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날부로 티스베는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마흘론이 걱정하긴 했지만, 티스베는 강경했다.
“아가씨, 정말로 밖에 안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이번에 실베스터 가에서 청포도 농장을 대대적으로 개방했다던데요. 가면 와인도 청포도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좋아하시잖습니까, 그런 거.”
“가서 뭐 할 건데. 안 가. 와인도 청포도도 저택에서 먹으면 돼.”
어차피 세이즈로 떠나면 저와는 더 연이 없을 것들이다.
사람과 만나는 것이 싫었다.
가서 제게 웃는 낯을 보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는 것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
“전부 지긋지긋해. 당분간 아무도 안 만날 거야. 너도 그런 줄 알아.”
“아가씨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제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있기야 하겠느냐마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말끝을 흐려?”
“이걸 알고 그러시는 건지 모르고 그러시는 건지 헷갈려서 말입니다.”
마흘론은 그렇게 말하고도 조금 머뭇거린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약혼자 분께서 수도로 올라오신다던데, 알고 계시는…… 거죠?”
* *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몰랐다.
하지만 늘 그렇듯 개인의 사정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법.
최소 반년 간은 문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던 티스베의 계획은 그렇게 소어의 상경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
조금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하고, 또 선한 소어.
그는 세상살이에 찌들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티스베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그 미소를 온전히 믿지 못했겠지만, 소어는 달랐다.
‘우리 소어는 천사니까.’
소어는 <괴물꽃>에서도 티스베를 위해 에스텔의 찻잔에 독을 탔다가 잡혀 죽는다.
모두가 버린 티스베를 죽기 직전까지도 믿어 준 사람이었고.
그렇게 고지식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사람의 진의를 뭐 하러 의심한단 말인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소어는 괜찮았다.
‘소어하고는 그때 처음 만난 거기도 하고.’
약혼은 훨씬 일찍 했지만, 소어가 줄곧 전장 혹은 영지에만 있었던 탓에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티스베에게 영향을 딱히 받았을 리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들이 더욱 소어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소어와 함께 있으면 도시의 탁한 공기를 떠나 시골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별것도 없는데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랄까.
‘돌이켜 보면 힘들었던 순간마다 소어에게 위로를 받았던 것 같네.’
이상하리만치 매번 타이밍이 좋단 말이지.
“……소어 보고 싶다.”
훌쩍.
심란한 기분에 마흘론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펜던트도 치워 놨는데.
정작 소어가 보고 싶다니 조금 아이러니다.
다른 때였더라면 누군가를 보고 싶어 했다는 사실 자체를 경계했을 티스베지만,
하지만 티스베는 그런 사소한 것을 따지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언제나 책상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소식지를 집어 들면…….
“……소어?”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갈한 글씨가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티스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날 듯이 책상 앞으로 갔다.
잉크병 뚜껑을 따고 깃펜을 집어 드는 손길은 일사천리였다.
소어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글을 남기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낮달 여문 것이 소슬하여 전하고자 펜을 듭니다.]
낮달이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작성되었을 서신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용서하라는 말도 우스울 만큼 짧은 안부를 묻는 글.
‘하지만 시간을 보면…….’
구휼 행사에서의 일이 수도 전역으로 퍼진 이후의 글이다.
소어가 왜 펜을 들었을지는 굳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마나에서 느껴지는 것도 불안정하고.’
가볍게 마나를 불어넣어 보면, 구름이 잔뜩 낀 것 같은 무겁고 우중충한 기분이 느껴졌다.
아마 자신을 걱정해서겠지.
‘하마터면 발견하지 못할 뻔 했네.’
마침 소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소식지를 꺼내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아찔한데.
하지만 그 덕분에 조금 전까지 우울했던 것도 잊혀 가고 있었다.
당사자인 티스베는 그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였지만.
티스베의 깃펜이 사각거리며 빠르게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약속되지 않은 답장을 용서할 수 있다면 약속되지 않은 편지도 용서할 수 있겠죠. 부디 날 용서해요, 소어. 낮달을 함께 보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이제는 해가 져 버렸군요. 기왕 날 용서할 거라면 이것도 용서 목록에 포함시켜 준다면 더욱 좋을 거예요.]
