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티스베가 아무리 자신은 루넷 영식을 지키려 했을 뿐이라고 말을 해 봐야 들어 줄 리 없다.
그저 악녀의 발악이 될 뿐일 터였다.
그나마 마흘론은 붙잡힌다 하더라도 암영의 능력이 있으니 도망칠 수 있고, 또 제국민 신분을 잃어도 조디악의 길드장으로 살아갈 수 있다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티스베는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붙잡힌다면 칼릭스트는 자신을 버릴 거라는 것 정도는.
<괴물꽃>에서 그렇게 내쫓겼고, 또 지금도 장로들이 자신을 버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까.
비록 칼릭스트 공작, 알마스가 강경히 거절해 왔지만 그게 어디까지 가겠는가.
티스베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얄팍한 가족의 정 따위를 믿었다가, 괜히 기대했다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 기대에 책임을 져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무너진 잔해와 바닥에 넘어질 자신만 있을 뿐.
‘물론 가문에서 버려지는 건 처음부터 원했던 일이기는 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온건하게 내쫓기는 경우였고!
만약 범죄 혐의로 붙잡혔는데 버려진다면 끝장이다.
거의 반평생 동안 계획해 온 망명이, 그 시간과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끔찍한 건.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한다는 거야.’
어딜 가나 모욕을 듣고, 꺼림칙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소어에게 빌붙어 돈을 축내는, 자신이 가장 끔찍하다고 여겼던 형태로 살아가야겠지.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원해서 성녀 행세를 한 것도 아니다.
물론 티스베는 앞날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 혼자 뭔가를 바꿀 수는 없었다.
왜 시도해 보지 않았겠는가?
나이가 얼추 차면서부터 티스베는 성녀 타이틀을 버리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주교님, 저 왠지 성력이 없는 것 같아요. 성녀가 아닌 것 같아요.
-허허, 성녀님이라고 하셔서 무조건 신성력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지요. 분명 신께서 안배하심이 계실 겁니다.
아니, 없던데요?
-칼릭스트의 피를 이어받은 건 저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신탁의 아이가 방계에서 나올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맙소사…… 누가 이런 불경한 소리를 성녀님께 하였느냐!
-성녀님, 그런 말씀 마셔요. 성녀님은 분명 제국을 구하실 거랍니다.
-이렇게 뛰어나고 상냥하신 분이 성녀님이 아니라면 누가 성녀님이겠어요?
에스텔이요. 에스텔.
이 친절하고 도움 안 되는 사람들아.
‘그리고 원래 뛰어난 게 아니라 내가 쌔빠지게 노력한 거거든……!’
문제는 신전에서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성녀님이야말로 신께서 안배하신 유일한 분이시랍니다!
-제국을 위험으로부터 구해 주실 분!
물론 티스베가 괜히 좌절할까 봐 신경을 써 준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어릴 때부터 티스베를 보는 모두의 눈동자에는 그런 기대가 서려 있었다.
‘뭔가 대단한 걸 보여 주지 않으실까?’
‘성녀님을 내가 모시게 되다니!’
‘분명 범상치 않은 분으로 자랄 거야.’
희대의 사기꾼도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틀림없으니, 맞는 말이긴 하지만.
티스베는 에스텔의 등장 전까지 이런 기대가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체감했다.
신탁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결국 진실을 알리는 걸 포기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티스베의 잘못이던가?
따지고 보자면 해석을 대충한 신전 잘못이고, 멋대로 그녀를 성녀로 만든 사람들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욕을 먹는 건 나지.’
지긋지긋하다.
멋대로 기대를 받는 것도, 그 대가로 뭇매를 맞는 것도.
티스베의 시선이 차게 가라앉았다.
‘킬리안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해.’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서둘러서 마흘론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데, 연락이 도무지 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연회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춤을 추고 난 지금까지 계속.
티스베는 티가 나지 않게 팔찌의 검은 펜던트를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마흘론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 수차례인데, 답이 오질 않았다.
‘지금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발밑에서부터 불어난 불안이 빠르게 발을 적셔 갔다.
‘아니, 일단 큰 소란이 없으니까 당장은 문제가 없을 거야.’
하지만 루넷 영식이 보이질 않는데.
이러다가 죽은 채로 발견되기라도 하면 최악이다.
‘거기에 킬리안까지…….’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서둘러 풀었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에스텔과 소어가 화색을 띠며 그녀를 반기는 게 보였던 탓이다.
