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고작 붕대가 감긴 손으로 이상함을 느끼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티스베는 저택의 복도를 지나며 생각했다.
그녀가 칼릭스트 공저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 깊어진 뒤였다.
소어는 티스베와 오래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말과 함께 티스베를 배웅하고 떠났다.
‘늘 상냥한 사람이라니까.’
그 덕분에 소어와 만나고 오는 길은 늘 어딘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마차에 오를 때 본 소어의 수행원, 라스의 손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다녔던 탓이다.
티스베는 의혹이 들면 그걸 굳이 쌓아두는 편이 아니었다.
-저기, 손을 다친 건가요?
-아…… 저번에 대련을 좀 하다가 베였습니다. 별것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녀님.
-그렇군요……. 조심하세요.
라스는 소어가 어릴 때부터 함께 전장을 굴렀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종종 소어와 대련을 하고, 그 와중 부상이 생겼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었더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붕대가 젖어 있었어.’
라스는 금세 손을 말아 쥐어 숨겼지만, 티스베는 보았다.
그의 붕대 군데군데가 얼핏 붉어져 있는 것을.
‘꼭 다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였지.’
시간이 지난 상처라면 피가 산화되어 갈색으로 변해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대련을 하다 다쳤다는 말은 거짓이라는 건데.
‘……내 기우인가?’
고작 소어의 수행원이 조금 다쳤다고 이런 생각이라니.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소어도 별 말이 없었다.
소어가 제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아마 기우겠지.
티스베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널찍한 방 안에는 휘장이 드리운 침대가 보였다.
티스베의 침대였다. 이곳은 티스베의 방이었으니까.
그녀는 조금 전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마흘론을 몰래 안으로 들여 침대에 눕혔다.
물론 공저의 다른 이가 그 사실을 눈치 챘더라면 공저가 발칵 뒤집혔겠지만.
‘안 들키면 문제가 없지.’
애초에 성좌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비가시화가 가능했고, 마흘론을 숨겨서 옮기는 일 또한 염소자리가 완벽하게 해냈다.
티스베 혼자였더라면 상당히 곤란했을 일이 성좌들의 도움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녀는 휘장 너머 마흘론이 외상 하나 없는 상태로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가 맡긴 일을 마치고 저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던 성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했다.
[상태. 안정……. 일어날 거야. 곧.]
[루넷 영식이란 자도 무사히 귀가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몸은 아직 능력의 십분의 일도 사용하지 않았다. 크흠.]
“그래, 수고했어. 다들. 고마워.”
[다음에 또 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군요.]
[인간세계. 오랜만. 즐거웠어.]
[다음에도 이 몸을 찾거라. 대단한 것을 보여 주지!]
티스베는 대답 대신 손을 가볍게 내저어 소환을 풀었다.
그제야 진정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정말 소란스러웠네.’
성좌들이 떠드는 것을 듣다 보니 알게 된 것인데, 아무래도 성좌들이 티스베의 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인 건 인간 세상 나들이가 오랜만이었던 탓인 것 같았다.
물병은 자꾸만 이곳저곳을 기웃거렸고, 궁수는 걸핏하면 세월의 무상함을 떠들어 댔으며, 염소는 자꾸 자신이 뭔가 보여 주겠다는 말을 했으니까.
‘소환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몰랐는데.’
마도서에서는 소환에 대해 기본적인 언급만을 거쳤다.
실질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차용과 강림 정도라면서.
하지만 티스베가 보기엔 마나양만 잘 다룰 수 있다면 아주 재밌는 능력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마흘론이 깨길 기다리며 마도서를 읽기로 했다.
팔락.
책장이 얼마나 넘어갔을까.
“으…….”
얕은 신음 소리와 함께 침대에 있던 이가 몸을 뒤틀었다.
티스베는 책을 옆에 내려놓고, 서둘러 그 곁으로 다가갔다.
“마흘론, 정신이 들어?”
“……아가씨? 여긴……?”
“내 방이야. 네가 도저히 일어나질 않아서 우선 옮겨왔어.”
마흘론은 그 말을 듣고도 통 정신이 들질 않는지 멍한 얼굴로 느리게 눈꺼풀을 오르내렸다.
끔뻑, 끔뻑.
