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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40화 (40/121)

40화

사실 그랬다.

티스베는 어릴 때부터 망명을 계획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에 남는 것 역시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왜냐면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의 삶은 좀…… 괜찮았으니까.

공녀라는 지위와 부에,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살 만한 외모와 타고난 재능까지.

물론 부모님을 일찍 여읜 귀족 아이가 주변 친척들의 등쌀에 희생되는 경우도 있다지만.

‘난 할아버지가 있으니까.’

누구도 티스베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티스베에게 친절했다.

제게 늘 웃는 얼굴을 보이는 사람들과 조금 외롭긴 해도 나쁘지 않은 생활을 누리며 어린 티스베는 생각했다.

‘내가 빙의한 이상 책이 꼭 원래대로 흘러가리라는 법은 없잖아?’

어쩌면 여주인공인 에스텔이 등장한 이후에도 칼릭스트 공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성녀라는 지위만 빼면 전부 원래 내 것이 맞잖아.

‘따지고 보면 책에서 내가 죽는 것도 어디까지나 내가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인 거고.’

그러니까 그냥 착하게 살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독을 먹고 쓰러지기 전까지는.

범인은 언제나 티스베에게 꿀을 탄 우유를 전달해 주던 하녀였다.

-귀여운 우리 아가씨. 많이 드세요.

하고 우유를 먹는 티스베가 귀엽다며 연신 웃던 친절한 하녀.

그녀가 왜 제게 독을 먹였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하녀는 끌려갔고, 알마스는 모든 사용인들에게 입단속을 시켰으니까.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어린 티스베는 혼자 되뇌어 봤지만 대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티스베는 사방을 적으로 둔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성녀이면서 신전에 속하지 않고, 귀족 가문인 칼릭스트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성녀라는 정당성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신전에서도 귀족들 입장에서도 그녀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웃는 얼굴로 다가온 사람은 돌아서서 티스베의 그림자에 침을 뱉었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알고 보니 티스베의 후광을 깎아내리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런 경험이 대체 몇 번이었던가?

티스베는 침대에 옹송그려 누운 채로 텅 빈 눈을 깜빡였다.

‘마흘론을 믿는 데 10년이 걸렸지.’

그럼에도 여전히 마흘론에게 완벽하게 곁을 내어 주지도 못했다.

만약 마흘론의 펜던트를 통해 세이즈에 가서도 수시로 연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마흘론은 여전히 티스베의 망명에 대해 알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지난 20여 년 간은 티스베에게 그저 이 세상에 얼마나 악의가 가득한지 알게 되는 시간일 뿐이었다.

숱하게 입은 상처로 그녀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처참하게 버려질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거기에 가장 일조한 것이 그 두 사람이었다.

알마스와 킬리안.

무엇을 해도 제게 품 한 번 내어 주지 않았던 차가운 할아버지와.

가장 믿고 싶었던 순간에 등을 돌린 친구.

‘이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속이 울렁거린다.

모든 게 기만이고 허상이었음을 알았던 3년 전.

그날.

* * *

“티스베 꽁무니를 왜 그렇게 따라다니냐고? 걔한테는 얻을 게 많거든.”

문틈 사이로 들려온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제 진짜 성격을 알고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사람의 것.

앙숙이나 다름없는 관계이기는 해도 그만큼 유대가 깊었던…….

‘킬리안.’

그날은 그의 황태자 책봉식이었다.

말이 좋아 책봉식이지 사실 피로연이 조금 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은 킬리안이 황태자의 관을 머리 위로 수여받는 것을 보며 티스베는 사람들 속에서 박수를 쳤다.

‘킬리안이 황태자가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감회가 남달랐다.

당연한 사실로 알고 있던 것과 곁에서 지켜보고 눈으로 보는 건 느낌이 다를 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킬리안을 조금은 가깝게 여기게 되어서일지도.

황태자의 관을 쓴 킬리안은 몸을 돌려, 가장 먼저 티스베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미소 지었다. 그렇잖아도 아름다운 어머니를 닮아 수려하기로 유명한 사내의 미소는 여느 때보다도 환했으며, 또한 눈이 부셨다.

“킬리안 전하께서 오늘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어련하시겠어요? 황태자가 되셨으니.”

