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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37화 (37/121)
  • 37화

    정확히 그 순간부터였다.

    티스베가 자신과 상종도 하지 않기 시작한 것이.

    물론 그전에도 그렇게 다정한 관계는 아니기는 했다.

    티스베가 킬리안을 싫어했던 것은 유구한 일이니까.

    그래도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친밀감이 존재했다.

    오랜 시간 서로를 알아 왔고 또 서로를 가장 이해할 수 있다 자부하는 이들 사이의 유대가.

    그러나 황태자 책봉식 이후부터 티스베는 킬리안을 멀리했다.

    티스베가 그를 보는 눈에는 더 이상 친애가 없었다. 익숙함도 없었다.

    그저 타인을 보듯 냉랭한 반응.

    처음에는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나이가 차면서 티스베와는 자주 만날 일이 없기도 했고.

    황태자 책봉 이후 킬리안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에 작은 변화를 눈치 챌 여력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

    안일한 마음이었다.

    ‘저러다 금방 돌아오겠지.’

    과거에도 티스베는 종종 자신과 반드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곤 했으니까.

    그러다 또 시간이 지나면 제게 못 이겨 가까워지곤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여 킬리안이 티스베의 변화를 확신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다.

    연회에서 에스텔을 따라 티스베를 찾아갔을 때.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쩐 일로 여기까지?

    라는 말과 함께 완전한 타인을 대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티스베를 본 순간.

    머리를 치고 가는 깨달음이 있었다.

    ‘아하.’

    날 버렸군, 티스베.

    ‘어쩐지 이런 상황에도 날 찾지 않더라니.’

    그게 날 버렸기 때문이었나?

    뱃속이 부아로 뜨끈해졌다.

    어쩌면 그건 티스베가 조금 전까지 소어와 한없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을 목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 한 번도 제 곁을 떠나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던 상실이 지독하게 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혹은 고작 종마 정도로 취급했던 소어가 티스베의 다정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탓일지도.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만큼은 명확했다.

    ‘살바토르 공작이 없었더라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을.’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주제에 맞지 않게 티스베의 약혼자 자리를 꿰찬 저 자를 티스베에게서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는 것.

    돌이켜 보자면 황태자 책봉식과, 소어가 수도로 올라온 시기는 얼마 차이나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소어가 올라오면서부터 티스베가 그를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두 가지 명제 사이에 있었을 일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놈이 뭔가 이간질을 했겠지.’

    티스베는 처음부터 눈에 띄게 소어를 싸고돌았다.

    그 빌어먹을 내숭을 진짜라고 믿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내숭을 떨어 대는 놈이니, 티스베에게 악의가 없는 척 이간질을 하는 게 뭐 그리 어려웠겠는가.

    처음에는 제가 진실을 말해 봐야 믿지도 않을 것 같기에 내버려 두었다.

    소어가 자신을 위협할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한가?

    ‘나는 다짜고짜 진범이냐고 물었으면서, 살바토르 공작은 의심조차 않는군.’

    내색하지 않았지만 입안이 소태처럼 썼다.

    하지만 이런 일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소어가 그들 사이를 이간질했다면 킬리안 역시 이간질해 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연회장에서 그놈을 도발해 진짜 성격을 알리는 건 아깝게 실패했지만.’

    티스베가 도움을 청하러 자신을 찾아온 이상 얘기가 달라졌다.

    킬리안은 상념을 갈무리하며 상체를 등받이에 기댔다.

    “말했듯 난 널 도울 거야. 하지만 너도 여기까지 온 이상 맨입으로 도움을 받아 갈 생각은 아니었을 테고.”

    “어련하시겠어. 원하는 걸 말해.”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그 이름을 내뱉는 킬리안의 낯에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티스베의 여유마저도 앗아 갔다.

    “그자와 파혼해, 티스베. 조건은 그것뿐이다.”

    * * *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왜 그런 조건을 건 거지?’

    킬리안과의 만남이 끝나고 칼릭스트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티스베는 저 생각을 하며 킬리안과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 티스베는 차마 표정 관리조차 할 수 없었다.

    “……너 제정신이니?”

    “지극히 제정신이지. 그러니까 이런 것도 권하는 거고.”

    여유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그녀와 다르게 킬리안은 태연했다.

