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티스베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망명은 고사하고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도 못 하겠는데?
정말이지,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사실 말이 좋아 살인 혐의지.’
워낙 악의적인 기사와 가십지들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여론은 티스베가 범인일 거라고 덮어 놓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사람들 사이에서 먹는 욕을 생각한다면 영생을 누려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티스베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러니 아마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진즉 영장이 발부되어 재판소로 끌려갔을 것이다.
티스베가 아직까지도 멀쩡히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칼릭스트가 티스베를 강경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어.’
상황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티스베에게는 나쁜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손을 써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티스베는 킬리안을 찾아왔다.
킬리안은 현 시점에서 그녀가 추론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으니까.
‘일단 나보다 높은 신분이고.’
이런 상황을 조성하고도 남을 인성의 소유자에, 무엇보다도 동기가 확실했다.
킬리안은 티스베의 몰락을 통해 얻을 것이 많았으니까.
쪼르륵.
티스베의 찻잔에 붉은 찻물이 채워졌다.
킬리안은 나란히 제 것에도 차를 채운 뒤,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차향을 맡은 티스베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설마 이거 에일 차야?”
“그래. 좋은 게 들어왔거든. 향이 좋지 않아?”
“역한데.”
“그래서 좋은 거지.”
“어련하시겠어.”
티스베의 대꾸에 미소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신 킬리안이 입을 열었다.
“사실, 찾아오는 게 좀 늦지 않았나 싶기도 해. 티스베.”
“왜? 이정도면 빠르지.”
“연회로부터 벌써 열흘이나 지났잖아.”
“그러니까 빠른 거지. 내가 널 뭘 믿고 와?”
네가 진짜 범인일지도 모르는데.
의미심장하게 덧붙여진 말에 킬리안이 냉소를 터트렸다.
“티스베, 설마 열흘 간 머리 굴려서 내린 결론이 고작 그거야? 내가 범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쳐들어가서 내 멱살을 붙잡고 물어봐야겠다?”
“그래. 3년 전이었으면 널 반쯤 죽여 놓고 물어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텐데, 참 아쉬운 일이지?”
3년 전은 킬리안의 형이 아직 살아 있을 때였다.
바꿔 말하자면 그때는 티스베가 킬리안을 흠씬 두들겨 패도 괜찮은 신분이었다는 거고.
티스베가 느슨히 턱을 괴며 손끝을 까딱였다.
“네 말대로 열흘 간 머리를 굴려 봤어. 대체 누굴까. 대체 누구기에 칼릭스트의 수사망에도 잡히지 않는 걸까.”
엄밀히 말하자면 티스베가 이용한 건 조디악의 수사망이었지만, 알마스가 남몰래 지시한 수색대 역시 줄곧 허탕을 치고 있었으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한 건 최소한 칼릭스트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일 텐데. 그런 와중에 네가 내 무고를 확신했잖아.”
네가 진범이라도 되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대답해 봐. 킬리안. 난 대답을 들어야겠으니까.”
“하……. 이거 혹시 협박인가?”
“어차피 이대로 진범을 못 잡으면 내가 잡혀갈 텐데, 좀 덜 억울하게 끌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하하! 네가?”
킬리안은 정말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웃더니, 눈가를 훔쳐내며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티스베. 난 네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 알아. 네가 그걸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알고.”
그런데 네가 그걸 전부 땅에 내팽개치고 범죄의 길을 택한다고?
“차라리 내일 하늘이 무너진다는 걸 믿지.”
팅, 킬리안이 찻잔의 끝을 가볍게 튕겼다.
간단한 소음으로 화제를 전환하는 것이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가 아니잖아?”
“그게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하지?”
“네가 그걸 밝혀낼 수 없다는 것.”
킬리안의 두 손끝이 모여들었다.
“티스베. 난 네가 멍청하지 않다는 걸 안다. 이런 일이 생겼는데 네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지. 겉으로는 칩거하는 것처럼 보여도 물밑으로는 최선을 다해 혐의를 벗고자 했을 거다.”
그런데 여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네 능력 밖이라는 거야.”
“……그래, 그렇지. 그리고 칼릭스트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지.”
사실 이게 핵심이었다.
