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34화 (34/121)
  • 34화

    그제야 소어는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제 나이 정도 되었을까 싶은 앳된 소녀의 얼굴.

    은빛 속눈썹 아래 금안이 유독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쩐지 그 눈동자가 제 것보다 훨씬 노회해 보인다면 이상한 일일까?

    소녀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은 비단 소녀가 은실처럼 길고 부드러운 은발과 꿀처럼 선명한 금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이질감이었다.

    이 나이대 아이에게서 느껴져서는 안 될 기묘한 성숙함과 관조적인 태도.

    표정에서 얼핏 묻어나는 염세와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당당함까지도.

    전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어에게는 그저,

    ‘그렇구나.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구나…….’

    소녀가 비범하고 절대적인 무언가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 즈음에서야 소어는 집사가 칼릭스트의 성녀에 대해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칼릭스트의 성녀가 오늘 신전에 방문한다고 했을 때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직접 만나 본 성녀는 정말, 어딘가 남달랐다.

    -칼릭스트의 성녀님이 그렇게 성숙하시다더군요. 배우는 속도도 남다르고, 이해도도 성인을 훨씬 웃돈답니다. 괜히 성녀가 아닌가 봐요.

    -자네 그런 뜬소문에 귀를 기울일 만큼 시간이 여유로운가?

    -신기하지 않습니까, 공작님. 요즘은 칼릭스트의 성녀를 만나보길 희망하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더군요.

    소어는 집사와 어머니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 역시도 귓등으로 들었던 것이나, 이제는 어쩐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을 처음으로 만나 본 인간의 기분이 이랬을까?

    어느새 땅에 떨어져 흙투성이가 된 성물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이 성스러워 보이는 소녀가 전해 준 깨달음이 머리를 왕왕 메울 뿐.

    소어가 홀린 듯이 소녀를 바라보고만 있자, 소녀가 떨어진 성물을 툭툭 털어 주워들었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몰래 들고 나온 건데 이젠 못 먹겠네.”

    “아…….”

    그제야 소어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성물은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저건 절대 입에 넣을 수 없다.

    기껏 도둑질까지 해 가며 가지고 나온 성물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다니.

    소어가 눈에 띄게 풀이 죽자, 소녀가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배가 고팠나. 기죽지 마!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잘됐다.

    소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씩 웃으며 소어의 손을 잡았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까, 내가 해결해 줄게.”

    그렇게 두 사람은 사제실에서 성물을 한가득 훔쳐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녀가 훔치고 소어가 망을 봤다.

    소녀는 소어의 품에 납작한 빵을 미어터지도록 넣어 준 뒤에야 후련한 얼굴을 했다.

    “휴, 이제 됐지? 나는 이만 가 볼게. 나 만난 건 비밀이야!”

    그녀는 멍하니 서 있는 소어를 두고 훌쩍 가 버렸다.

    그러나 소어는 소녀가 제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참 그곳에 서 있었다.

    제 망막에 새겨진 그 눈부신 미소와 신비로웠던 분위기를 몇 번이고 곱씹으면서.

    ‘성녀…… 성녀님.’

    그건 일종의 각인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머릿속에 새겨진 순간.

    소어가 티스베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날의 일이었다.

    * * *

    다시 현재, 황태자궁.

    “웬 성물?”

    뒤에서 들려온 물음에 창가에 서 있던 킬리안이 고개를 틀었다.

    소파에 앉은 은발의 여자가 아이 손바닥만 한 빵을 들고 있었다.

    “별건 아냐. 신전에 좀 다녀왔거든. 한창 구휼할 때라.”

    “알 만하네. 마침 성녀도 공표됐으니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은발의 여자, 티스베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전에서는 민심을 얻기 위해 주기적으로 구휼을 다니곤 했다.

    그리고 구휼에 사용되는 것은 대개 신전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는 납작한 빵, 그러니까 성물이었다.

    구휼 용도로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성물은 사제들만이 다룰 수 있도록 엄격히 관리된다.

    ‘그래 봐야 허술하긴 하지만.’

    어릴 때 성물을 훔쳤던 일이 떠올라, 티스베는 잠시간 더 성물을 바라보다 도로 내려놓았다.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은 성물 따위가 아니라 바로 저기 서 있는 킬리안이었으니까.

