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사실 처음부터 의심하긴 했었다.
티스베는 줄곧 용의자에 대한 수사망을 좁히고 있었으니까.
‘보안 등급 황금열쇠.’
특히나 이것이 수사망을 좁히는 데 한몫을 해 줬다.
보안등급 황금열쇠가 나왔다는 건 적어도 범인이 공작 이상의 신분이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황태자인 킬리안은 당연히 포함.
게다가 킬리안의 평소 인품을 생각하면 제법 일리가 있어 보였다.
‘킬리안은 작중에서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니까.’
그리고 그는 성격이 나빠서,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는 것도 상당히 즐겼다.
티스베가 킬리안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킬리안은 쿠키를 건네주는 척 손을 뻗어서 찻잔을 엎어 버리는 놈이니까.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지.’
그래서 에스텔을 데리고 자신에게로 다가왔을 때부터 무슨 꿍꿍이인지 경계하고 있었는데…….
-티스베. 난 네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안다.
라니?
이건 너무나도 ‘내가 범인이오.’하는 말이 아닌가?
티스베 본인이 보기에도 본인이 범인 같은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티스베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바로 진짜 범인 본인 아니겠는가!
‘물론 소어도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하긴 했지만.’
소어는 천사니까 논외로 두어야 한다.
어떻게 킬리안 같은 인성파탄자와 소어를 동일선상에 둘 수 있단 말인가?
킬리안은 소어처럼 덮어 놓고 티스베의 결백을 믿어줄 성격도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만약 킬리안이 정말 범인이라면…….
‘난 지금 호랑이 굴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아니, 호랑이 굴도 아니다. 여긴 범의 아가리다.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머리채를 붙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휙 고개를 들었다.
도저히 속을 모를 얼굴로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킬리안이 코앞에 있었다.
우아하고 날카로운, 동시에 자못 음울한 첼로의 선율을 닮은 남자.
“티스베. 난 네가 정말 사지가 잘리기라도 한 줄 알았어.”
넌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영리한 사람인데 말이야.
“날 피하고, 이런 상황에도 아무것도 하질 않으니 대단히 실망스러웠지.”
그제야 가까운 거리가 느껴졌다.
허리에 감긴 킬리안의 팔과, 약간의 틈을 두고 맞붙은 몸.
익숙한 상황과 익숙한 낯인데도 위화감이 들었다.
‘킬리안이 원래 이랬던가?’
티스베는 킬리안을 잘 알았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도 있었다.
<괴물꽃>의 정보가 있었고, 그녀 본인이 살면서 습득한 것도 있으니까.
그리고 티스베가 아는 킬리안은 기분 나쁠 정도로 오만하기는 해도 위험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저 반듯한 낯은 왜 이리도 사납게 느껴지는지.
티스베는 그 위화감에 일순 스텝을 잊었다.
꼬인 다리에 몸이 휘청이려는 찰나.
킬리안이 그녀를 자연스럽게 당겨 안으며 실수를 만회했다.
“조심해야지. 실수했다가는 또 무슨 소문이 돌지 모르는데. 이번에는 황태자를 죽이려고 했다는 소문이 돌까?”
하하.
귓가에 나직이 뱉어지는 건조한 웃음소리에 쭉 소름이 돋았다.
조금의 웃음기도 남지 않은 시선이 태연히 웃고 있는 킬리안을 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은 음악도 모두 끝난 순간이었다.
짝짝짝짝!
우레 같은 박수 소리에 티스베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최신 유행에 걸맞게, 천 따위로 가리지 않은 티스베의 맨 어깨 위로 장갑 낀 킬리안의 손이 닿았다.
새카만 머리칼. 새빨간 눈동자. 사람을 옭아매는 듯한 특유의 오만한 시선까지.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오랜만에 만난 친우에게 아름답게 미소 지어 주었다.
그 미소에는 만족감마저 서려 있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알아들었겠지.’
자신이 그녀를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해 보니 느껴졌다.
티스베에게는 자신이 이정표 삼았던 그 면모들이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역시 발톱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는 거겠지.