그리고는 퍼뜩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아, 아가씨 방이라고요?! 제가 이런 델 들어와도 되는 겁니까?!”
“쉿! 안 될 거 뭐 있어? 다른 아가씨들은 티파티에서 창문으로 몰래 남자 들이는 방법에 대해서 토론하던데.”
“예?!”
놀랍게도 사실이다.
티스베는 이 꽉 막힌 세계관에서 어떻게 여자들이 그들의 로맨스를 일구어 나가는지에 대해 몸소 체험한 바 있었다.
-세레나데를 이용하는 거예요. 창문을 열어 주오 할 때 살짝! 문을 열어서 옷을 이어 만든 밧줄을 던져 주면!
-어머, 어머! 그러다 들키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아슬아슬한 게 묘미라구요. 해가 뜨기 전까지만 허락된 금단의 만남이 얼마나 짜릿한지……!
……그래. 그런 적이 있었다.
아무튼.
“몸은 좀 어때?”
“아, 그러고 보니…… 상처가 전부 사라졌습니다. 마물도 잠잠하고…….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얘기하자면 길어. 그보다 넌 어떻게 된 거야? 누굴 만났기에 그렇게 된 거고?”
“그것도…… 얘기하자면 깁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 티스베와 마흘론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들은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 * *
긴 대화가 지나고.
티스베가 침묵을 깼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기습을 당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위치를 아주 정확히 알아보더군요. 단순히 간파를 넘어 파훼당한 느낌이었습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도망치는 게 고작이진 않았을 텐데……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 넌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하마터면 목표물을 지키지 못할 뻔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네 목숨이지. 중요한 걸 잃지 않았으니 고개 숙일 이유도 없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앞으로는 표적을 지키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아마 그렇겠지. 그래도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야. 적어도 일전에 만났던 놈과 이번에 널 공격한 놈이 같다는 건 확실해졌으니까.”
마흘론의 암영을 간파한 것도 모자라, 그 파훼법까지 들고 나왔다.
그렇다면 마흘론이 오늘 루넷 영식에게 따라붙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범인이 루넷 영식에게 조디악이 붙어 있는 걸 알면 다시 덤비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던 모양이네.”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더니, 잠시 멈추었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그리고, 내 짐작이 맞다면 아마 널 죽이는 건 목적이 아니었을 거야.”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그래. 상대는 널 알고 있잖아.”
조디악의 길드장인 데다, 은신과 은폐에 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마 범행을 저지르고 너한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겠지. 그래서 일부러 널 도망가지 못하게 공격했을 테고.”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마흘론을 잡아다가 루넷 영식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한다면, 아마 티스베가 신원을 보증한다고 해도 마흘론은 목숨을 구하지 못할 터였다.
아니, 티스베가 신원을 보증했더라면 티스베까지도 혐의를 벗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 만약 그녀가 마흘론의 수습을 하지 못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군요.”
“그러게.”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다.
티스베가 저도 모르게 말을 잃자, 마흘론이 대화를 환기시키려는 듯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 그보다 아가씨께서 별자리를 소환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크으, 제가 그걸 봤어야 하는 건데! 금서를 구하느라 제가 꽁지가 빠져라 뛰어다닌 시간이 다 얼마입니까? 그 노력이 결실을 봤네요!”
“그 노력이 결실을 봤다기엔 이건 경매장에서 구한 거긴 하지만.”
“에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가씨의 능력 발휘에 힘썼다는 것이 중요하죠.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데요. 그렇게 아팠는데 이젠 멀쩡합니다. 어느 신전을 가도 이렇게 치료는 못 할 텐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차용과 소환은 차이가 있으니까.”
권능을 빌어 온다고 해서 다 같은 정도의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차용보다는 강림의 권능이 강하고, 강림보다는 소환이 더 강하다.
“그런데 그러면…… 소환은 되게 힘든 거 아닙니까? 생각해 보면 신전에 가도 말씀하신 형체 같은 건 없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마도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기는 하던데. 성좌와의 공명도가 높아야 하고, 마나 소모량도 극심해서 어렵다고.”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공명도가 높은 사람은 마나 소모량만 해결하면 얼마든지 소환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티스베는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난 괜찮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