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티스베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칼릭스트 공작인 알마스의 사촌동생이자 칼릭스트의 장로 중 한 명.
“……노베르 백작.”
티스베의 목소리를 들은 노베르 백작의 낯에 확연한 경멸이 떠올랐다.
척 보기에도 티스베를 탐탁치 않게 보다 못해, 눈엣가시처럼 보는 시선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노베르 백작 역시 장로 중 한 명이었으니까.
꾸준히 에스텔을 입적하고 티스베를 내치라고 목소리를 내던 밥벌레들과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을 터.
노베르 백작이 노골적인 시선을 갈무리하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공녀님?”
“……장로님께서 아실 필요가 없는 일이지요. 최소한의 안부를 묻는 게 아니라면야.”
인사는 어디다 팔아치우고 무례하게 구느냐는 티스베의 말에, 노베르 백작의 미소가 조금 굳어 들었다.
“간만에 뵈어도 여전히 씩씩하시군요. 못 뵌 사이 너무 성숙해지시는 건 아닐지 걱정했는데, 아직 어린 치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할아버지의 기상을 흠모하여 많이 배웠지요.”
“하하…… 그래도 이제는 성인이 되셨으니 조금은 자중하는 면모를 갖추셔도 좋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드는군요. 늙은이의 말이 영 쓸데없어 보여도 귀담아 들어 나쁠 것이 없답니다.”
“그럼요. 제가 귀담아 듣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물론 나이만 먹고 제 배만 불릴 줄 아는 늙은이의 헛소리가 아니라 충분한 지혜와 학식을 갖춘 분의 고견일 때의 얘기겠지만.”
결국 노베르 백작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지금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어머,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설마, 백작이 나이만 먹고 제 배만 불릴 줄 아는 늙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저는 후자를 생각했는데.”
티스베가 태연하게 대꾸하자 노베르 백작의 낯빛이 붉어졌다.
‘건방진 년…….’
‘……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이군.’
놀랍지도 않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티스베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장로들이란 대개 직계들과는 대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금 의아하네.’
할아버지가 그나마 무르게 대하는 사람이 노베르 백작이라, 현재 그는 칼릭스트 장로들의 수장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였다.
그만큼 쉽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여기까지 올 정도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나?
티스베가 의문할 찰나, 결국 표정 관리에 실패한 노베르 백작이 버럭 소리를 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공녀님께서는 마음 편히 밖을 돌아다니시다니, 정말 대단도 하십니다! 칼릭스트의 명운 따위는 정말 고려치도 않으시는군요! 본인이 칼릭스트의 후계자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 겁니까!”
매서운 질문이었지만, 티스베는 태연했다.
“백작.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좀 진정하지 그러세요? 나이도 있는데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제게 괜한 혐의가 하나 추가되는 거 아닙니까?”
“이, 이런 경우 없는……!”
“아, 경우라 하니 생각이 났는데. 최근 나이가 들면 어법을 제일 먼저 망각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더군요. 공녀에게 감히 인사도 하지 않고, 이렇게 대뜸 소리부터 쳐 대는 백작을 보니 그 연구가 사실인 듯하여 무척 마음이 쓰이네요.”
건강을 보중하시길.
하고 덧붙이곤, 티스베는 살짝 고개를 꺾어 우아하게 인사하며 그를 지나쳐 갔다.
“허, 허…… 허허……!”
덕분에 노베르 백작은 졸도하기 직전이 되었다.
‘이쯤이면 됐겠지.’
늘 이 정도 대거리질을 하면 씩씩거리며 돌아가는 게 장로들이었다.
그러나.
“공녀님은 정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그리고 이어진 말에 티스베의 낯 또한 노베르 백작의 것과 비슷해지고 말았다.
“에스텔 일레르가 본인이 성녀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칼릭스트에 입적은 물론이거니와 세례까지도 거부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 * *
“에스텔 일레르의 일이라면 사실입니다. 제게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소식이고요.”
마흘론의 그림자를 가둬 둔 결정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흘론 역시 얼떨떨한지, 영 중심이 없는 투였다.
“오늘 있었던 신전 행사가 끝나고 선언한 내용이랍니다. 사람이 워낙 많은 행사라서 소문이 금방 퍼졌다는군요.”
