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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39화 (39/121)

39화

“나는 네가 에스텔 일레르를 만나는 걸 허락할 수 없다, 티스베.”

“할아버지!”

티스베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알마스의 미간이 설핏 구겨들었지만, 티스베의 안중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기껏 에스텔을 만나러 갈 채비를 다 끝냈는데.

마차를 준비시키려 하자 할아버지가 막아서다니!

심지어는 에스텔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려 한다는 것까지도 설명했는데도 알마스는 강경했다.

“제가 정말로 에스텔 양에게 뭔가 했을 거라고 생각하셔서 이러는 건가요?”

“아니, 네가 뭔가 했든 하지 않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티스베.”

“그럼 왜 안 된다고만 하시는 거죠?”

“네가 지금 움직여 봐야 악의적인 이야기만 더 퍼질 게 분명하다.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그렇게 묻는 알마스의 표정은 조금 지치고, 많이 슬퍼 보였다.

하나뿐인 손녀딸이 진위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기사들로 욕을 먹고 있는데,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이 못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탓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지난 몇 주간 알마스는 내내 티스베에 대한 악의적인 여론을 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왔다.

악의적인 기사를 써내는 가십지들에게 칼릭스트의 이름을 들이대 가면서 위협하기도 했고, 우호적인 기사를 써 달라고 돈을 주기도 했다.

사람을 풀어 일부러 티스베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기도 했지만.

-소, 소용이 없습니다, 각하. 신문사들도 협력을 거부했습니다.

-신전 측에서 신탁을 잘못 해석했다는 책임을 회피하고자 공녀님께 모든 화살이 돌아가도록 여론을 조작하는 것 같습니다!

칼릭스트의 독주를 견제하던 이들과, 신전의 책임 회피로 인해 악의적인 여론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칼릭스트의 이름을 앞세워 그들의 입을 일시적으로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세간의 시선이 바뀔까?

‘애초에 티스베가 신탁의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아이를 그토록 몰아붙였나.’

당시 칼릭스트에 성녀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시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고작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닙니까?

-신탁의 아이니 뭐니…… 대단치도 않군요.

그 날 선 시선들을 쳐내려면 아이가 특별해지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남다르다는 것이 증명되면 모두가 입을 다물 테니까.

실제로 그 전략은 아주 잘 먹혀들었다.

아무리 신성력이 없다고 한들 세 개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다섯 살 아이를 두고 누가 비범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녀님께서 영특하시다는 소문이 아주 자자하덥니다. 좋으시겠어요, 공작님.

-크흠, 뭐 아이가 타고나길 잘난 것인데 내가 좋을 게 뭐가 있나? 아직도 영 어리기만 해서 볼 때마다 미덥지 못하기만 하네.

-하하, 그렇게 말씀하셔도 입꼬리 올라간 거 다 보입니다. 좋으시면서.

그래, 좋았다.

체면 상 대놓고 예쁘다고는 못 해도 아주 좋았다.

밖에서 티스베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서 하루 종일 이유도 없이 벙싯거리고 다녔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이렇게 될 거였다면 그냥 조금 더 놀게 둘 수도 있었을 것을.

뛰어나지 않더라도 예뻐해 줄 수 있었을 것을.

이런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알마스의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그 사이 장성해 버린 티스베가 너무 의젓하고 의연해서 더 그랬다.

분명 제가 원하던 대로 자랐는데 어째서 이리도 마음이 아픈 건지.

“세간에서는 네가 어떻게 움직이든 분명 물어뜯어 댈 게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먹이도 주지 않는 게 최선이야.”

“하지만, 할아버지. 이대로 계속 놔둘 수는 없잖아요. 제가 에스텔 양을 설득할게요. 그러면 더 떠들 수 없을 거예요.”

“설득하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되느냐?”

“……더 곤란해지겠죠.”

단순히 기사 얘기가 아니다.

에스텔을 설득하지 못하면 이 대륙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은 자명하니까.

망명이고 뭐고 일단 에스텔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티스베의 입장이고.

