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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23화 (23/121)
  • 23화

    덕분에 티스베는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으로 춤을 추고 있었고…… 그건 킬리안의 발등에게는 다소 불운한 소식이었다.

    벌써 뒷굽으로 밟힌 횟수만 다섯 번째니까.

    그리고 방금 여섯 번째로 밟힌 킬리안이 고통을 한껏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티스베, 네가 이렇게나 춤을…… 못 춘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

    “천재도 못 하는 게 있는 법이지.”

    물론 티스베는 춤을 잘 추었다.

    남의 발을 밟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를 리드할 수도 있었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티스베의 구두는 지금만큼은 오직 킬리안의 발을 밟기 위해 존재했다.

    그러나 여섯 번…… 아니 이제 일곱 번씩이나 발을 밟아도 티스베의 마음은 영 편치 못했다.

    ‘적당히 자리만 지키다 사라지려고 했는데.’

    정작 자신이 킬리안과 춤을 추고 있다니.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는 몰라도, 원흉은 확실했다.

    티스베의 날카로운 시선이 킬리안을 응시했다.

    “솔직하게 말해, 킬리안. 무슨 꿍꿍이로 나한테 에스텔을 데려온 거야?”

    “……꿍꿍이라니. 이렇게까지 날 모르나?”

    “널 잘 아니까 이러는 거지. 네가 아니면 누가 있겠어?”

    <괴물꽃>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시골에서만 자란 에스텔에게 무도회란 수도의 높으신 분들만이 참석하는 무언가였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보석들을 몸에 걸치고, 태어나서 본 그 어떤 것보다 화려하고 장엄한 무도회장에 발을 들였다. 몰려드는 인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과 짙은 사치의 향기에 에스텔은 정신을 도무지 차릴 수가 없었다.]

    장황하지만 요약하자면.

    “에스텔은 무도회가 오늘이 처음이라고. 뭘 할 수 있겠어?”

    에스텔이 사교계 초짜라는 것이다.

    누구나 데뷔탕트 전까지는 멋진 그림을 그린다.

    우아함 속에 칼을 숨긴 화술과 텃세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나.

    한껏 꾸민 드레스와 여태껏 가문에서 교육받은 것들을 뽐낼 기회를 갖고, 또 흠모와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사교계의 유명인사로 올라서는 것까지.

    ‘하지만 현실은.’

    조금만 관심이 쏟아져도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리거나 실수를 연발하기 십상이다.

    에스텔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리 없었다.

    이렇게 큰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처음.

    주목받는 것도 처음.

    사람이 몰려서 질문을 쏟아 내는 것도 처음이니, 정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에스텔은 첫 무도회 때 곤란을 겪는다.

    ‘이걸 도와주는 게 킬리안이지.’

    물론 이 속도 머리색도 시커먼 인간이 마냥 순수한 목적으로 도운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원작에서도 서서히 호감도를 쌓아 나갔다.

    그런데.

    ‘에스텔이 어떻게 이 인파를 헤치고 날 찾아올 수 있겠느냐고.’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킬리안의 소행이라고.

    그리고 경험상 킬리안이 이렇게 의뭉스럽게 구는 걸 무시하면 필히 나중에 사달이 난다.

    그러니 초장에 알아야 했다.

    “말해. 왜 데려온 거야? 설마 망신을 주려는 건-”

    “티스베.”

    그때, 묵묵히 여덟 번째 발을 밟히던 킬리안이 난처한 듯, 낯을 찡그려 웃었다.

    “그보다 네 약혼자를 좀 보지 그래. 아주 눈에서 불을 뿜는데.”

    “……? 말 돌리지 마. 소어가 넌 줄 알아?”

    “진짜라니까. 봐.”

    휙, 킬리안이 박자에 맞추어 티스베를 안은 채로 몸을 반 바퀴 틀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킬리안이 보고 있었을 시야가 보였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스텔과, 기다란 잔을 손에 들고 있는 소어.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았던 까닭에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당장 눈물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저 말랑한 얼굴이.

    “아니잖아. 감히 나한테 거짓말을 해?”

    “…….”

    킬리안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어쩐지 쌓인 게 많아 보이는 미소였지만, 티스베의 알 바는 아니었다.

    “됐고.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나랑 엮여서 좋을 이유가 없을 텐데 이러는 이유가 뭔지. 너도 알잖아. 이제 나는 성녀도 아니고, 에스텔이 칼릭스트에 입적되면 공녀도 아니게 될 걸.”

    “미래의 일이지. 가능성에 불과한.”

    “설마 에스텔이 입적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왜 그렇게 확신하는지, 나야말로 모르겠군. 듣기론 칼릭스트 공작이 강경하다던데.”

    킬리안의 말에 티스베가 픽 웃었다.

    말마따나 칼릭스트 공작, 알마스는 최근 티스베에게 제법 정성을 쏟고 있었다.

    -네가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을 거다.

    -혹시라도 불민한 소리가 들리거든 참지 않아도 된다. 그러기 위해 가문이 있는 게 아니겠느냐.

    오늘 연회에 오기 전에도 그랬다.

    알마스는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티스베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말했다.

    -……네가 많이 자랐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표현이 지극히 적은 그치고도 제법 다정한 말이었다.

    지금보다 몇 년만 어릴 때 들었더라면 저도 모르게 감동을 느꼈을 만큼.