“……구휼 행사 말이야?”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구휼 행사를 다녀온 놈을 만나고 왔으니까……! 으으!”
킬리안과의 대화를 다시 떠올린 티스베가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노베르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직후.
티스베는 곧장 조디악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다.
상황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신전은 발칵 뒤집혔고, 덩달아 불똥이 튄 칼릭스트도 난리가 났다.
노베르 백작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뗀 것만 봐도 답이 나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차라리 여기까지라면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야, 가십지 기자들이 미친 듯이 기사를 찍어 내고 있군요. 석간지에 벌써 에스텔 일레르의 선언은 분명 아가씨의 농간일 거라는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래, 바로 저 부분이 문제였다!
연회장에서 에스텔과 티스베 사이에 사소한 어긋남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수도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왕왕 퍼져 있었다.
성녀와 악녀라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소재란 말인가.
[일레르 영애의 호의에도 안하무인으로 구는 칼릭스트 공녀.]
[칼릭스트 공녀, 일레르 영애와의 알력 다툼.]
[’희대의 악녀’ 칼릭스트 공녀…… 일레르 영애의 눈부신 모습에 시기심 표해.]
가십지들이 달고 나오는 싸구려 헤드라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마구 그날 연회에서의 일을 부풀렸다.
사실은 단순히 티스베가 에스텔을 뿌리치고 나간 것뿐이었지만.
악의적인 기사와 사람들의 입을 몇 번 거치면 그것은 티스베가 에스텔을 시기해 에스텔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내용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에도 티스베가 에스텔을 시기한다는 낭설들은 잔뜩 퍼져 있었으므로, 티스베는 헛소문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적어도 에스텔이 자신은 성녀가 아니라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원래도 퍼져 있던 헛소문이 있어서, 에스텔 일레르의 선언과 아가씨가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거라는 내용이 생각보다 빠르게 퍼지는 모양입니다.”
“미치겠네…….”
상황이 생각보다 빠르게 심각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건, 이것이 정말로 티스베의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노베르의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연회장에서 자리를 뜨기 전에 나눴던 대화.
-그런데 티스베. 에스텔 일레르는?
-에스텔? 에스텔 양을 왜 나한테 찾아? 여기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당신께서 자리를 뜨자 뒤쫓아갔는데, 혹 못 보신 겁니까?
분명 에스텔은 자신을 따라왔다고 했는데, 정작 자신은 그녀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었다.
‘단순히 기우이길 바랐는데.’
이제는 확신에 가까워졌다.
“마흘론. 아무래도 에스텔이…… 날 본 것 같아.”
“예?”
”분명 그날 내가 휴게실에서 성좌를 소환하는 걸 본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어!”
평범한 사람의 시선으로 보자면 티스베가 성녀처럼 보일 건 당연했다.
마흘론조차도 티스베가 성녀가 아니냐고 물었으니까.
‘이거 진짜 큰일 났네…….’
단순히 에스텔이 입적을 거부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문제긴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에스텔은 반드시 성녀가 되어야 했다.
아니, 최소한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래야 마물들과 제대로 교류할 수 있게 되니까.’
에스텔이 마물과 교류하는 것은 마나를 통한 행위였다.
티스베가 소식지에 마나를 불어넣어서 소어의 감정을 읽었듯이, 에스텔 역시 같은 방법으로 마물들과 소통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단순히 감정을 알아채고, 간단한 좋고 싫음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텔에게는 세례가 필요했다.
신전의 세례는 성수를 이용해 마나 친화력을 영구적으로 높여 주는 의식이니까.
‘나는 마나 친화력이 워낙 높으니 받지 않았지만.’
에스텔은 타고난 마나 친화력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다.
단지 마물들의 마나를 느낄 수 있었을 뿐.
하여 에스텔은 세례를 통해 마나 친화력을 올린 이후부터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마물 군단도 만들고, 재앙에 맞서기도 하는 거지.’
그런데 본인이 성녀가 아니라고 세례를 받지 않겠다고 하고 있다니.
“그, 그럼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떡해? 에스텔을 만나서 설득해야지!”
그래야 파혼을 하든 망명을 하든 할 거 아냐!
티스베는 투지를 불태우며 일어났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