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당연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티스베였다.
티스베가 멀리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상 뛰지만 않았다 뿐이지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킬리안은 그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살기를 내뿜던 맹수가 태어난 지 열흘 된 강아지로 변모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마주보아야 했다.
‘조금만 더 자극하면 됐는데.’
아쉽게 됐군. 킬리안이 속으로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이미 소어의 관심사는 티스베에게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티스베.”
당장이라도 킬리안의 멱살을 잡을 듯 그를 향했던 소어의 몸이 티스베 쪽으로 돌아갔다.
티스베는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허억, 헉, 미안해요! 많이, 후우, 늦었죠…… 하아.”
“아닙니다. 친구분과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그럼요.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늦어서 정말 미움받을 뻔 했다니까요.”
티스베가 태연히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친구를 만나기는 무슨.’
죽을 뻔한 친구 살리고 왔다…….
여전히 숨이 거친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 맺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드레스를 입고 달리느라 그런 것으로 보일 테지만, 그건 위장이었다.
마나의 소모로 인한 식은땀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뛴 것이었으니까.
‘성좌를 소환하는 거, 생각보다 힘들기는 하네.’
조금 전.
티스베의 부름에 끌려나온 성좌들은 흔쾌히 그녀의 부름에 응해 주었다.
[기운이 진실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군요. 그대를 돕겠습니다, 필멸자여.]
[이 몸을 필요로 한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볼썽사납지.]
[바보. 싫지 않아…….]
미처 예상치 못한 전개라, 이번에는 티스베도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셋이나 다?”
[감히 이 몸을 거부하는 게냐?]
“그게 아니라, 셋 다 응해 줄 줄은 몰랐어.”
성좌들은 예민하고 까다롭다. 당연히 그들을 현실로 부르는 것 역시 어려울 수밖에 없다.
여차하면 열두 별자리를 모두 부르는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세 성좌 모두가 남아 준다니?
“셋 다 남아 주면 나야 좋지.”
[그러나 필멸자여, 그대에게 남은 마나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거라면 괜찮아. 방법이 있으니까.”
마나가 모자라다는 건 흔히 생명체에 내재되어 있는 마나양을 기준으로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부족하다면 끌어와서 쓰면 되지 않겠는가?
공기 중에도 마나는 널려 있다.
‘내 마나를 필터 삼아서 조금 걸러 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공기 중의 마나를 끌어다 정화해 쓸 수 있었다.
물론 이것도 결국 내재되어 있는 마나가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무한히 마나를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극소량으로 대량의 마나를 쓸 수 있는 방법이니, 고작 성좌 셋쯤 소환했다고 마나가 다 떨어질 염려는 없는 것이다.
물론 티스베가 조금 무리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마나 걱정은 말고, 빨리 움직여야 해. 마침 셋이 됐으니 분업도 되겠네. 잘됐다.”
[뭘 하면 되지?]
“걱정 마, 가장 잘 하는 걸 맡길 테니까.”
그리고 티스베는 그 말을 착실히 지켜 주었다.
[느껴져. 약한 생명력……. 살린다. 죽지 않아.]
열두 성좌 중에서도 가장 치유력이 강한 물병자리에게는 마흘론의 치료를 맡기고.
[그대의 가호가 무색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공격력 면에서 가장 뛰어난 궁수에게는 마흘론이 본래 담당해야 했던 루넷 영식의 경호를.
[이 몸을 고작 파수꾼으로 쓰다니, 건방지군.]
그리고 다방면으로 권능 활용이 가능한 염소에게는 마흘론을 마차까지 옮기고 지키게 했다.
여기서 성좌 소환의 장점이 톡톡히 발휘되었다.
‘별자리를 부릴 수 있다는 건 반대로 내가 자유롭다는 뜻이지.’
별자리의 힘을 빌리는 차용이나, 몸에 직접 깃들게 하는 강림은 시전자가 직접 나서야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환은 성좌들이 현실에 말 그대로 ‘소환’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전자는 마나를 제대로 운용하는 것 외에 어떤 제약도 받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유용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리라.
‘하지만 마나 소모량이 심한 건 사실이야.’