그러자 문단을 완성하기도 전에 답장이 곧장 돌아왔다.
[약속되지 않은 편지를 쓰면서도 편지가 당신께 닿길 바란 제 마음을 용서해 주시겠다면 저 역시도 기꺼이 용서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낮에 보더라도 밤에 보더라도 달은 늘 같은 하늘에 있으니 같은 것을 본 셈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답장을 기다린 건가요? 덧붙이자면 내게 치하해야 마땅한 것을 용서하는 취미는 없어요. 당신 말대로라면 이번에야말로 우린 같은 것을 보고 있겠군요.]
[저는 가문의 일을 보던 중이었습니다. 잠시나마 당신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어 하릴없이 기쁜 마음입니다.]
소어의 글씨는 거기서 우뚝 멈추었다.
말수가 적은 소어의 성격은 이런 상황에서도 종종 드러나곤 했는데, 개중 하나가 이렇게 글을 적는 도중 멈추는 것이었다.
티스베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고, 시간이 제법 지나서야 다음 문장이 써졌다.
[실례가 아니라면 무얼 하고 계셨는지 제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숙고를 거쳐 어렵게 써 낸 문장이 고작 이것이라니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티스베는 픽 웃고는 펜촉에 잉크를 적셨다.
[당신하고 처음 만났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3년 전에 당신 처음 수도로 올라왔을 때요. 기억하고 있나요?]
[저는 당신과 보낸 시간 중 어느 것도 잊지 못합니다. 수도 외곽에 있는 카페를 빌려 만났지 않습니까. 시각은 세 시 경이었고, 카페 안은 프리지아와 백합으로 꾸며 두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프리지아와 백합이었던가요? 그런 것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그럼 당신 그날 계속 얼이 빠져 있던 것도 기억하겠네요?]
이번에는 대답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주저하는 게 아니라 손이 굳어 버린 건지, 대답 대신 펜촉에서 떨어졌을 잉크 방울이 툭 번져 올라왔다.
그제야 황급히 글씨가 써졌다.
[그걸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기억을 못 해요. 뭘 묻든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10초 이상 걸렸는데.]
그래, 그랬다.
금방까지 뜀박질을 하다 온 사람처럼 얼굴을 붉힌 채.
소어는 제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려워했다.
[아, 그것도 기억나네요. 케이크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어서 꽃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꽃을 잘 먹는다고 대답한 거.]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정말 기억 안 나요?]
티스베가 쿡쿡 웃었다.
-잘…… 잘 먹습니다. 프리지아. 아, 아니. 몽블랑 케이크 말입니다. 그리고 좋아합니다.
-몽블랑 케이크를요?
-……프리지아를.
그렇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해 놓고는 그 사실이 또 부끄러웠는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처음에는 약혼자를 만나라니 의무적으로 나온 자리였지만 대화가 오갈수록 그 순진한 태도에 점점 마음이 풀려 가는 게 느껴졌다.
‘그땐 아주 오랜만에 웃었지.’
첫 단추를 잘 꿴 덕분일까.
그 뒤로도 만남은 늘 즐거웠다.
사람을 만나면 피로를 느꼈던 티스베였지만, 소어를 만나는 건 언제나 가벼운 마음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때는 제가 많이 서툴렀습니다, 티스베. 이제는 그렇게 멍청하게 굴지 않습니다.]
[그럼요?]
[이제는 질문하시는 것에 잘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절 믿어 주십시오.]
[그래요? 그럼 오늘 왜 편지를 썼는지 알려 줘요.]
[낮달이-]
소어의 변명 위로 티스베가 죽 선을 그어 지워 버렸다.
[낮달이 새삼스러웠다는 말 말고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티스베는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작은 꽃을 몇 개 그렸다.
‘아마 곤란해 하고 있겠지.’
그녀도 이것이 제 작은 심술임을 알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녀는 원래도 성격이 그리 좋지 못한 편인 것을.
끝내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감히 당신을 걱정해서.]
티스베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