사람들 역시 그 사실을 눈치 챘는지 수군거렸지만, 티스베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킬리안은 티스베와 이야기할 때면 자주 저렇게 웃곤 했으니까.

그래서 티스베는 피로연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조용히 킬리안을 찾아왔다.

‘여전히 네 인성에는 문제가 있고, 너는 재수 함량이 민물에 든 소금보다도 없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너라면 평생 어깨를 나란히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황태자가 된 걸 축하한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오늘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몇 주 전 눌렌 산맥을 들쑤셔 철 유통망을 끊으라는 조언을 해 주었던 날.

킬리안은 티스베가 던진 구두를 주워 와 손수 구두를 신겨 주었다.

그것은 조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고, 동시에 어떠한 유혹이기도 했다.

-모든 황제에게는 정치적 반려가 있었지. 티스베, 내 세대에서는 그게 칼릭스트였으면 한다.

아주 완곡하고도 직접적인 유혹.

제 앞에 무릎 꿇은 채 느리게 발을 감싸던 사내는 구두를 신겨 주는 내내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그 붉은 시선을 떨어트린 채 읊조릴 뿐.

-네 생각이 궁금해. 답은 천천히 주어도 되니까…… 한 번 생각해 봐. 네 곁에 날 두어도 될지.

티스베는 그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킬리안과 헤어졌다.

그리고 내내 고민한 끝에 다시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 대답을 내어 주려고.

‘내가 미래에 더 이상 성녀가 아니게 되더라도 킬리안은 나와 함께할 거야.’

그러면 굳이 망명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이곳에서도 내 능력을 펼칠 수 있고, 내가 노력해 쌓은 것들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조금 고되더라도 이곳에서 더 살아 볼 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킬리안이 있을 대기실로 향하는 걸음은 들 위를 나부끼는 바람처럼 조금은 대중없었고, 조금은 들떠 있었다.

‘킬리안이 대답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할까.’

그 성격에 그 재수라면 그럴 줄 알았다며 씩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대답이 너무 늦지 않았냐며 타박을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아니면 기쁘다고 온 얼굴로 말해 주는 건 아닐까?

평소답지 않게 굴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그 숱한 생각 중에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화 상대는 보좌관인 것 같았다.

이따금 킬리안을 만날 때 종종 들었던 목소리였다.

“전하께서 칼릭스트 공녀와 각별하시다는 소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저는 또 전하께서 그분을 마음에 두기라도 하신 줄 알았지 뭡니까.”

“내가, 티스베를? 하하.”

킬리안이 부드럽게 목을 울려 웃었다.

늘 듣던, 가끔은 성격이 파탄 난 주제에 목소리만큼은 제법 쓸 만하다고도 생각했던 목소리였지만.

지금만큼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티스베의 호감을 사 두어서 나쁠 게 없잖나. 그녀에게는 정말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거든? 앞으로도 기대가 많이 돼. ‘그’ 성녀시잖나.”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연인을 위해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다가, 결국 상대가 출세하고 나서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이야기.

지금 이 상황에 그 이야기만큼 잘 어울리는 게 또 있을까?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최소한 연인이었다는 거고.

이쪽은 아무것도 아닌 관계였다는 사실 정도일까.

조금 전까지 했던 들뜬 생각들이 진창으로 처박히기까지는 시간이 따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뜀박질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가빴다.

티스베는 그대로 도망쳤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제 방문을 닫고 비로소 혼자가 되어서야 눈물이 났다.

돌아오는 내내 단 한 순간도 눈물을 보일 수 없어 마른 낯으로 구역질을 참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헛구역질을 하며, 허파까지 게워 낼 것 같이 숨을 헐떡이며 티스베는 생각했다.

‘나는, 이곳에 도저히 발을 붙일 수가 없어.’

그저 두렵고 두렵기만 해서 그 무엇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나마 믿을 수 있다고 여겼던, 처음으로 곁을 내어 주고 싶었던 이마저 자신을 그저 이용 수단으로만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제 삶이 모래알로 쌓은 성인 줄 알았는데, 이제 알겠다.

‘소금으로 쌓은 성이었구나.’

비 한 번만 내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보니.

소금기를 먹고 누렇게 죽어 갈 들풀만이 제가 눈물로 쌓은 성이 있었음을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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