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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28화 (28/121)

28화

그 시각, 1층의 홀.

‘티스베가 늦으시는군.’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위대한 살바토르의 계승자이자 이 연회장에서 유일하게 공작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남자는 다소 감흥 없는 눈으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흔히 귀족들은 반듯한 자세를 고수하는 것에 반해, 벽에 기대어 선 비뚤어진 자세는 오랜 전장 생활이 그에게 남긴 사소한 버릇이었다.

물론 티스베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버릇이지만.

“자세가 비뚤군, 공작.”

“무슨 상관이신지.”

바꿔 말하자면 티스베가 없는 곳에서는 자주 내보이는 버릇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날이 서 있다 못해 선득하기까지 한 대꾸에 킬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티스베가 자리를 뜨자마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모르셨다니 유감스럽습니다.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닐 텐데.”

“뭘 이 정도 가지고? 티스베는 일주일에 한 번씩 널 보면서도 네가 이런 놈인 줄 모르잖나.”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응수하는 킬리안의 말에 소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분 나쁜 놈.’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그가 이렇게까지 반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였다.

‘킬리안 레안드로스.’

그는 티스베 외의 모든 인간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소어에게도 특별히 더 경계 대상이었다.

소어는 아직도 자신이 티스베의 약혼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킬리안과 삼자대면을 했던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야, 그러니까 이 희멀건 게 내 피앙세를 가로채 간 놈이라는 거지?

-네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킬리안. 내가 언제 네 피앙세였다고. 소어, 신경 쓰지 말아요. 원래 헛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이니까.

-왜? 우리가 약혼할 뻔했던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쟤만 없었으면 너랑 내가 손을 잡았겠지.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소어는 처음부터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내 약혼자야. 그러니까 그만 다물어.

그때 소어는 정자세로 앉은 채 티스베가 신랄하게 킬리안에게 쏘아붙이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대체 무엇에 놀라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던 까닭이다.

보기보다 훨씬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이?

아니면 킬리안이 노골적으로 내보이는 적개심?

그도 아니라면, 마냥 상냥하기만 한 줄 알았던 티스베가 저토록 날카롭게 대하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

-후우, 킬리안…… 그러니까 저분은 신경 쓰지 말아요. 어릴 때부터 자주 보고 지냈더니 사람이 격의 없어져서……. 불쾌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편하게 계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질투가 났다.

하마터면 표정 관리를 못 할 정도였다.

‘아니, 못 했다고 봐야겠지.’

그날 티스베가 몇 번이고 어디 불편하냐고 물어봤으니 말이다.

물론 소어가 티스베를 두고 질투나 불안을 느낀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티스베는 소어가 없어도 지나치게 빛나는 사람이라, 언제고 그를 떠날 수 있기에.

사람 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하는 그와 달리 티스베는 사랑받을 가치로 넘쳤다.

주변은 언제나 사람이 가득했고,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인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티스베는 그 유명한 칼릭스트의 성녀였으니까.

상냥하고 다정하며 고결하고 아름다운.

‘나의 티스베.’

티스베가 있으면 똑같은 풍경도 달리 보였다.

그녀의 손에 기댈 때면 제 비루한 인생도 제법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티스베의 걱정을 받을 때면 평생 병자로 살고 싶었다가, 그녀가 웃는 걸 보면 평생 그 웃음을 그리고 싶어졌다.

일평생 크게 신앙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지만 티스베가 존재함에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성녀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니 그것이 신의 올바른 안배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소어에게 티스베는 단순한 짝사랑 그 이상이었다.

그의 마음은 차라리 숭배와 복종에 가까웠다.

소어는 진실로 단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복형의 죽음으로 황태자위를 거머쥐게 된 킬리안을 두고 행운아라고 하지만, 티스베의 약혼자가 되는 행운을 누린 자신보다 더 운이 좋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래, 그건 정말 행운이었다.

그러니 소어는 티스베를 둘러싼 것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티스베가 그 무엇에도 시선을 두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 무엇도 상냥히 대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별수 있나. 그 상냥함마저 사랑해 버린 것을.

소어는 티스베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관용을 베풀었다.

그건 우위를 점한 자의 여유나 다름없었다.

뭘 해도 티스베가 미래를 약속한 사람은 그였으니까.

그는 티스베에게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소어의 앞에 킬리안이 덜컥 등장해 버린 것이다.

그는 소어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어린 시절부터 티스베를 알아왔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부아가 치미는데.

가장 소어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티스베의 태도였다.

-이만큼 경고했으면 알아들어, 킬리안. 연회장으로 돌아가거든 내 약혼자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매정한데…… 네가 이러는 걸 네 약혼자도 아나?

-모르겠지. 내가 너 말고는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티스베는 언제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소어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그녀가 그토록 날을 세워 사람을 대하는 것은 킬리안이 유일했다.

바로 그 지점이 소어가 미치도록 질투심을 느낀 지점이었다.

자신이 티스베의 약혼자라고 해도, 티스베가 정말로 허물없이 대하는 건 킬리안이었으니까.

그래서 소어는 되도록 킬리안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킬리안과 마주해서 좋게 끝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생기는 법.

“티스베가 자리를 뜨면 네가 당연히 따라갈 줄 알았는데, 웬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러는 전하야말로 파트너가 자리를 비웠는데 따라가 보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까?”

“큰 문제가 있어서 떠난 것도 아닌데 내가 뭐하러? 일 없다.”

킬리안이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지극히 냉소적인 대답이었다.

조금 전까지 에스텔에게 무척 다정하게 굴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차마 믿기지 않을 만큼.

소어의 낯빛에 경멸이 스쳤다.

“알아서 하십시오. 되도록 상종하고 싶지 않으니 말 걸지 마시고. 저희가 웃으면서 대화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왜 아니야? 아, 혹시 예전에 멱살잡이 한 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나? 상당히 속이 좁군.”

“그때 속이 넓지 못하신 분께서 제게 시비를 걸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땐 나도 많이 어렸지. 자넨 아직도 어린 모양이고.”

팽팽한 접전에 소어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땐 어렸다는 말씀을 하신다면, 그때 제가 티스베의 약혼자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도 취소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내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동쪽에서 뜨던 해가 서쪽에서 뜨진 않지.”

킬리안이 빙긋 미소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자넨 티스의 약혼자로 어울리지 않아.”

소어와 킬리안이 서로의 본성에 주먹질을 하게 만들어 준 바로 그 말이었다.

킬리안은 과거에도 이 말을 소어에게 똑같이 해 주었다.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세 살 정도 더 어렸다.

소어가 수도로 올라와, 킬리안과 삼자대면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까.

그리고 그때는 주변에 사람도 없었다.

자극을 하기 딱 좋은 장소였고, 그 여파로 한 대 얻어맞기도 딱 좋은 장소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소어는 킬리안 앞에서 티스베에게 했듯 착한 척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건 소어의 본성을 최대한 끄집어낼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킬리안은 일부러 이 말을 꺼내들었다.

‘예상보다 더 사납게 구는군.’

그는 소어를 떠 보는 중이었으니까.

사실 처음 티스베와 소어에게 다가올 때부터 킬리안의 목표는 소어였다.

‘저놈이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줄곧 잠잠한 것이 어쩐지 수상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걸 이용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다행히 킬리안의 방법은 예상대로 적중했다.

소어의 낯이 감출 기색도 없이 일그러졌다.

연회장이라서 드잡이질만 안 했다 뿐이지,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기세.

킬리안을 노려보는 벽안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리고 그때.

“소어!”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목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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