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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26화 (26/121)

26화

자리를 뜨기 직전의 티스베는 어딘지 불안정해 보였다.

속이 안 좋아 보인다고 해야 할까?

언뜻 보자면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낯이 눈에 띄게 파리해져 있다는 게 보였다.

‘평소의 공녀님답지 못한 모습이셨어.’

물론 에스텔은 티스베를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얼추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귀족의 표본.

칼릭스트 저택에 갔을 때 잠시 마주한 것이었지만, 티스베는 그 잠깐만으로도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

칼릭스트의 성녀를 잠시라도 마주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를 쉼 없이 떠들어 댔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빼어나게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티스베는 뭇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기묘한 완숙함을 가지고 있었다.

말투, 행동,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그랬다.

언뜻 보면 다른 사람들처럼 가볍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잘 재단된 격식이 배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눌 때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다거나, 찻잔 테두리를 손끝으로 톡 쳐서 대화를 환기하는 것까지도 모두.

그런 티스베의 면모는 평민들에게는 성녀의 특별함으로, 귀족들에게는 고귀함으로 비쳤으리라.

그런데 그런 그녀가 눈에 띄게 평정을 잃을 정도로 동요하다니?

에스텔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오늘 에스텔의 완벽했던 하루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에스텔이 오늘 굳이 티스베를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밟고 선 곳이 별천지처럼 느껴질수록,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제게는 과분하기만 한 옷처럼 느껴질수록 티스베가 떠올랐던 것이다.

‘공녀님은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셨지만.’

그게 자신이 티스베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이곳에 공녀님과 함께 서면 좋을 텐데.’

에스텔은 칼릭스트 공저에 방문한 이후에서야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모든 신문과 가십지에서 티스베를 헐뜯고 있고, 동시에 자신을 칭송하고 있다는 것도.

특히나 티스베를 둘러싼 음모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다.

-공녀님이 이분들을 죽였다고? 공녀님과 내가 사냥회에서 신경전을 벌여? 내가 뺨을 맞는 걸 본 사람도 있다고? 이건 말도 안 돼!

상황은 에스텔의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래서 에스텔은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계획을 세웠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녀님과 사이가 돈독해 보인다면 다들 우릴 두고 나쁜 말을 떠들진 못하겠지.

티스베에게 먼저 다가가, 이 근거 없는 소문을 전부 뿌리 뽑기로.

물론 위기는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더 많이 몰렸어.’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에워싸고 말을 붙여 대니, 사교계 초짜인 에스텔로서는 혼이 쏙 빠질 노릇이었다.

하마터면 티스베고 뭐고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뻔했다.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도와주셔서 다행이었지.’

그래, 그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티스베와 킬리안이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며, 또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자신을 보며.

에스텔은 무척 기뻤다.

‘이렇게 관계를 쌓아 나가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티스베가 갑자기 자리를 뜨려 하자, 소어가 의아한 낯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티스베, 갑자기 만날 사람이 있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친구랑 약속한 게 있었는데, 깜빡했어요.”

“친구라니, 누구-”

“시딜린, 시딜린이요. 금방 올게요. 잠시면 돼요.”

“하지만 공녀님,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조금 이따가-”

팍!

에스텔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티스베를 잡으려고 했던 손이다.

한 박자 늦게 그녀가 자신을 거세게 밀어냈음을 알았다.

부자연스럽다 못해 무례하기까지 한 행동이었으나, 사과는 없었다.

아니, 에스텔은 차마 그 이유조차 물을 수 없었다.

“……금방 돌아올게요.”

티스베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 버렸던 까닭이다.

이곳에 에스텔과 소어, 킬리안만을 남겨 두고.

문제는 이곳이 연회장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람으로 가득 찬 연회장이고, 에스텔과 티스베는 현재 연회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방금 있었던 일 역시 모두의 이목을 받고 있었던 것은 자명한 일.

‘시선이 날카로워.’

에스텔은 저도 모르게 밀쳐진 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에스텔 양이 저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셨는데, 패악이라니…….”

“어쩜 저리도 뻔뻔한지 모르겠네요.”

