그렇게 맛있다더라고요. 줄을 서서 먹는다나…… 나는 그렇게 기다리는 건 영 취향이 아니지만요.

가능하면 하인을 시켜서 사 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해 그러지 않던 참이었다.

그날도 신문을 보다 광고가 보이기에 말을 했을 뿐,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 잊어버렸었는데.

[소어, 그걸 기억해 준 거예요?]

[지나가다가 우연히 가게가 보여 티스베 생각이 났습니다. 가게가 열기 전이라 다행히 지나가던 길에 살 수 있었습니다.]

아하, 그랬구나.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프랄린을 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겠지.’

티스베는 별 의심 없이 수긍했다.

[줄이 정말 긴 데다 프랄린은 정말 조금씩만 팔아서 구하기가 쉽지 않다던데, 굉장한 우연이네요!]

[티스베가 그 가게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대로 지나쳤을 행운이니, 모두 당신 덕분이지요.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물론이에요, 라는 말을 쓰기 위해 움직이던 티스베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서둘러 ‘물론’을 지우고 새로운 글씨를 적어 넣는 티스베의 입매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소어, 혹시 세레나데 좋아해요?]

* * *(02.18_행인_토_끼3)

‘세레나데라니.’

지고한 살바토르의 주인,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는 제 약혼녀가 남긴 글귀를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조금 날카로울 정도로 간결한 필기체로 적힌 글씨.

[노랫소리가 들린다면 날 위해 창문을 열어 줘요.]

정말 뜻을 알 수 없는 문장이었다.

아니, 짐작이 가서 더 혼란스러운 문장이다.

‘설마 지금 살바토르로 오실 생각이신 건가?’

하지만 지금은 해가 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소어가 알기로는 티스베에게는 통금 시간도 존재했다.

할아버지인 칼릭스트 공작이 꽤 엄하다고 했던가.

어쨌든 오고 싶다고 해서 당장 올 수 있는 입장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소어의 사랑스러운 약혼녀는 결코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민이 길어지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집사, 사용인들이 복도를 돌아다니지 않게 해라. 명하지 않았는데 그림자를 보이는 이가 있다면 다시는 걷지 못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충성스러운 집사가 허리를 숙였지만, 소어는 그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또각, 또각.

복도를 가로지르는 구둣발은 조금 성급했고, 동시에 조금 들떠 있었다.

‘정말 오시는 건가?’

여기로? 그저 나를 보기 위해?

심장이 걸음보다 빠르게 뛰었다.

티스베의 답장이 오기 전까지 그의 낯이 불쾌함으로 지독하게 구겨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놀랍고도 확연한 변화였다.

소어는 오늘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아니, 사실 그는 황궁 연회에 다녀온 이후로 심기가 좋았던 일이 드물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티스베를 두고 떠들어 대다니.’

티스베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들이 도무지 꺼질 줄을 모르고 사방을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렇잖아도 부아가 치밀던 나날이었는데, 오늘 새롭게 들려온 소식이 쌓인 장작더미 같은 그의 속내에 불을 지폈다.

‘에스텔 일레르.’

그 아둔하기 짝이 없고 길거리의 가십지보다도 쓸모없는 여자를 떠올리면 이가 갈렸다.

그녀의 등장 때문에 티스베가 겪은 고초가 몇이던가?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성녀가 아니라는 둥, 그딴 무책임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하다니.

티스베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면 그럴 수가 없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리고 그로써 티스베에게 어떤 말들이 오고 가는지 알게 된 순간.

소어는 진심으로 그 해맑고 역겨운 여자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그가 인내한 것은 그저 어디까지나.

-칼릭스트 공녀께서는…… 별고가 없으신지 알아 와라.

티스베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티스베의 그 상냥함이라면 분명 에스텔 일레르 같은 버러지도 걱정하시겠지.’

이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실까.

여린 분이시니 분명 내색하진 않으셔도 상처를 입으실 텐데.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낮달을 핑계 삼아 펜을 드는 것밖에 없다니.

괴롭고 괴로웠다.

전장에서는 그저 상대를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되었는데, 이제는 섣불리 칼을 드는 것도 티스베에게 해가 갈 수 있다는 걸 알아 버렸다.

그래서 소어는 머잖아 사라질 글씨가 써진 소식지만을 붙잡고 있었다.

제발 티스베가 우연히라도 이 글씨를 보아 주기를 바라며.

티스베가 보고, 단 한 마디라도 글을 남겨 준다면 기쁠 것 같았다.

그것 말고는 더 바라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욕심은 끝도 없군.’

티스베가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이렇게 대중없이 뛰쳐나가는 꼴이라니.

제 꼴이 퍽 우스웠지만 걸음은 착실히 정원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걷는 정도의 보폭이었으나 이제는 거의 뜀박질에 가까워졌다.

그렇게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가볍게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들에서 꽃을 따는 여인들처럼 높고, 비탈을 따라 흐르는 개울물 소리처럼 경쾌한.

‘세레나데?’

유행하는 것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여 소어도 가사 정도는 알고 있는 노래였다.

「달빛 창가에 앉은 종달새를 기억하나요?

그대가 창문을 연다면 정처도 없이 날아가겠죠.

그러나 그 방의 불빛이 내게 길을 열어 준다면

나는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그대에게 날아갈 거예요.

그러니 그대 한밤의 종달새를 기억한다면

청컨대 창문을 열어-」

“-그 품에 나를 안아 주기를.”

홀린 듯 이끌린 소어의 걸음이 노래의 마무리와 함께 우뚝 멈추었다.

밤이 깊은 정원.

아스라한 달빛 속에 그를 돌아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온 건지, 발에 신은 것은 실내화였고 겉옷 안쪽에 보이는 건 척 보기에도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는 실내복이었다.

상황부터 복장까지, 전부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모습.

그러나 그런 사실 따위는 소어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티스베가 정말로 제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을 메워서.

“안녕, 소어.”

창문을 열어 줄 줄 알았더니.

“당신이 내 종달새가 되었군요.”

티스베가 그렇게 말하며 환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며 소어는 새삼, 자신이 그녀의 약혼자라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되새겼다.

행운의 신도 지금 그보다는 불행할 것이다.

하여, 소어는 저도 모르게 맑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서 오십시오, 티스베. 종달새 둥지는 처음 와 보시던가요?”

“부디 안락하길 바라고 있어요.”

“부족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아주 갑작스럽고도 안온한 한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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