이제야 그가 알던 티스베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기이하리만치 모든 것에 관조적이고, 동시에 냉소적이던 소녀.
과연 그녀는 알까.
자애로운 성녀의 연기를 하지 않을 때의 자신이, 얼마나 지겹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녀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 보였다. 지쳐 보였다.
그런 주제에 티스베는 세상을 사랑하는 성녀 연기를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건 자신뿐일 거라고, 킬리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나도 모를 수도 있었겠지.’
만약 티스베의 진짜 얼굴을 알아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
-윽, 너 봤어? ……봤구나. 조용히 해야 해.
아직도 킬리안은 티스베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러 고위 귀족들이 모이는 정찬 자리.
고작 일곱에서 여덟 살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던 킬리안과 티스베도 그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참석이라고 해 봐야 밥만 먹고 어른들이 이야기를 할 때는 쫓겨나는 신세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쫓겨나서 정원을 맴돌던 중 킬리안은 뭔가를 발견했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마차에 계란을 집어던지고 있는 한 여자아이를.
-자, 이거 들어. 그리고 던져! 던지라니까? 그래, 잘 하네! 이제 너도 공범이야. 어디 가서 말하면 죽는다?
킬리안은 얼떨결에 공범이 되어서는 눈만 끔뻑였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이러면 혼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킬리안은 그런 순진한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므로, 다른 것을 물었다.
-왜 이러는 거야?
-쟤가 나한테 살수를 보냈거든. 빌어먹을 영감탱이. 내가 모를 줄 알고.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며 어디서 챙겨왔는지 모를 밀가루 폭탄까지 야무지게 던진 뒤에야 손을 털고 돌아섰다.
한참 나중에서야 그 성격 더러운 여자아이가 상냥하고 현숙하기로 유명한 칼릭스트의 성녀라는 걸 알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물론 미움도 좀 샀고, 따로 교류도 없지만.’
적어도 킬리안은 티스베를 친구로 여겼다.
킬리안이 티스베를 잘 아는 만큼 티스베 역시 킬리안의 진면모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러니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좀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친구가 무려 황태자인데 말이다.
그래서 킬리안은 티스베에게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적어도 나는 네 편이다, 티스베.’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킬리안 나름대로는 아주 드문 호의였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호의를 베푼다고 해서 상대방이 무조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는 점.
자칫 잘못하면 괜히 상대방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까지도.
킬리안을 바라보는 티스베의 눈동자에 경멸이 이글거렸다.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그러니까 지금, 범죄자가 되기 싫으면 네 앞에 무릎 꿇으라고 협박한 거지?
‘정말 킬리안이 진범인 건가……?’
‘조만간 같이 차라도 한잔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티스베가 싫어하던 차가 있었는데…….’
그렇게 연회장의 한복판에서, 눈물겨운 동상이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 * *
왈츠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는 내내, 티스베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킬리안이 진범일지도 모른다니.’
아니, 진범이 아니라고 해도 위험하다는 게 문제지.
킬리안은 얼마든지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가장 위험한 건, 반드시 진범만이 루넷 영식을 죽이려 든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킬리안이 여태 살인사건을 만들어 온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진범이 노리는 다음 목표물이 누구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티스베를 모욕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킬리안이 티스베를 일부러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루넷 영식을 죽이고, 티스베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래서 일부러 그동안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던 건데…….’
물론 금족령이 내려졌던 것도 있었지만, 티스베는 될 수 있다면 가급적으로 외출을 삼갔다.
혹시라도 꼬투리를 잡히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런 큰 연회까지 불참할 수는 없었다.
‘황궁은 킬리안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어.’
킬리안이 무언가의 수작을 부려 자신을 곤경에 빠트리려고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티스베는 이곳에 마흘론까지 데려오지 않았는가.
만약 뭔가 문제가 생겨서 티스베가 궁지에 몰렸는데.
거기에 마흘론의 존재까지 드러난다면?
‘아무도 내 결백을 믿어 주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