“그 소문은 사실이래요? 모욕을 준 이들을 전부 끔찍하게 죽였다던…….”

“밝혀진 건 없지만, 저 사기꾼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악독하기도 하지. 에스텔 양만 안타깝군요.”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담긴 악의에, 에스텔은 조금 아연해졌다.

‘왜 다들 이렇게까지 공녀님을 미워하는 거야?’

그녀는 시골 귀족이었다.

귀족입네 해 봐야 동네 아가씨와 다를 것이라고는 그저 조금 더 좋은 집에 살며 악기를 배우고 교양서를 읽는다는 것뿐인.

마을 아가씨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놀러다니며 자랐던 시골 귀족.

그러니 수도의 귀족들이 얼마나 실리에 민감한지, 얼마나 매정한지 알 턱이 없었다.

까놓고 말해 간단한 정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던 에스텔이 아닌가.

그제야, 에스텔은 자신이 뭘 간과했는지 깨달았다.

‘단순히 내가 공녀님과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될 게 아니었어.’

그건 일차적인 비난을 막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해 줄 수 없었다.

이들의 눈에는 그저 마음씨 좋고 순진한 성녀가 저 사기꾼까지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공녀님이 이 사실을 모르셨을 리 없어.’

그렇다면, 설마 나 때문에 그렇게 불편하셨던 걸까?

에스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한 발짝도 떼지 못할 충격이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에스텔은 시골 귀족이었다.

그녀에겐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 뛰어 다니는 게 더 천성에 맞았다.

“……제가, 공녀님을 따라가 볼게요.”

에스텔은 그렇게 말하곤 빠르게 인파를 헤치고 티스베가 사라진 쪽을 쫓았다.

그 자리에 킬리안과 소어를 남겨 두고서.

* * *

‘2층, 테라스라고 했지.’

다급한 티스베의 걸음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자신이 등지고 온 상황이 자꾸만 떠올랐지만, 티스베는 애써 지워 냈다.

그녀라고 왜 모르겠는가?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댄 핑계도 조악하고 상황도 나빴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흘론은 원래 긴 문장도 어렵지 않게 보낼 수 있어.’

그런 마흘론이 이렇듯 짧은 단어로 된 회신을 남겼다는 것은 상황이 마냥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안도할 만한 점이 있다면 짧든 길든 어쨌든 회신이 왔다는 사실 정도.

‘내가 지체하면 마흘론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마흘론의 그림자 마물은 기생형이다.

때문에 능력 ‘암영’은 그 자체로 약점이 될 수 있었다.

‘평소에는 능력을 쓰면 조금 피를 빼앗기는 정도지만 자칫 잘못하면 마물에게 몸을 먹힐 수도 있다.’

숙주가 약해졌거나,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해 마물을 지나치게 풀어 놓음으로써 마물을 통제할 힘을 잃었을 때.

마물은 언제고 숙주를 잡아먹을 수 있었다.

‘내가 안일했어.’

티스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녀는 여태껏 자신이 범죄 혐의를 뒤집어쓰게 될 것만 걱정해 왔다.

마흘론이 위험에 처할 상황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는 암영이 없더라도 강했고, 숱한 실전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본인이 목숨을 끔찍이 아꼈다.

-저는 아가씨 명령이라고 해도 위험하면 그냥 도망칠 겁니다. 탓하지 마십쇼. 살아남아야 다음 기회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길거리를 전전하던 거지 생활의 기억 때문일까.

마흘론은 배고픔과 죽음이 가장 두렵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흘론은 어떤 임무를 나가도 사지 멀쩡히 돌아왔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티스베가 가장 눈에 밟혀 하는 이가 소어라면, 가장 고마운 것은 마흘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티스베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무리 티스베에게 망명이 중요하다지만, 마흘론의 안위와 맞바꿀 가치는 없었다.

끼익!

티스베의 손이 2층 테라스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과격한 움직임에 문이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티스베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 들어갔다.

“마히!”

불안한 마음에 그녀는 거칠 게 없었다.

오직 마흘론의 안위에 대한 생각 뿐.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읍-!”

티스베의 뒤에서 검은 손이 나와 그녀를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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