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진득한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뒤에서 끌어안긴 모양새로 결박당했기 때문에, 티스베는 괴한이 체격 좋은 남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힘도 보통 이상.’
얼추 상황을 파악한 티스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충분히 겁에 질릴 만한 상황.
그러나 티스베는 어릴 때부터 살수를 지긋지긋하게 봐 가며 자란 사람이었다.
티스베는 지체 없이 제 입을 틀어막은 손을 콰득 소리 나게 깨물었다.
“큭!”
고통에 결박이 느슨해졌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을 움켜쥐어 제압하려는 찰나.
“아가씨……. 접니다.”
“……마흘론?”
익숙한 목소리에 티스베가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불렀다.
말할 힘도 없다는 듯,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사내가 티스베의 어깨에 툭 제 머리를 기댔다.
그 즈음에는 티스베의 허리를 끌어안았던 팔에도 힘이 풀린 상태였다.
어깨에 와 닿는 온도가 뜨거웠다.
티스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틀어 쓰러지기 직전인 마흘론을 부축했다.
“마흘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하아, 조용히, 하라니까…….”
마흘론이 흐리게 웃었지만, 티스베의 낯은 도저히 펴질 줄 몰랐다.
자세히 보니 마흘론의 상태가 더 나쁘다는 것이 느껴졌던 까닭이었다.
외상도 심각했지만, 마물 때문에 몸이 크게 약해진 것이 보였다.
아마 이 상태로는 티스베에게 그 두 마디를 전달하는 것도 상당한 도박이었으리라.
티스베는 서둘러 마흘론을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와 주실 줄, 큭, 알았습니다……. 하하…… 윽.”
마흘론이 휴게실의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것이다.
줄곧 테라스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티스베가 온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런 마흘론을 보는 티스베의 낯이 일그러졌다.
‘이건 외상이 문제가 아니야.’
줄곧 그림자 마물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몸을 잠식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 증거로, 마흘론의 피부 군데군데에서 혈관이 검어지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치유술을 써 정화하거나 마물을 적출해 내야 했다.
‘하지만 마물을 적출하는 건 위험해.’
적출 과정에서 마흘론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워낙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여기서 더 피를 흘리면 마물을 적출하기도 전에 마흘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치유술.
문제는 그걸 하려면 당장 신관에게 보여야 한다는 점인데.
“……여기서 신전까지 갈 수는 없어.”
안타깝게도 지금의 티스베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빌어먹을.
“방법이 없잖아.”
티스베는 결국 욕설을 짓씹으며 붉어진 눈가를 훔친 뒤, 휴게실의 문을 잠갔다.
지금 하려는 건 그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되는 장면이었으니까.
‘이렇게는 처음 해 보는 거라 과연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따질 시간이 없었다.
제발 성공하길 빌 수밖에.
소파에 자리를 잡은 티스베가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사달멜리크, 카우스, 델타.”
그렇게 흘러나온 것은 듣기에도 생소한 별의 이름들.
차분한 목소리는 얼핏 듣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사실 그에는 막대한 마나가 실려 있었다.
“응답을.”
화악-!
말을 마치자마자 티스베의 손안에서 푸른빛의 광원이 빛을 발하더니, 티스베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느리게 눈을 뜬 티스베의 입가에 희미한 안도감이 서렸다.
‘경매장에서 마도서를 사 두길 잘했어.’
이제 그 효력을 시험해 볼 차례였다.
* * *
신성력과 마력을 포함, 마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책들은 모두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황도 12궁-조디악의 가호가 깃들기를.]
그것은 집필을 시작하는 이들의 첫 마디이자, 어찌 보자면 일종의 기도와도 다름없는 문장이다.
왜냐하면 마나는 황도 12궁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태양의 길이라고 불리는 황도 12궁과 지상을 연결해, 별자리의 힘을 빌어 오는 매개체.
그것이 바로 마나의 정체였다.
단지 시전자가 타고난 별자리의 속성에 따라 각각 여섯 개씩 신성력과 마력으로 나뉠 뿐.
그 두 가지 힘의 뿌리는 결국 같은 것이다.
하여 티스베는 이 문장을 아주 질리도록 읽었다.
처음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된 뒤로, 티스베는 줄곧 그걸 구체화하는 방법을 찾아 헤매 왔으니까.
문제는 아무리 마흘론을 통해 구해 온 금서를 뒤적여도 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티스베가 아무리 노력해도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껏해야 마나를 느끼거나, 마도구에 마나를 불어넣는 게 전부.
이대로는 노력한 보람이 없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제법 쓸 만한 결과를 남겼다.
