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툭.
남자의 검지가 무신경하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래서, 표적 하나는 놓치고.”
툭.
“그 바람에 계획은 전부 엉망이 됐고.”
툭.
“손바닥까지 베여 왔다.”
남자가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을 느리게 거두었다.
등불로도 완벽히 걷어 낼 수 없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방 안.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살기가 어둠보다도 무겁게 방 안을 짓누르고 있었다.
“조디악을 한 번에 처리하지 못했으니 다시 접근하면 분명 꼬리를 잡힐 테고. 표적을 처리하는 건 이제 물 건너간 셈이군.”
남자, 소어의 일그러진 낯에서 노기 어린 목소리가 사납게 흘러나왔다.
“이 머저리 같은 결과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라스.”
제 이름이 불리자 라스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할 말이 많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분명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려 했습니다.”
“내가 말한 대로?”
“예. 조디악의 수장을 먼저 빈사 상태로 만든 뒤 다른 표적을 유인하려 했습니다.”
“그럼 계획대로 마무리를 했어야지. 이딴 결과를 낼 게 아니라.”
사실 그게 맞는 말이다.
계획대로 했으면 계획대로 목표도 완수했어야 한다.
하지만.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다 죽어 가던 놈이 사라져 있는데 저보고 어떡하라는 겁니까……!’
라스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소어의 계획은 루넷 영식을 죽이고 그 죄를 조디악의 수장에게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라스는 조디악의 수장을 딱 죽기 직전의 상태로 만들었다.
‘차라리 죽이는 게 더 쉽지…….’
죽지 않게 조절하느라 손까지 베였는데!
잠깐 루넷 영식을 유인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놈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고, 결국 계획은 엉망이 되었다.
죄를 덮어씌울 사람이 사라졌으니 함부로 루넷 영식을 죽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라스만 괜히 손 베인 사람이 되었는데.
그걸 전부 설명했는데도 소어가 저런 상태였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서 이 고생을…….’
그러나 이제 와 후회해 봐야 어쩌겠는가?
이미 그는 열다섯 소어를 따라 나갔을 때부터 그에게 저당 잡힌 인생인 것을.
개중에서도 가장 환장할 만한 것은, 불가항력인 상황이었다는 걸 소어가 모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왜 이러느냐고?
‘나도 모르겠다, 젠장할.’
확실한 건 이게 그냥 화풀이라는 것이다.
소어는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쁠 때와 좋을 때의 차이가 명확했으니까.
그런데 라스가 계산하기로 오늘은 소어가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하는 날이었다.
약혼녀를 만나고 왔으니까.
‘그런데 왜?’
왜 만나지 않았을 때보다 더 기분이 나빠 보이는 거지?
소어의 명을 처리하느라 파티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지 조금도 모르는 라스는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어가 이쯤에서 화를 삭였다는 점이다.
쯧, 혀를 찬 소어가 앉아 있던 자세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그래, 밤비둘기가 울었는데 네가 어쩔 도리는 없었겠지.”
밤비둘기.
그것은 그들 사이의 암호였다.
밤비둘기가 울었다는 건, 일이 불가피하게 틀어졌다는 뜻이었다.
부엉이가 울면 일이 계획대로 성공했다는 뜻이고.
“실패에 대한 건 세 달 월급 삭감으로 치겠다. 손이 다 나을 때까지는 근신하도록.”
“너그러운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실로 너그러운 처분이었다.
라스가 허리를 숙이자, 소어가 나가 보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탁.
라스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고요 속 홀로 남은 소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고작 마지막 표적을 처리하는 것에 이렇게 애를 먹을 줄은 몰랐다.’
예상한대로 진행이 되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조디악이 끼어들면서 모든 것이 틀어졌다.
조금 전 연회장에서 티스베가 자리를 떴을 때, 소어는 순식간에 티스베의 그림자를 따라 꽂히는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티스베를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는 덤이었다.
‘감히.’
그렇게 군중 속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는 누가 한 말인지 분간조차 어려워, 범인을 잡아 죽일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소어가 가장 싫어하는 형태의 비난이라는 뜻이다.