    티스베가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냉정하게 말해 현 살바토르 공작은 네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상황이라면 비를 피할 만한 곳은 되겠지. 하지만 넌 고작 비를 피하는 데에서 만족할 사람이 아니잖아.”

    살바토르 공작가. 그들이 누구인가.

    유서도 깊고 규모도 거대해 명문이라 우러름을 받지만, 동시에 수도의 귀족들에게는 늘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가문.

    일개 공국이나 다름없는 부와 세력을 지니고서 북부에 처박혀 권력의 큰 흐름에서는 늘 제외되었던 가문.

    하여 빛 좋은 개살구라고 불리는 가문이 바로 그들이었다.

    “봐줄만한 건 명성과 부밖에 없는데, 칼릭스트인 네가 고작 그런 게 필요할까? 지금이라도 깔끔히 헤어지고 다른 쪽을 찾는 게 낫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내 결혼은 칼릭스트의 장로들이 결정한 일이야.”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어릴 때고.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잖아? 살바토르 공작 본인에게 파혼을 요구한다면.”

    킬리안의 말은 옳았다.

    냉정하게 따져 현재 소어는, 그리고 살바토르는 티스베에게 필요치 않다.

    만약 수도 사교계에서의 안정을 꾀한다면 수도에서 좀 더 영향력 있는 가문을 찾는 게 나았고, 망명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소어와 파혼을 해야 했다.

    그러니 티스베 본인도 조만간 소어에게 파혼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왜 네가 조건으로 내거는 건데?”

    바로 이 지점이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

    “칼릭스트에게서 얻어 낼 게 고작 칼릭스트와 살바토르의 유대를 끊는 것밖에 없어? 다른 거 요구할 게 많지 않아? 칼릭스트에서 독점 중인 동부 채굴권이라거나, 사업 일부, 하다못해 사병이라도-”

    “이야, 그걸 다 계산하고 온 건가? 대단한데, 티스베.”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

    “너야말로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보지?”

    킬리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는 진심인 것이다.

    그 확연한 사실에 티스베는 더더욱 아연해졌다.

    “그럼…… 대체 왜 그걸 조건으로 거는 건데? 네가 이득 볼 게 뭐가 있다고?”

    “별건 아냐. 네가 그깟 살바토르에 얽매여 있는 게 보기 싫거든.”

    “……뭐?”

    “이런 상황에서조차 널 돕지 않는 상대를 계속 약혼자로 데리고 있어야 할까? 난 아니라고 보는데.”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이유가 중요해?”

    킬리안이 티스베의 말을 잘랐다.

    이 문제에 더 이견을 받지 않겠다는 태도.

    “……대체 무슨 꿍꿍이야, 킬리안?”

    “글쎄. 무슨 꿍꿍이가 있든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건 너도 알 테지. 잘 생각해 봐. 난 널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

    그들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 났다.

    뭔가 협상의 여지가 있어야 대화를 나누는 의미가 있을 텐데, 킬리안은 강경했으니까.

    그렇게 티스베는 찜찜한 기분만을 안고 돌아오게 된 것이다.

    ‘소어와 파혼을 하라고?’

    당연히 할 생각이었다.

    여전히 소어의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지만.

    망명하려면 이곳에서의 관계를 어느 정도 정리해놓고 갈 필요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킬리안이 그걸 요구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상한 걸 요구해 놓고는 그게 자신을 위함이라니.

    ‘날 완전히 몰락시키려고?’

    킬리안이 진짜 범인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자길 위한다는 거짓으로 소어와 티스베를 갈라놓은 다음, 오갈 데 없어진 그녀를 완전히 몰락시키려고 하는 것일지도.

    사실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하지만 이런 가설을 생각해 보면서도 킬리안의 장단에 놀아나 줘야 한다는 게 현실이다.

    티스베는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곧 소어와 파혼을 하려 했으니까…….

    우선 에스텔의 입적부터 진행해 보자.

    ‘아무래도 칼릭스트에서 파혼을 요구하는 건 장로들이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소어 쪽에서 파혼을 요구할 수 있도록, 내 입지를 약하게 만들어야지.

    정략 약혼이었던 만큼 내 입지가 약해지면 파혼을 요구하기도 쉬워질 테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시끄럽지?’

    티스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동시에 저택에서 나오던 사람이 티스베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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