다른 사람의 눈에 에스텔을 만나러 가겠다는 티스베의 말은 가서 뺨이라도 한 대 치겠다는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혹은 가서 뺨이라도 한 대 쳤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로 보이는 상황이거나.

그리고 알마스는 후자였다.

“티스베. 나는…… 네 보호자를 감히 자청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네게 나는 부모도 어떤 가림막도 될 수 없겠지.”

“……할아버지.”

“네가 내게 기대하는 게 없다는 것도 없다. 어쩌면 네 말대로 널 보내주는 게 널 위하는 선택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널 이대로 보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너무나 명백한 이 상황에서 널 보낸다는 결정을 할 수가 없다.”

티스베의 낯이 일그러졌다.

분노보다는 이 상황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알마스는 무척 괴롭고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도저히 티스베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요?”

사실 전부터 묻고 싶었다.

알마스가 단순히 체면을 차리느라 자신을 강경히 보호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그간 할아버지는 절 신경 쓰지 않으셨잖아요.”

“티스베.”

“원망하려는 게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충분히 제게 많은 걸 해주셨으니까요.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알마스에게 의지해 본 적은 없었다.

이따금 알마스를 마주칠 때마다 알마스는 티스베에게 다정히 말 한 번 걸어 준 적이 없었으니까.

단지 특유의 딱딱한 눈빛으로 한 번 티스베를 훑고 지나쳐 갈 뿐.

그 사실이 딱히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책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버림받았는지는 그녀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변화가 당황스러운 것이다.

“그냥…… 왜 이제 와서 제게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이곳에 수없이 실망한 그 시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나는 망명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조금은 이곳에 발 붙여 보려 노력했을지도 모르는데…….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거역하지는 않을게요.”

티스베는 한참을 서 있다 몸을 틀었다.

정말이지, 복잡한 기분이었다.

* * *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해가 안 되는 일만 일어날 수가 있을까?

킬리안은 별안간 제게 파혼을 요구하질 않나.

에스텔은 자기가 성녀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할아버지는 갑자기 자신을 무척 싸고돌기까지.

‘이중에 에스텔이 가장 이해가 간다는 게 웃기다고.’

나머지는 대체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짐작 가는 바가 아주 없는 건 아니기는 했다.

‘나는 책하고 똑같은 티스베가 아니니까.’

<괴물꽃>에서는 티스베에게 많은 지분을 할애해 주지 않았다.

그녀가 주변 인물들과 어떤 관계였는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티스베가 빠르게 모두에게 버림받는 과정만큼은 확실히 나와 있었다.

“네가 이렇게 자란 건 모두 내 잘못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바로잡아야지. 널 칼릭스트의 후계자위에서 폐하겠다.”

티스베가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하자 알마스는 티스베에게서 등을 돌리고,

“공녀, 아니, 칼릭스트 영애를 내가 도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군. 약혼할 뻔했다고는 하나 우리가 가까이 지냈던 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잖나? 또다시 에스텔에게 그딴 짓거리를 한다면 그땐 내 손으로 그 목을 비틀어 주지.”

남주인공인 킬리안은 말할 것도 없었다.

킬리안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데다 사랑스럽기까지 한 에스텔에게 빠르게 매료되고, 그녀의 숙적인 티스베를 적대했다.

‘애초에 원작에서 킬리안과는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였지.’

그러니 아마 이번에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티스베가 마차에 계란을 던지는 걸 들켜서, 킬리안이 티스베의 진짜 성격을 알지 못했더라면.

‘모르긴 몰라도 할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뭔가 영향을 받은 게 있겠지.’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해가 도저히 되지 않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왜 지금에서야?’

진작부터 이랬으면 혼란스럽지도 않았을 텐데.

티스베는 어릴 때부터 지금의 티스베였다.

그러니 뭔가 그녀에게 영향을 받아서 바뀔 거라면 어릴 때부터 바뀌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진작 뭔가 바뀌었더라면…….

‘나는 여길 떠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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