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아마 타고나길 공명도가 높았던 게 아닐까.
애초에 티스베는 마나 친화력도 높았다.
신전에서 티스베를 성녀라고 확신한 이유가 그것이었으니까.
전무후무한 마나 친화력이라고 했던가.
뭐, 어쨌든.
“내가 한 번에 성공할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긴, 그렇겠네요. 워낙 옛날 책이잖습니까.”
“그래. 새로운 정보가 추가될 때도 됐지.”
마흘론은 티스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 아가씨는 신성력도 쓸 수 있다는 거죠?”
“그렇지.”
“그럼 아가씨를 성녀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마흘론의 물음에, 일순 정적이 맴돌았다.
“따지고 보면 신탁에서 말하는 건 칼릭스트의 여자아이가 아닙니까. 아가씨는 그 조건에 해당하기도 하고, 마나 친화력도 높고. 신성력도 쓸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성녀라는 이름에 딱 걸맞은 게 아닌가?
마흘론의 질문에 티스베는 생각지 못한 정곡을 찔린 표정이 되었다.
‘생각보다 예리하네.’
사실 티스베라고 이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지적을 예상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티스베는 자신이 성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진짜 성녀에게는 세상을 구할 힘이 있으니까.’
<괴물꽃>의 전개에 따르자면 멀지 않은 미래에 위험이 닥친다.
마법국 세이즈에서 추방당한 흑마법사들이 제국으로 숨어들어 금단의 실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위험한 마물을 만들어 내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마물이었다.
그래서 성녀인 에스텔이 필요한 것이다.
에스텔은 괴물, 즉 마물들과 소통할 수 있고 또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이 경험하고 성장한 에스텔은, 마물 군단을 만들어 그 마물에게 맞선다.
‘완결이 정확히 어떻게 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주인공이니까 아마 큰 문제없이 마물을 해치웠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티스베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능력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니까. 신전이나 세이즈를 가면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많을 텐데, 내가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성녀를 자처하겠어.”
“그렇긴 합니다만…… 좀 억울해서 그럽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억울할 것도 없어. 난 성녀가 아니니까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뿐이야.”
“하지만-”
“그만. 더 말해 봐야 의미 없어. 이미 일이 이렇게 됐는걸.”
티스베가 결국 단호하게 말했다.
그 웃음기 없는 낯 앞에서는, 마흘론도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저런 말을 하는 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킬리안이 티스베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흘론은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가 티스베의 고독을 눈치챈 것은 아니었다.
티스베는 아쉬운 소리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고, 암영이 생기기 전까지는 티스베와 지금처럼 자주 교류하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티스베가 길거리 거지에 불과하던 마흘론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을 때부터 그녀는 그의 주인이었다.
모든 걸 알기 시작한 것은, 지금 그에게 암영 능력을 물려준 스승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마흘론의 스승은 여러 개의 상급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길드 계의 큰손이었다.
또한 마흘론에게 길드에 대한 세상을 알려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스승 밑에서 여러 기밀들을 다루며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보이게 된 것이다.
-……이 가문에서 심은 첩자가 칼릭스트의 성녀를 죽이려 했고…… 미수에 그쳤다고? 이 가문에서도? 이 사람은 또 뭐야. 유명세 때문에 접근한 돌팔이?
티스베가 말하지 않은 일들이 물밑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은 잘 말씀하지 않으시니까.’
단지 짐작과, 물밑에서 다뤄지는 정보로 알 따름이다.
-아가씨, 같이 다니던 하녀가 바뀐 것 같네요?
-아, 전에 있던 하녀는 사정이 있어서 고향으로 내려갔어.
타 가문의 사주를 받고 티스베를 독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발각당해 죽은 칼릭스트의 하녀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의 대화였다.
이런 일을 몇 차례 겪고 나니 마흘론도 알 수 있었다.
티스베가 어째서 모두에게 거리를 두는지.
그래서 그는 조디악을 정보 길드로 키웠다.
부도 지위도 명성도 모두 가진 티스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정보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덕택일까, 마흘론은 명실상부히 티스베의 신임 받는 오른팔이 되었다.
누군가는 조디악의 길드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누군가의 오른팔을 자처한다는 사실을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흘론에게는 조디악의 길드장이라는 지위보다 티스베의 오른팔이라는 사실이 더 가치 있었다.
아무도 곁에 두지 않는 사람의 신임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특별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티스베의 고독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정말 마음 같아서는 망명을 포기하시는 게 어떨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망명을 택했을지 모르는 바 아니니 차마 입을 열 수가 없다.
티스베가 먼저 포기하겠다고 말해 주지 않는 이상은.
마흘론이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티스베가 굳었던 낯을 풀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네겐 미안해. 네 일도 아닌데 이런 일을 겪게 하고.”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아가씨 일이 제 일인데요. 범인을 못 알아내서 그러시는 거라면……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기회는 많잖습니까.”
“아니, 이제 기회는 없어.”
루넷 영식을 죽지 못하게 만드는 건 간단하다.
지금처럼 하면 되니까.
하지만 범인을 잡는 건 얘기가 다르다.
“이번에도 당했는데, 다음이라고 다를까? 조디악까지 압박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니면 조디악의 눈이 두려워서 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나. 사실상 여태처럼 할 수는 없다는 거나 다름없어.”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두면 그대로 범죄 혐의가 아가씨께 생길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망명은 물 건너 간 거나 다름없다.
마흘론의 물음에 티스베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겠지.”
“서, 설마.”
“그래.”
허공에서 티스베와 마흘론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직접 뛰어든다!”
“망명을 포기…… 예?”
마흘론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러나 티스베는 태연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당연하잖아.”
“하, 하지만 방금 기회가 없다고-”
“맞아, 기회는 없어. 여태처럼 한다면. 하지만 내가 뛰어든다면 얘기가 다르지.”
여태까지는 티스베가 가진 능력이 썩 대단치 않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젠 성좌를 소환할 수 있으니까!”
그녀가 일부러 무리해 가며 성좌를 셋이나 다뤄 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가늠할 필요가 있었지.’
그리고 둘까지는 아주 문제없이, 조금 무리하면 셋까지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능력이 있다면 적당한 반경 내에서는 충분히 손을 쓸 수 있어. 네가 다칠 위험도 없으니 일석이조지.”
마흘론은 루넷 영식을 죽게 둘 순 없으니 당분간 사람을 좀 붙여 달라는 티스베의 말을 멍하니 듣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그래도 직접 나서는 건 좀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위험해도 어쩌겠어? 방법이 이것뿐인데.”
그리고 상황이 마냥 비관적이지 않았다.
아니, 비관적이긴 한데…….
그래도 붙잡을 만한 동아줄은 있다.
“이번 일을 잘 이용하는 거야.”
“어떻게 말입니까?”
“일단, 범인이 너를 알고 있다는 건 조디악의 수장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죠.”
“그리고 너랑 몸싸움을 했을 테니 그 흔적이 있을 테고. 그런 것들을 중점적으로 파헤쳐 보는 거지.”
잘 하면 용의선상 안에서 해결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얼른 말해 봐. 최대한 자세하게! 어떻게 생겼어?”
“얼굴은 못 봤지만, 키가 컸습니다. 저랑 비슷했으니까요. 덩치는 저보다 조금 큰 정도고, 좀 특이하게 생긴 단도를 다루었는데…… 그러고 보니…….”
마흘론이 뭔가 생각난 듯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몸싸움을 하던 중 단도를 한 번 뺏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놈의 손바닥을 칼로 그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