“제가 만든다는 그 길드 이름, 조디악으로 할까 합니다. 있어 보이잖아요. 아가씨 때문에 자주 봤더니 익숙하기도 하고. 간부진은 열두 명으로 할 겁니다. 그리고 자리 하나마다 황도 12궁 이름 따악 주면! 크으! 완벽!”
……적어도 금서를 구해다 준 장본인인 마흘론은 만족했으니까.
어쨌든 그 뒤로도 티스베는 줄곧 마나의 운용법에 목이 마른 채로 살았다.
그런데 웬걸, 루넷 영식을 구하러 간 경매장에서 마도서가 딱 등장할 줄이야!
모든 일과를 마치고 주변을 물린 뒤 경건한 마음으로 마도서를 폈을 때, 티스베는 그야말로 그 자리에서 팔짝 뛰어오르고 말았다.
“그래, 이거야. 내가 원하던 거!”
마도서에는 마나 운용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마나를 구체화시키는 방법, 그리고 그를 통해 별자리를 부르고 그들의 권능을 빌리는 방법까지도.
‘보통 사람이라면 최대 여섯 개의 별자리만을 다룰 수 있겠지.’
모든 사람에게는 마나의 속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각 속성마다 주관하는 별자리가 여섯 개씩 있으니까.
하지만 티스베는 달랐다.
그녀는 마력을 신성력처럼 다룰 수 있었으니까.
그건 단순해 보이지만, 아주 큰 차이였다.
마력을 신성력처럼 다룰 수 있다는 건 곧 마나의 속성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열두 개의 별자리 모두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기와 계절에 따라 빌려 올 수 있는 것도 제한이 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능력이었다.
그렇게 티스베는 지난 며칠 당장 운용하기 쉬운 별자리들부터 운용법을 익혔다.
그리고 처음으로 별자리들의 권능을 빌어 오는 것을 시도했다.
“사달멜리크.”
물병자리.
“카우스.”
궁수자리.
“델타.”
염소자리.
자그마치 세 개의 별자리를.
‘원래 계획은 하나씩 차분히 접근해 보는 거였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마나가 담긴 티스베의 목소리에, 별들이 응답하는 것이 느껴졌다.
기묘할 정도의 고양감과 함께 머릿속을 울리는 응답의 목소리들.
아니, 이걸 과연 소리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오감을 벗어난 어떤 감각을 통해 의지를 전달받는 기분이었다.
단지 비유할 것이 소리밖에 없을 뿐.
[낯선 목소리군.]
[부름, 처음? 무리…….]
[물병이 첫 부름부터 세 개의 별자리는 무리가 아니냐는군요.]
가장 중후한 목소리가 염소, 가장 가는 목소리가 물병.
그리고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가 궁수인 것 같았다. 중성적인 목소리의 궁수가 이어 말했다.
[어린 필멸자여, 당신이 무리해서 우리를 부른 이유를 묻겠습니다.]
[단순히 힘을 빌리는 거라면 굳이 이 몸을 부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과해……. 위험. 오만.]
물병이 나직하게 티스베를 질책했다.
그리고 티스베 역시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알아. 오만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
황도 12궁의 권능을 빌리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별자리의 힘을 일부 빌어 오는 차용.
별자리를 잠시 몸에 깃들게 하는 강림.
별자리가 직접 나서서 힘을 쓰는 소환까지.
개중 이렇게 별자리를 곧장 부르는 것은 소환에 해당하며, 동시에 가장 까다로운 방법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대답이 없다면 이 몸은 이만 돌아가겠다. 대답해라, 왜 우리를 부른 거지?]
별자리, 즉 성좌가 시전자를 돕기를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 단계는 엄밀히 말하자면 소환이 아니야.’
소환이 완료되면 성좌가 눈에 보여야 했다.
지금처럼 머릿속에 목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라.
바꾸어 말하자면 성좌들은 지금 티스베를 재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도와줄지 말지.
바꿔 말하자면 이건 도박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냐고?
“다른 건 할 줄 모르니까.”
시전을 위해서는 각 별자리를 소환할 수 있는 별의 이름만 부르면 된다.
하지만 다른 방법들은 애초에 시전법도 까다롭고, 숙련도도 필요했다.
아직 마도서를 전부 읽어 보지도 않은 티스베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날 도와줘. 내 친구가 위험해.”
[마나. 충분하지 않음……. 바보짓.]
“오만한 바보짓이지. 하지만 필요했어.”
그것도 아주 절박히.
티스베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마흘론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도와주지 않을 거라면 빨리 대답하고 사라져. 당신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어떻게 할 거야?
티스베의 물음이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머잖아, 성좌들이 대답을 내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