‘진작 손을 썼어야 했다.’
루넷 영식이니 뭐니, 그 빌어먹을 놈과 조디악을 치워 버리고 에스텔이 티스베에게 친한 척 다가오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오늘 연회도 훨씬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티스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함께 춤을 추거나 술잔을 부딪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다른 젊은 연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둘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오늘 주고 싶었던 선물을 줄 수도 있었으리라.
소어는 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함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뚜껑을 열자, 큼직한 노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자태를 드러냈다.
마리에트의 저주받은 반지.
흔히 저주받은 반지라고 하면 흉흉한 물건을 떠올리지만, 그건 단순히 극도로 아름다운 물건에 따라붙는 악의적인 낭설 같은 것이었다.
애초에 사람의 이목을 강렬하게 끌 정도의 물건이 아니고서야 저주받았다는 말은 쉽사리 붙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 반지에 붙은 저주는 비참한 사랑의 저주였다.
-이 반지의 첫 번째 소유자, 레이디 마리에트가 반지를 선물해 준 연인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는 다들 아실 겁니다! 비극적인 만큼 매혹적이고, 위험한 만큼 아름다운 물건이죠! 결말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 반지를 지닌 동안은 그 누구보다도 사랑받게 될 겁니다! 어떠신가요? 직접 이 반지의 저주를 끝낼 당사자가 되어 보시는 것은!
경매장의 사회자가 읊던 말을 떠올린 소어가 반지를 꺼내 손 안에서 느리게 굴렸다.
처음 이 반지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그저 티스베가 광고에 무척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회자의 말을 듣고 나니 그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반지의 전 주인들이 전부 자길 사랑하던 이의 손에 죽었다고 했던가.’
레이디 마리에트는 변심한 연인의 손에, 그 다음 주인인 어느 백작영애는 자신이 걷어찬 남자의 칼에 죽었다.
마지막 주인이었던 어느 왕비는 귀족과 간통하던 것이 걸려, 격노한 왕이 아내와 간통한 귀족에게 그녀를 찔러 죽일 것을 명령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입장에 처한 귀족은 명령대로 왕비를 죽였고, 왕은 그 귀족의 목까지 쳐 버렸다.
한 반지에 네 개의 목숨이 지나갔으니 저주받은 반지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소어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반지를 가지고 싶었다.
결국 반지를 티스베의 손에 끼워주더라도 그 주인은 자신임을 명시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저주가 사실이라면.’
자신은 티스베 손에 죽게 될 테니.
죽는 순간까지도 티스베는 제 곁에 있겠지.
물론 저주가 사실이 아니어도 좋았다.
노란 빛을 띠는 보석이 박힌 반지는 티스베의 눈동자와 더없이 잘 어울릴 테니까.
티스베의 곁에 자신을 묶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저주든 뭐든 상관없었다.
‘처음에는 약혼자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점점 만족이 힘들어진다.
소어는 본디 욕심이 없는 성정이었으나, 티스베에 대한 일에서는 늘 적당히를 몰랐다.
처음에는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상을 바라는 자신이 있었다.
포옹을 원했고, 애정 어린 손길을 원했다.
그녀에게 이 지독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속삭이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는 위치를 원했다.
그 고결한 입술 사이로 제 비틀리고 음습한 집착을 흘려 넣어 주고 싶었다.
그녀의 발등에 입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난 제 속내를 찢어발겨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하찮기 짝이 없는 고백을 하리라.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그 누구에게 말 한 번 꺼내 보지 못하고 짝사랑 했노라고.
결코 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해 발끝으로 짓이겼던 마음이 당신의 약혼자라는 행운을 좀먹고 이토록 커져 버렸노라.
당신을 사랑하여 세상 모든 색채를 당신께 저당 잡혔으니 당신께서는 부디 걸인을 가여이 여기듯 나를 가여이 여기어 손길 한 자락만 내어 주기를.
나를…….
‘나를 조금만 사랑해 주었으면.’
의자에 기댄 소어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리 감겼다.
어지러운 머릿속, 과거의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소어가 처음으로 그의 성녀를 만난 날의 장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