물론 마나가 모자란 건 아니었다. 공기 중에 마나는 넘쳤고, 정화를 위한 마나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마나를 소모해 본 것도 처음이었던 탓에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손실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어쩌다 보니 성좌를 셋이나 부르게 됐지만 다음에는 하나나 둘만 불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크게 일이 터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흘론의 목숨이 정말 경각에 달한다거나, 루넷 영식이 죽어 버렸다거나 하면 정말 난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남아 있다.
범인을 잡지는 못했으니까.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다른 때였더라면 조금 더 상황을 봤겠지만, 지금은 몸을 피해야 했다.
이러다 킬리안의 수작에 말려들어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킬리안은 눈치가 좋아.’
물론 머리도 비상한 축에 속했지만, 킬리안이 위험한 것은 그의 촉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게 있으면 곧잘 잡아채고 제게 유리하게 바꾸어 버리니까.
건수를 잡히지 않으려면 자리를 피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티스베가 숨을 고르고 자리를 뜨겠다는 말을 하려던 찰나.
킬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티스베. 에스텔 일레르는?”
“에스텔? 에스텔 양을 왜 나한테 찾아? 여기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당신께서 자리를 뜨자 뒤쫓아갔는데, 혹 못 보신 겁니까?”
그 말에 티스베의 표정이 얼핏 굳었다.
“날…… 따라왔다고요?”
“그렇습니다.”
“……난 못 봤는데?”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그냥 길이 엇갈렸겠거니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티스베는 휴게실을 간다고 해 놓고, 테라스로 향했으니까.
문제는.
‘마흘론을 치료할 때 휴게실로 들어갔잖아.’
얼떨결에 행선지가 겹쳐 버린 것이다.
티스베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봤나?
티스베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오고 가는 내내 에스텔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조금 수상할 정도로 말이다.
‘……에스텔을 찾아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찰나.
“티스베는 본 적이 없다고 하시니, 파트너인 전하께서 그녀를 찾아보시면 되겠군요.”
소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들 사이를 끼어들었다.
킬리안의 한쪽 눈썹 끝이 슬쩍 올라갔다.
“지금 내가 티스베와 이야기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공작?”
“아…… 함께 있는 자리라, 저도 대화에 함께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무례로 느껴지셨다면 죄송합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소어가 유순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티스베가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에요. 당연히 함께하고 있는 거죠. 킬리안, 소어한테 왜 그래?”
“……오늘 기분이 좀 언짢아서. 괜히 공작에게 화풀이를 한 것 같군.”
킬리안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전히 쌓인 게 많아 보이는 미소였다.
또한 여전히 꿍꿍이가 많아 보이는 얼굴이기도 했다.
‘역시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어.’
아무 죄 없는 소어에게까지 저럴 정도라면 분명 위험할 것이다.
에스텔은 어차피 곧 입적이 될 테고,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니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하면 되겠지.
무엇보다 마흘론에게 일의 경과를 듣는 것도 시급하고.
‘이쯤 연회가 진행됐으면 돌아가도 이상하진 않겠네.’
티스베는 가볍게 연회장을 훑어보고는, 킬리안에게 작별을 고했다.
“우린 이만 가 볼게. 너도 에스텔 양을 찾아봐. 파트너를 오래 혼자 두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벌써 가려고? 나와 좀 더 할 얘기가 있을 줄 알았는데.”
“글쎄, 난 없어. 소어. 가죠.”
“귀가하시려는 거면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부탁 좀 할게요.”
다른 때였더라면 거절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거절하면 소어가 티스베를 배웅하기 위해 그녀가 마차에 올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텐데.
‘지금은 마흘론이 마차에 기절해 있으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
티스베는 시종을 시켜 칼릭스트의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마부에게 먼저 떠나라는 전언을 전했다.
그리고 소어를 따라 살바토르 공작가의 문장이 박힌 마차로 향했다.
대기하고 있던 소어의 수행원이 그들을 보고 꾸벅 인사했다.
티스베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수행원이었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라스, 별 일은 없었나?”
“별 일이 있겠습니까. 밤비둘기나 좀 울더군요.”
“……그래? 수고했다. 그만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충성스럽게 대답한 라스가 마차 문을 열었다.
그에 소매가 조금 밀려나 라스의 손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붕대가 감긴 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