    킬리안은 커튼을 치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티스베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오늘 날 찾아온 목적이 뭐지? 매번 얼굴 한 번 안 비추시더니.”

    “말은 바로 하지, 킬리안. 나 보고 찾아오라고 그렇게 한 거 아니었어? 연회장에서.”

    “매섭긴.”

    킬리안이 픽 웃었다.

    그러나 부정은 없었다.

    티스베의 말마따나 연회장에서 그녀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한 것도 그였고, 그녀를 자극하고자 일부러 사납게 군 것도 맞았으니까.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킬리안이 의도한 그림이었다.

    도발에 말린 티스베가 자신을 찾아오고, 자신은 그런 그녀를 맞이하는 장면.

    티스베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의도대로 놀아나 준 이유는 간단했다.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

    킬리안이 정말 범인인지, 아닌지.

    * * *

    연회장에서 돌아오고 마흘론에게서 범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지 열흘 째.

    티스베는 여태까지처럼 저택에 발을 붙인 채 동향을 꼼꼼히 살폈다.

    범인이 조디악을 압박하는지.

    혹은 루넷 영식에게 위협이 더 가해지는지.

    하다못해 에스텔이 신전을 다녀오고 구휼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까지도 티스베는 놓치지 않고 확인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잠잠하다고?”

    문제는 그날 이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조디악에도, 루넷 영식에도, 어디에도!

    “이럴 리가 없는데? 마흘론, 너 정보 제대로 안 모은 거 아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조디악을 뭘로 보시고!”

    그래, 이건 조디악의 문제가 아니었다.

    티스베가 놓친 정보가 있다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상황이 이상하리만큼 잠잠할 뿐이었다.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며칠 전의 일이었다.

    별 생각 없이 이렇게 툭 말을 던졌을 때.

    “루시, 저택이 이상하게 조용하구나. 방문객이 없는 거니?”

    “아, 그, 그게…….”

    크게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건만, 하녀는 눈에 띄게 우물쭈물했다.

    그 점이 이상해 캐물어 보자 하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진실을 실토했다.

    “아, 아가씨께서 황궁 연회에 다녀오셨던 날…… 장로님들께서 성녀님의 입적 문제로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전부 맨발로 쫓겨났다.

    “가, 가주님께서 칼까지 꺼내 드셨어요. 다시는 공녀님을 욕보이지 말라고…… 그리고 저희들에게도 절대로 이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하셨고요. 그래서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요약하자면 칼릭스트 공작, 알마스가 에스텔을 입적하지 않겠다고 칼까지 빼 들고 장로들에게 못을 박은 것이다.

    그것도 티스베가 없는 틈을 타서.

    그 어마어마한 기행에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에, 에스텔을 입적하지 않는다고?’

    그럼 나는?

    나는…… 쫓겨날 수 없는 건가?

    ‘이러면 안 되는데?’

    그제야 티스베는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내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다른 쪽은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당연히 할아버지의 행동이 그저 가식일 뿐이고, 에스텔은 곧 입적이 될 거라고.

    하지만 그건 당연한 추론이 아닌가?

    어딜 돌아봐도 티스베가 가문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성녀가 아니었고, 게다가 범죄 혐의까지 가지고 있었다.

    데리고 있어 봐야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할 따름인 골칫덩이.

    ‘그러니 이쯤에서 에스텔을 입적하고 나를 소어와 빨리 결혼시킬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물론 알마스가 그간 강경히 티스베를 지키려는 태도를 취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의 상 내보이는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아니었던 건가?!

    티스베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머잖아 혼란은 확신이 되었다.

    “칼릭스트의 공녀가 이런 애먼 사고에 휘말려 오욕을 당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잡아 내지 못하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앞으로는 칼릭스트의 이름을 내세워 조사해도 좋다! 무조건 이 사망 사고들의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

    할아버지가 이런 명령을 내리는 걸 우연히 목격했을 때.

    “티스베는 내 하나뿐인 손녀다. 그 아이를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티, 티스베?! 호, 혹시 들은 게냐? 큼, 큼!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크흠!”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는 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이야…….’

    큰일 났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