    하지만 티스베는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죄책감 때문이시겠지.’

    그나마 손녀딸이라고 동정이라도 하는 걸까.

    한 번 손 내밀어 준 적 없는 손녀딸인데도…….

    “…….”

    입 안이 썼다. 티스베는 서둘러 상념을 지워 내고 대꾸했다.

    “강경하시긴 하지. 진짜 성녀가 나오자마자 옳다구나 날 내치면 모양새가 나쁘잖아. 곧 입적될 거야. 그러니 허튼 수작을 부릴 시간에 에스텔에게 신경 더 쓰지 그래.”

    “아까부터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티스베.”

    킬리안이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려 보였다.

    “내가 설마 그녀 같은 중요한 인물에게 신경을 안 쓸 거라고 생각하나?”

    “……그럼?”

    “에스텔 일레르 본인이 널 찾아가길 원했어.”

    이번에는 티스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아니라, 에스텔 양이?”

    “그래. 너에게 꼭 인사를 하고 싶다던데. 한데 통 못 찾기에 좀 도와준 것뿐이야.”

    “……정말 이유가 그뿐이라고?”

    “물론 에스텔 일레르가 찾지 않는다면 내가 좀 나설까 싶기는 했지.”

    그럼 그렇지.

    뻔뻔한 대답에 둥글어졌던 티스베의 눈이 도로 가늘어졌다.

    “왜?”

    “네 반응이 보고 싶었고.”

    네가 보고 싶었으니까.

    흘리듯 덧붙여진 말에 티스베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내가?”

    “그래. 내 성인식 이후로 네가 날 매몰차게 대하잖아.”

    “그게 뭐 어쨌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진짜 성녀는 저기 있어.”

    “알아. 그리고 너는 여기 있지.”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

    내 불운한 성녀님.

    굳이 그녀의 이름을 호명한 킬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미형의 외관은 웃을 때조차 흐트러짐이 없었다.

    산뜻한 미소조차 무척 유혹적으로 느껴진다면 조금 우스울까.

    그러나 그것이 킬리안이 제 얼굴을 써먹는 방법이었다.

    이용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조차도 아낌없이 쓰는 것이 그였으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사용하고, 원하는 것은 진창을 굴러서라도 얻어 낸다.

    누군가는 그런 킬리안을 보고 지독하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킬리안의 생각은 달랐다.

    적어도 그는 자신보다 더 지독한 인간을 한 명 알고 있었으니까.

    -잠은 죽어서 자면 돼!

    라고 외치며 사흘 밤낮 쉬지 않고 성서를 외우던 한 소녀.

    소녀가 제 손바닥보다 더 두꺼운 성서에 그렇게 매달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성서 암기 시험에 통과해야 신전의 서재에 들여보내 준대. 거길 들어가야 신성력 책을 구할 수 있는데…… 아무튼 자기들 딴에는 안 들여보내려고 한 얘기겠지. 하지만 너네는 사람 잘못 봤어.

    하지만 상식적으로 성서를 전부 외우고, 시험을 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킬리안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소녀가 당당하게 신전 서재 출입권을 따오기 전까지는.

    -어떻게 한 거야? 설마 그걸 다 외웠어?

    -그걸 다 외울 수 있으면 내가 사람이게.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전략을 바꿨지.

    신전의 시험은 부정행위 방지를 위해 마나 감지 장치가 설치된 방에서 시험을 본다.

    -그거 부쉈어. 그리고 베꼈지. 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준 거니까 비밀이야?

    소녀,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며 킥킥 웃었다.

    훗날 알았지만 티스베는 이미 성서의 1/3을 외운 상태였다.

    암기력도, 근성도, 그리고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과감함까지도 그녀는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건 킬리안에게 어떤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마치 형을 따라하는 동생처럼, 선두를 따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물론 그는 호락호락한 동생도, 순순한 후발주자도 할 만한 성정이 아니기는 했다.

    ‘덕분에 미움도 좀 샀지만.’

    애초에 호감을 살 생각도 딱히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그런데 최근은 그의 이정표가 상당히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에스텔의 등장 이후.

    티스베에게는 급격하게 비난이 쇄도했다.

    하지만 킬리안은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다.

    -그 애라면 뭔가 생각이 있겠지. 가만히 당할 사람도 아니고.

    그러나 갈수록 상황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요즘 이름이 들리지 않는 날이 없으시던데. 나한테는 얼굴도 잘 보여 주지 않더니. 새로운 성녀가 나타나고…… 이제는 살인? 그딴 무슨 머저리 같은 소문까지 났던데.”

    하하.

    웃음기 없는 킬리안의 입매에서 건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킬리안은 티스베를 믿었다.

    티스베에게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고. 그가 아는 티스베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나 오늘 연회장에서 본 티스베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점이 킬리안을 화나게 했다.

    일순, 자신이 에스텔에게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게 만들 만큼.

    “티스베. 난 네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귓가에 속삭여진 말에, 티스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정곡이로군.

    예상한 반응이 나오자 비로소 킬리안의 낯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에 티스베의 낯에 드리워진 음영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킬리안이 예상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가설에 경악을 숨기지 못하는 중이었으므로.

    “킬리안, 너…….”

    너 설마.

    ‘……네가 진범이냐?’

    물론, 대단히 잘못된 가설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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