티스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범인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미 범인의 권한이, 그리고 신분이 티스베보다 위라는 건 확실했으니까.
게다가 현재 티스베는 발언권을 상실한 상태.
“그래서…… 네가 말한 도움이 필요해. 날 도와줘, 킬리안.”
티스베의 말이 끝나자 킬리안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살다 보니 네가 나한테 굽히는 날이 다 오는군!”
우위를 점했다는 것을 확신한 승자의 웃음.
“당연히 도와드려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티스베의 부탁이신데. 하하!”
그 호쾌한 웃음을 보는 티스베의 손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움켜들었다.
‘그래, 지금 많이 웃어 놔라.’
그 남모를 움직임은 패배를 견디기 위함이 아니었다.
쾌재를 부르고 싶은 걸 참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사람은 오히려 티스베 쪽이었다.
왜냐고?
이건 다 범인을 잡기 위한 함정이니까!
* * *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티스베는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마흘론,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 능력으로는 범인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아.”
“뭘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그게 됐으면 현장에서 덮치겠다는 생각도 안 했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 하지만 현장에서 덮치는 것도 무리라는 게 밝혀졌잖아.”
마흘론은 엄밀히 말하자면 티스베의 최고 전력이나 다름없었다.
마흘론이 강한 이유는 단순히 암영에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마흘론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다.
“내가 성좌를 다룰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위험 부담이 커.”
그러니 바꿔 말하자면.
“더 이상 범인이 일을 치길 기다렸다가 현장을 덮칠 수는 없어.”
“하지만 다른 방법도 없잖습니까? 다른 문제도 아니고 능력 부족이라면…….”
마흘론이 침음을 흘렸지만, 티스베는 태연했다.
“왜 없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되지.”
“예? 다른 사람을요?”
“그래. 자고로 싸움판에 끼어들기는 싫은데, 끼어들어야만 한다면 용병을 고용하는 법이지.”
“하지만 그건 용병일 때 얘기잖습니까. 이런 일에 누가 끼어들겠다고 하겠어요?”
“누구겠어. 나보다 신분이 높고, 내가 이기든 지든 이득을 볼 사람이지.”
그리고 현재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킬리안 레안드로스.
“내가 이기면 나한테 빚을 지울 수 있을 테니 좋고, 내가 져서 땅으로 처박히면 나와 손을 잡았던 킬리안이 그 누구보다 나를 앞장서서 처단할 수 있을 테니 좋겠지.”
실제로 <괴물꽃>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티스베는 패악을 부리고, 그런 티스베를 앞장서서 처단하며 킬리안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니까.
킬리안 입장에서는 티스베가 이겨도 져도 좋은 게임인 셈이다.
“그러니 내가 손을 내밀면 킬리안은 반드시 잡을 거야. 그런 놈이니까.”
“하지만 이게 만약 킬리안 레안드로스의 농간이라면 어쩌시려고요? 그가 진범일 것 같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더더욱 끌어들여야지. 킬리안이라면 분명 나를 함정에 빠트리려 할 테니까.”
일부러 약한 척 해서 끌어들여서 역으로 함정에 빠트려 버려야지!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냐? 킬리안이 진범이면 함정에 걸릴 테니 좋고, 킬리안이 진범이 아니면 킬리안을 이용해서 진범을 잡을 수 있을 테니 좋고!”
다시 생각해도 정말 천재적인 아이디어였다.
티스베는 마흘론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킬리안을 바라보았다.
‘난 미끼를 던졌고. 넌 그걸 확 물어 버린 거야.’
함정 카드 발동이다, 이 자식아.
뭐? 범인을 잡기엔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나도 알아!
그러니까 순순히 내 양분이 되어 줘야겠다.
티스베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 사이.
킬리안은 웃음을 갈무리하며 팔걸이에 턱을 괴었다.
“그런데 말이야, 티스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네 약혼자는 네 결백을 믿나?”
“소어? 당연하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한데 그렇다면…… 네가 말한대로 범인이 최소한 칼릭스트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고. 네 결백을 믿는 사람이 둘이 되는 것 아닌가?”
티스베의 미간이 좁혀들었지만, 킬리안은 태연히 이어 물었다.
“왜 네 약혼자는 의심하지 않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