“정말 멋졌어요! 춤을 무척 잘 추시네요, 두 분 모두!”
“어서 오세요, 티스베.”
특히 소어는 그녀가 없는 자리가 무척 불편했던지, 반기는 모양이 꽤 다급하기까지 했다.
에스코트하던 킬리안을 밀어내다시피 해 가며 티스베의 옆자리를 되찾았으니 말이다.
“춤 잘 봤습니다. 늘 같이 추기만 해서 몰랐는데, 관객의 시점으로 보니 더 멋지셨습니다.”
마냥 빈말이 아닌지, 소어는 두 뺨에 홍조까지 띄우며 화사하게 웃었다.
티스베가 가장 좋아하는 소어의 천사 같은 웃음이었다.
티 한 점 없이 맑고 호의로 가득한 그 얼굴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해서, 티스베는 소어가 그렇게 웃을 때면 줄곧 마주 웃어 주며 뺨을 쓰다듬어 주곤 했다.
“……칭찬 고마워요, 소어.”
그러나 이번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티스베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와중에도 입꼬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릴 때부터 단련된 얼굴 근육은 당장 토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매끄러운 미소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능숙한 거짓은 곤경을 낳는 법.
소어가 기쁜 듯이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밀었다.
“당연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여기. 부탁하셨던 사과주는 없었습니다만, 갈증이 나신 것 같아 청량감이 좋은 음료를 대신 가져와 봤습니다.”
“아…….”
지금 뭘 입에 대면 정말로 토할 것 같은데.
그저 소어를 잠깐 뗴어 놓기 위해 한 거짓 부탁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티스베의 낯빛이 저도 모르는 사이 파리하게 질렸다.
하지만 여기서 거절하면 다녀온 소어의 성의를 무시하는 행동인 법.
티스베가 마지못해 잔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데, 그보다 먼저 끼어드는 손이 있었다.
“실례. 좀 움직였더니 목이 타는 것 같은데, 내게 잔을 양보해 주는 건 어때, 티스베?”
바로 킬리안의 것.
손의 주인을 확인한 티스베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슨 생각으로 끼어든 건지는 몰라도 이런 때라면 환영이다.
“그래, 양보해 줄게. 소어,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렇게 답하는 소어의 미소가 조금 지워진 것 같은 건 단순히 기분 탓일까?
왠지 모를 위화감에 티스베가 소어를 바라본 순간.
“……!”
손목에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신호가 온 것이다.
‘마흘론!’
티스베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자신이 연회장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그만 팔찌를 덥석 움켜쥘 뻔했다.
그러나 티스베가 겨우 이성을 차리고 팔찌의 펜던트를 살짝 건드렸을 때.
그녀는 가까스로 되찾은 생기를 잃고 말았다.
[2층, 테라스.]
들려온 음성이 몹시 짧았던 것이다.
꼭, 의식을 잃기 전 가까스로 남긴 유언처럼.
* * *
에스텔 일레르.
그녀는 오늘 내내 기분이 붕 떠 있었다.
시골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할 만한 일들을 잔뜩 겪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처음으로 체감했다고 해야 할까.
‘내가 성녀라니.’
물론 자신을 두고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근 며칠 간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하지만 이렇게 맨 피부로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에스텔은 줄곧 외숙부인 질레트 백작의 명령에 따라 칩거를 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이상한 기분이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평범한 시골 영애에 불과했다.
수도 사교계에 발을 붙이려고 이리 폴짝, 저리 폴짝 뛰어다니던.
그러나 이제는 에스텔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변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황제와 독대도 가졌고, 모두가 일등신랑감이라 꼽는다는 킬리안을 파트너 삼아 연회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공녀님과 이야기도 나눴지.’
소위 말하는 별천지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동경하던 티스베와 킬리안이 막역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함께 서 있거나, 티스베의 약혼자라는 살바토르 공작을 소개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불과 한 달 전의 그녀가 상상이나 했을까?
‘오늘은 아주 특별한 종이에 일기를 써야지.’
정말이지 멋진 경험이었다.
그렇게 오늘 연회도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에스텔은 그런 생각을 했다.
“미안해요. 잠깐 만나고 올 사람이 있어서…… 금방 돌아올게요.”
……라는 말과 함께 조금 전 티스베가 다급한 얼굴로 혼자 자리를 뜨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